평생의 꿈, 남북 화해와 협력

평생의 꿈, 남북 화해와 협력

2009.08.18. 오후 2:02.
댓글
글자크기설정
인쇄하기
AD
[앵커멘트]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족의 분단을 해소하는 문제를 평생의 과제로 여기고 평화와 통일 논의의 선구자로서의 길을 꾸준하게 걸어왔습니다.

대통령 재직 시절에는 햇볕정책으로 알려진 화해와 협력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획기적으로 완화시켰습니다.

왕선택 통일외교전문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남북 문제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문제 의식은 분단이 평화와 번영에 장애가 된다는 상식에서 출발했습니다.

1970년에 이미 남북연합을 골간으로 하는 3단계 통일 구상이 나왔고 95년에는 보수진영의 책사 임동원 전 통일차관을 영입하면서 체계를 갖춘 이론으로 발전했습니다.

98년 대통령 취임과 함께 통일에 대한 평생의 고민과 구상이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99년 1차연평해전 발생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화해와 협력 기조의 정책 일관성은 유지됐습니다.

[녹취:김대중, 전 대통령]
"햇볕정책은 철저한 안보를 배경으로 해서 남북간에 서로 화해 협력하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것이지 안보는 등한시하고 덮어놓고 유화정책을 펴자는 것은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의 줄기찬 노력은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뒤 한반도에 더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한 순간이 햇볕정책의 정점이었습니다.

[녹취:김대중, 전 대통령]
"이번에 가서 현지에서 확인함으로써 나는 우리의 미래에 화해와 협력,통일도 할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햇볕정책에 대한 도전은 나라 안팎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습니다.

국내적으로는 대북 퍼주기 논란에 시달렸고 2001년에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불쾌감을 보이면서 제동이 걸렸습니다.

[녹취:부시, 전 미국 대통령]
"북한 지도자에 대해 정말로 회의적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2002년 10월 미국은 마침내 우라늄 농축 의혹을 빌미로 북미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갔습니다.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개혁개방을 조심스럽게 추진하던 북한은 미국의 공세적 태도에 빗장을 닫아걸었습니다.

2003년 대북송금 논란이 사법처리 대상이 되고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햇볕정책은 추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됐습니다.

그러나 평화적 통일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열정과 의지는 식지 않았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남과 북,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들에 대한 조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녹취:김대중, 전대통령]
"(김정일 위원장도) 6자회담에 하루빨리 참가해서 미국하고 교섭해서 그래가지고 북한 핵문제를 해결해서 한반도 비핵화 이것을 해야 합니다."

이제 김 전 대통령의 충고를 더이상 직접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가장 실용적인 통일의 방안을 치열하고 꼼꼼하게 연구하고 제시한 그의 열정과 의지는 앞으로 계속해서 한반도 통일을 논의할 후세들에게 밝고 따사로운 햇볕으로 남을 것입니다.

YTN 왕선택입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