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北 홍순경 납치미수 사건은?

1999년 北 홍순경 납치미수 사건은?

2014.11.20. 오후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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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오늘은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북한판 '쇼생크 탈출'을 짚어보겠습니다.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북한 유학생 한 모 씨가 강제 북송되던 중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소식, 접하셨을 겁니다.

유학 내내 감옥 아닌 감옥같은 곳에서 생활했겠죠.

탈출 이후, 지금은 어딘가에서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오욕의 강물을 건너 자유의 빗물을 맞고 인생을 만끽할 수 있을까요.

자, 평행이론으로 봐야 될까요.

15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홍순경 납치 미수 사건' 기억하시죠.

홍순경 씨 부부도 태국에서 강제로 북송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홍순경, 그가 지금 YTN 스튜디오에 나와 있습니다.

강제 북송은 왜, 어떻게 이뤄지는 건지, 15년 전의 상황과 비교, 분석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슈 대담에서 만나보시죠.

[앵커]

안보라 앵커가 너무 잘 설명을 해 주셔서 제가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제, 오늘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굵은 글씨로 나타나 있는 뉴스.

그것은 바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북한 유학생의 탈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 속에 항상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 비견되는 일이 1999년에 있었고, 그 주인공이 바로 지금 제 옆에 있는 홍순경 당시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 과학기술참사관이었습니다.

바로 이 홍순경 참사관의 납치미수 사건, 지금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로 홍순경 전 참사관이 어떤 경로로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됐는지, 그리고 그때 당시 태국의 정부의 입장과 앞으로 나올 프랑스 정부의 입장은 어떠한 것인지 이런 문제 직접 비교해 보겠습니다.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어제 밤에 그래도 전화를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어제 밤에 직접 전화를 해서 한번 꼭 모시고 싶다고 제가 전화를 드렸었는데 제가 전화드린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고 어제도 제가 전화로 말씀드린 대로 프랑스에 유학중인 지금 북한 유학생 탈출 사건 때문에 그런데요.

우선 이 사건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 드셨습니까?

[인터뷰]

사실은 북한에서는 비일비재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이번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은 제 사건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아마도 1989년 그때 독일쪽에 나갔던 유학생들이 다 무리로 소환되는 일도 있었거든요.

당시에 아마 독일쪽에 나가있던 우리 북한 유학생들이 전철우 씨를 비롯해서 전철우 씨가 갑자기 한국에 왔잖아요.

그걸 계기로 해서 동구 구라파 사회주의 나라들에 나가있던 유학생들을 대거 소환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상태에서 소환이라는 말을 하지만 그들이 외국으로 탈출할까 봐 사실은 몽땅 소환해서 북한으로 데려가고 그다음에는 다시 그쪽으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지금은 기본적으로 그 이후에 유학생은 중국에만 내보냈죠.

그래서 중국에 나간 게 한 300명 정도.

그게 전부입니다.

그렇게 하고 이번에 프랑스에 나간 유학생 10여 명은 아마 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이렇게 나간 것뿐이지 실제 자유로운 유학이 아니고, 학교, 학교 간의 교환으로 한 10여 명 나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앵커]

이번 납치 사건에 등장하는 게 북한의 호송조라는 건데요.

그러면 우리 홍 선생님도 사실은 호송조에 의해서 그러면 강제송환이 될 위기에 처하셨던 거예요?

어떻게 된 겁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사실은 북한은 제 경우에는 처음에 저희 상급이 북한에서 보위부에 체포됐습니다.

[앵커]

상급이라는 건?

[인터뷰]

우리 상관이죠.

그러니까 장성택이 부하들을 다 숙청한 것처럼 어느 상관 한 명이 체포되면 그 아래 기관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때 그 과학기술참사로서 지문회사를 태국에 내와가지고 거기에서 지문열쇠라든가 이런 걸 개발하기로 해서 그걸 제가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상급 지휘관이 안전기술국장이 왕별 하나 박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보위부에 의해서 체포됐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빌미로 해서 베이징에 나와 있던 지사 구성원 10여 명을 모두 소환해서 이미 감옥행을 다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고 우리나라에 한 두세 달 더 있다가 급기야 소환장이 떨어졌는데 그게 하나의 체포영장과 같은 그런 소환장이 내려왔어요.

그걸 보는 순간에 베이징 지사가 몽땅 들어가서 감옥행 한 것과 비교하면 이건 틀림없이 감옥행이 틀림없다.

이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불응했죠.

그래 가지고.

[앵커]

소환에 불응했다, 도망가신 거네요.

그러면.

[인터뷰]

그렇죠.

그래서 대사관을 떠나서 지방으로 가족과 함께 전부 숨어서 한 보름, 한 달쯤 있으면 아마 북한이 조용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안일한 생각 가지고 있다가 공안에 체포됐죠.

[앵커]

그러니까 방콕에 계셨을 것 아닙니까?

[인터뷰]

아니죠, 방콕 후에 파타야 쪽으로.

[앵커]

그러니까 제 얘기는 뭐냐면 대사관은 방콕에 있었을 거 아닙니까.

참사관 방콕에 계시다가 파타야쪽으로 이동을 하셔가지고 거기에 2주 정도 숨어있다가 체포가 됐다.

아니, 파타야쪽에 숨어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북한 사람들이?

[인터뷰]

북한은 제가 탈출한 즉시에 북한 보위부에서 3명의 대표단을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방콕에 나왔고 그다음에 주변에 있는 안전대표들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비롯한 그런 각 대사관에 나와 있는 안전대표들이 바로 보위부에서 파견됐거든요.

그 사람이 태국에 다 집결해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작전을 벌였죠.

[앵커]

우리라는 건 사모님하고 아드님.

[인터뷰]

우리 가족하고 아들하고 3명이요.

그래서 그들은 태국 경찰 두 명을 돈으로 매수했어요.

매수해서 경찰 두 명을 앞세워가지고 우리를 추적해서 결국은 보름 만에 체포가 됐습니다.

[앵커]

체포가 돼서 그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인터뷰]

체포돼서 사실은 북한 대사관에.

[앵커]

그게 호송조 아니에요, 결국 따지고 보면.

[인터뷰]

호송조죠.

호송조뿐만 아니라 체포조라고 할 수도 있고 그래 가지고 그들한테 새벽 5시에 그들이 우리 자는 방에 쳐들어왔는데 들어오자마자 수갑을 채우고 정말 주머니에.

[앵커]

수갑을 채웠어요?

다른 나라에서 수갑채우네요.

[인터뷰]

그렇죠.

움직이지 못하게 다 수갑 채우고 주머니에 혁띠까지 다 풀고 완전히 죄인 취급해서 결국은 대사관으로 끌고 가더라고요.

거기 가서 새벽 5시에 체포됐는데 한 8시까지 그냥 대사관 안에서 거의 죄인 취급하다가 결국은 8시경에 차에 태워서 이제 끌고 갔죠.

그래서 나는 처음에 공항으로 간다면 공항에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좀 소동을 피워서 결국은 태국경찰에 좀 호소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그들이 내 의도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를 라오스로 끌고 갔어요.

라오스는 북한과 가까운 사회주의체제고 지금도 가깝죠.

그렇기 때문에 라오스로 끌고 가는 걸 보고 이제 완전 탈출하기 힘들겠구나 하면서.

[앵커]

육로로 간 거 아니에요.

라오스로.

[인터뷰]

육로로.

그래서 나와 우리 처는 미니버스에 타고 결국 보위부 요원 8명이 딱 옆에서 호송하고 그렇게 하고 가는 도중에 저는 세상이 체포되는 순간부터 한 생을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앵커]

아드님하고 사모님이 계시잖아요.

[인터뷰]

그렇죠, 아들 때문에 더욱 더 정말 너무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그렇지만 어떤 방법이 없잖아요, 사실은.

그래서 가는 도중에 어떻게 하면 내가 죽어야 편하겠다, 북송된다는 것은 죽기보다 못한 그런 처지거든요.

고문받고 험악한 학대 속에서 사람이 견디지 못해요.

사실은 2, 3달도 저는 채우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럴 바에 차라리 차가 대폭발해서 죽게 해 달라고 나도 모르게 하나님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속으로.

그래서 빌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에 차가 우드드 떨리더니...

[앵커]

라오스 가는 육로로 가다가 떨어진 거예요?

[인터뷰]

황급히 굴러서 떨어졌어요.

그랬죠, 그러니까 차가 굴렀으니까 더 가지 못하지 않나요.

태국에는 그들의 풍습으로 해서 어떤 사고가 나면 가던 차들이 거기에 다 몰려서 어떻게 하면 도와주려고 숱한 200명이 모이더라고요.

그렇게 하고 거기에는 경찰도 오고 병원에서 호송차도 오고 그렇게 해서 복작거리는데 그 사고로 해서 우리 집사람은 머리는 다치지 않았는데 길에 나가 떨어지면서 손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그대로 나와서 피가 뚝뚝 떨어졌죠.

저는 가슴하고 머리가 좀 다쳤는데.

[앵커]

아드님은요?

[인터뷰]

아들은 같은 차를 안 탔기 때문에 그건 사고가 안 났죠.

그래서 우리 둘은 그걸 계기로 해서 어쨌든 병원에 가서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내가 쓰던 집주인 전화번호 하나가 머리에 떠오르더라고요.

다른 전화번호는 다 모르잖아요.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그 전화번호로 집주인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집주인이 원래 집에 잘 안 있어요.

그런데 그날은 전화를 받았다고요.

그것도 역시 상당히 기회가 살 기회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전화를 받길래 우리가 이렇게 체포돼서 호송되고 있는데 빨리 경찰과 UN의 지시 아래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날 원래 UN난민층을 받기로 한 날 체포가 됐거든요.

그래서 연락해 달라고 하고, 주소를 병원사람한테 전화를 바꿔서 알려줬죠.

그랬더니 그쪽에서 연락이 돼서 우리를 구원하는 경찰이 왔죠.

[앵커]

아드님은요, 아드님은 딴 차에 있었으면 계속 북한 사람들이 끌고 갔을 것 아닙니까?

[인터뷰]

그렇죠, 그래서 아들이 사실은 우리 둘은 그렇게 해서 경찰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는데 제일 문제는 아들 문제였죠.

사실은 아들 때문에 우리가 탈출을 했는데 아들의 행방을 모르니까 이건 밤잠도 안 오고 밥도 한 술도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보름 동안을 계속 편지를 썼어요.

태국 정부에다가 영어도 능하지 못한데 눈도 잘 안 보이고 그저 펜 하나에 종이 얻어가지고 영어로 그래도 편지를 써서 아들을 구원해달라.

아들은 죄 없다.

그런 걸 계속 호소했는데 태국정부가 적극적인 협력을 해서 마지막에 총리가 최종성명을 냈어요.

젊은 청년을 부모들한테 보내라.

만일 보내지 않는다면 세계가 너희를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3월 23일 오전까지 보내지 않으면 너희 외교관계 단절하고 몽땅 추방이다.

[앵커]

갑자기 태국 총리 그분이 멋있어보이네요.

[인터뷰]

너무 멋있죠.

그런 분이 나는 그래서 한 2년 전에 가서 만났어요.

그분을.

가서 선물 변치도 않는 거 가지고 가서 인사를 했고.

그분이 성명을 했기에 북한이 아주 난처하게 됐잖아요.

죄 없는 아이를 하나 갖다가 죽이면 뭘하고.

그 아이 때문에 쫓겨나니까 그게 저울질이 됐죠.

그래서 그게 바로 작은 나라도 북한을 다룰 수 있는 그런 하나의 경험이 아닌가 생각을 해요.

[앵커]

그렇다면 말이에요, 지금 태국 정부도 그렇게 나왔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프랑스 정부는 사실 태국 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입장을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북한하고 태국은 수교관계에 있었지만 지금 프랑스하고 북한은 수교관계가 없잖아요.

그렇죠.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강경하게 나올 수가 있나요?

북한 호송조인가.

예를 들면 이런 사람을 불법경위로 다 체포한다든지.

하여간 뭘 어떻게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인터뷰]

내가 알기는 프랑스에 무역대표부가 있습니다.

그 대표부는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 대표부가 체포조 역할을 하고 아마 북에서 대표단도 나설 수 있고 주변에서 모여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래서 이제 제일 중요한 거는 북한 사람들이 잡아가려다가 우선 잡히면 끌려가지 않으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살해를 해서 시체라도 가지고 갈 수 있고, 그런 위험도 있기 때문에 우선 우리 외교부가 프랑스 경찰이나 프랑스 외교부에 강한 요구를 해서 그런 사람들이 강제송환되지 않도록, 그들이 북한 요원들을 감시하고 북한 대표부를 감시해서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고 북한이 그사람을 발견해서 체포하기 전에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도록 우리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이런 생각이거든요.

사실은 제가 체포될 때도 역시 태국 정부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했는데 솔직히 모르겠어요.

우리 한국정부가 그렇게 요구를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강한 대책을 취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라도 한국정부가 그런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헌법에 규정되어 있잖아요.

그런 조건에서 자기 국민보호차원에서 프랑스 정부와 협력해서 반드시 북한요원들이 그런 납치행각을 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그리고 제가 이걸 여쭤보기가 뭐한 부분인데 북한은 외교관이나 이런 분들이 나가실 때 꼭 가족 중의 한 분은 인질처럼 북한에 묶어두죠.

[인터뷰]

물론이죠.

저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저의 맏아들은 아직 북한인질로 남아있었고 탈출을 못 했어요.

그래서 아직도 맏아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지금 소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역시 많은 대부분 거의 다 그런 인질로 자기 자식들을 남기게 되어 있고 가족 전부가 나가는 경우는 극히 최고위층 외에는 허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앵커]

아드님은 그럼 소식을 전혀 모르시는 거군요.

[인터뷰]

네,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고 가장 가슴 아픈 게 맏아들을 놓친 게 너무 가슴 아프죠.

[앵커]

제가 볼 때는 조금 고생을 할 수는 있지만 분명히 살아있을 겁니다.

그런 소식을 분명히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물론 계속 건강하셔야 될뿐만 아니라 북한인권 문제를 계속 국제사회에서 제기를 해야 되겠죠.

이번 인권결의안, ICC 제소뿐만이 아니고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을 납치하려는 시도 때문에 북한은 더욱 더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겁니다.

[인터뷰]

그렇죠, 만일 북한이 그 학생을 비밀리에 강제북송하는 경우에 정말 북한은 더욱 더 큰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앵커]

잘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죠, 감사합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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