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전 '아웅산 테러' 운명의 그 날

32년 전 '아웅산 테러' 운명의 그 날

2015.10.08. 오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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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욱, 당시 청와대 공보 비서관

[앵커]
미얀마에서 일어난 아웅산 테러. 오늘로 정확히 32년이 됐습니다. 오늘 당시에 생존자, 현장에 있던 2명밖에 안 되는 생존자 가운데 1명인 청와대 당시 공보비서관, 그리고 그 뒤에 환경부 장관, 국회의원을 지낸 최재욱 전 장관을 저희가 초대했습니다.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요즘 건강은 괜찮으시죠?

[인터뷰]
괜찮습니다.

[앵커]
어떻게 지내십니까?

[인터뷰]
그저 소일을 하고 있죠. 간혹 친구들이나 만나고 그러고 있습니다.

[앵커]
그당시에는 40대 아주 젊은 나이셧죠?

[인터뷰]
그랬었죠. 40대 초중반 그랬습니다. 한창 젊었을 때죠.

[앵커]
그때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재직하고 계셨군요. 그 테러가 일어난 것이 일요일이었었다면서요? 당시 상황을 말씀을 해 주시죠.

[인터뷰]
일요일인데 거기에 국빈이 오면 처음 우리가 현충원 처음 방문하듯이 아웅산이었습니다.

[앵커]
거기에서요? 거기가 당시에는 버마였죠.

[인터뷰]
당시에는 버마죠, 지금은 고쳤지만. 그래서 참배하는데 사건이 일어났죠. 나중에 보니까 북한 사람이 다 한 것인데 그래서 6.25전쟁도 일요일이었거든요. 일요일에 사건이 일어나서 서울을 사나흘 만에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그때 딱 생각난 게 그때도 한글날 공휴일이었습니다. 일요일이면서 공휴일이거든요. 일요일이면서 공휴일에 일을 벌일 때는 뭔가 후속조치가 동원이 되는 것이 아니냐.

[앵커]
쳐들어오거나 그럴 수도 있다?

[인터뷰]
최소한 서해5도든지 동해안을 어떻게 하든지 그건 알 수 없죠. 뭔가 일요일에 했을 때는 더군다나 국가원수를 대상으로 했을 때는 큰일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도 예상을 못했어요.

세상 어떤 사람도 그것도 남북한에 대치가 돼서 싸우는 게 아니라 남의 나라에 가서 남의 나라의 주권을 짓밟고 그런 테러를 한다, 이건 인류역사상 없던 일입니다.

[앵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인터뷰]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인 일인데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 북한이었습니다.

[앵커]
그때 장관님께서는 현장에 미리 가계셨던 것이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묵었던 곳은 가령 신라호텔 영빈관이라고 치면 사건은 청와대 근처에서 기념식을 하는 아웅산 묘소라고 생각을 하고. 중간에 오시기 전에 우리는 비서관들이나 이범석 외무장관 서상철 부총리, 이런 분들은 저쪽 삼각지 정도에서 미리 출발해서 미리 도착해 있었어요.

우리는 아침에 호텔에서 할 일도 없으니까 미리 좀 가자. 그래서 서상철 부총리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서 우리는 미리 기다리고있었어요. 그런데 영빈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주무시던 함병춘 비서실장이나 이런 분이 와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죠. 대통령께서 곧 오십니다 그러면서 미리 오셨다고요.

미리 오셨는데 미리 온 중에 제일 먼저 길 안내를 한 분이 버마 대사거든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버마 지리를 잘 아니까. 버마 대사 차가 제일 앞에서 안내를 했거든요. 양쪽에 태극기 달고 이계철 대사가 안경도 쓰시고 여러모로 우리 전두환 대통령하고 모습이 비슷했어요.

그러니까 중간에 폭탄을 설치해 놓고 이걸 기다리든 사전에 폭발장치를 기다리던 사람이 전 대통령 일행이 가시는 차인 줄 알고 그 시간을 자기들이 맞춰놓은 시간에 누른 거예요. 그래서 이계철 대사가 와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데 일행이 와서 각하께서 곧 도착을 합니다.

정렬하십시다 해서 나도 정렬을 딱 하고 넥타이를 딱 고쳐메는데 쾅 터졌어요. 정확하게 시간을 잰 것이죠.

[앵커]
굉음이 들렸을 것이 아닙니까, 쾅 하고.

[인터뷰]
그런데 저는 굉음을 못 들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고막이 터져 있었어요. 잘 의식을 못했었는데 전 대통령께서도 그렇게 기억을 하시더라고요. 그때 진혼곡이 좀 울렸다고, 기념식 하는 데서. 그래서 그것을 보고 누른 것 아니냐. 그래서 말하자면 제 생각 같아서는 이계철 대사 오는 차를 보고 눌렀다고 생각을 하고.

[앵커]
그때 화면을 보여주시죠.

[인터뷰]
어떤 분들은 진혼곡이 오신 신호다라고 생각을 했다. 이렇게 두 가지 해석이 있죠.

[앵커]
그때 현장 화면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화면만 봐도 어느 정도의 폭발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텐데. 저도 사실 어릴 때 뉴스를 봤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완전히 그냥 초토화가 된 것이지 않습니까?

[인터뷰]
저게 나무지붕인데 나무지붕이 거의 뼈만 앙상하게 남고 다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앵커]
장관님께서는 그때 눈을 떠서 정신을 차려보니까 어떤 상황이던가요?

[인터뷰]
저 밑에 지붕이 있지 않습니까? 그 밑에 땅바닥에 제가 떨어졌어요, 휭 몸이 날아가서. 나중에 보니까 폭음에 날아간 것도 있지만 서까래 있지 않습니까? 서까래가 머리를 때려서 머리가 다 깨지고 빗맞아서 날아간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까 제 머리 위에 10명이 쭉 도열했지 않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나중에 올 때 저쪽이었는데 이쪽, 이쪽, 제가 저쪽에있었는데요. 폭탄이 저기에 하나 실렸고 이쪽에 하나 가설해 놨고 복판에는 소이탄이 있었어요. 저 하고 이기백 합참의장 위에 있는 폭탄이 터졌습니다.

저게 터지면 이쪽도 터지게 되어 있는데 이쪽 선이 끊여져서 소이탄이 연결되어 있는 이 선도 끊어져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소이탄이 터졌으면 여기는 흔적이 없이 완전히 재가 된다고 합니다.

그때 그거 하나만 터졌기 때문에 이기백 합참의장하고 저는 생명을 건진 건데. 마지막에 병원에 갔을 때는 이기욱 재무부 차관까지 살아계셨어요. 신음을 많이 하셨는데. 필리핀 미 육군병원으로 옮겨서 거기에서 숨지신 거죠.

[앵커]
그때 현장 사진에 장관님이 쓰러져 있는 사진도 있던데, 그 사진 가지고 계십니까?

[인터뷰]
이건 저인지 아닌지는...

[앵커]
이 사진에 있는 것이죠? 이것 좀 보여주시죠.

[인터뷰]
이 사진은 제가 부축 받아서 나오는 사진이고요. 피투성이 얼굴이 돼서 나오는 것이고.

[앵커]
지금 그러니까 시청자 여러분들께 설명을 드리자면 이 사람, 부축 받고 나오는 이분이 바로 당시 공보비서관이셨던 최재욱 전 장관이십니다. 그리고 폐허가 된 모습이 보이고요.

[인터뷰]
이분들은 쓰러진 사람들. 제가 볼 때는 이분은 그당시에 연합통신 사진기자가 아닌가 싶고. 전부 다 보시면 다 쓰러져 있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너무 이게 참혹하다고 해서 당시에는 보도되지 못하고 만 1년 지나서 보도됐던 겁니다. 아주 참혹하지 않습니까?

[앵커]
당시 목숨을 잃으신 분들이 아까 말씀을 하신 대로 경제부총리, 서석준 부총리.

[인터뷰]
그리고 이범석 외무부 장관하고 서상철 동자부 장관,, 쭉 장관급들이 계시고 그리고 여러분들 아시는 김재익 경제수석이라든지 차관급들 쭉 하고.

[앵커]
김재익 경제수석이 전두환 대통령의 가정교사 같은 역할을 했던.

[인터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셨죠.

[앵커]
함병춘 비서실장. 심상우 의원이죠.

[인터뷰]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인데. 그 아드님이 코미디언이시고.

[앵커]
심현섭 씨요. 그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그 소식을 어떻게 들은 것인가요?

[인터뷰]
그러니까 전두환 대통령께서도 출발을 하셨는데 마침 안내를 맡은 버마 외무부 장관. 버마 외무부 장관이 자기 승용차가 고장이 나서 한 4분 넘게 늦게 왔어요, 안내하러. 그래서 늦게 출발하셨어요.

[앵커]
그 차가 고장이 나지 않았으면 그 시간에 오셨겠군요.

[인터뷰]
그렇죠. 4분 지각인데요. 그래서 4분 늦게 출발했는데 전두환 대통령께서 묵으신 숙소하고 이쪽 사고난 현장의 거리가 4. 5km입니다. 그런데 장세동 경호실장과 이분들하고 전두환 대통령을 모시고 3km 정도 왔을 때, 그러니까 3분의 2정도 왔을 때 사고가 여기에서 난 거예요.

[앵커]
1km 밖에 떨어지지 않았군요.

[인터뷰]
1. 5km밖에 안 떨어졌죠. 전두환 전 대통령께서 회고하시면 차를 돌리시더래요. 전두환 대통령도 그때는 몰랐죠. 차를 U턴을 하시더래요. 왜 그러냐고 나중에 물으니까 저기에서 사고가 났다고. 차를 돌리셨을 때는 잘 모르셨다고 해요.

[앵커]
그러니까 그당시 버마 외무장관 차가 고장이 나서.

[인터뷰]
고장이 나서 다른 택시를 타고 오는 바람에 4분 지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4분 늦게 출발을 한 거예요. 그래서 4분 늦게 출발하지 않았으면 도착하셨겠죠.

[앵커]
저희가 장관님께서 갖고 계신 당시 신문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장관님께서 경향신문 출신이시죠?

[인터뷰]
경향신문 사장을 했죠. 그당시 전신문, 온국민이... 여기 전부 한문으로 나왔습니다마는 경악의 휴일. 진짜 경악의 휴일이죠. 전국이 침통. 그리고 여기 쭉 나오는데, 사망자 명단도 쭉 나오고요. 부상자 명단에 저도 있습니다마는.

[앵커]
버마 국립묘지 참배 중 사고.

[인터뷰]
서 부총리 등 수행원 15명 순직이라고 되어 있죠. 그때 이기욱 씨는 저쪽 필리핀인가 거기에 가서 사망을 하셨고 그중에 경호원 한 명도 내 옆에서 신음을 하시더라고요. 신음을 하시고 살아계셨는데 내가 어디에 가서 잠깐 수술받고 나오니까 하얀 천이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에는 15명이었는데 2명이 늘어서 더 이렇게 됐죠.

[앵커]
전 대통령 영부인은 무사. 북괴 음모인듯 이렇게 되어 있고. 중상자 명단에 보니까 세 번째로 있군요. 최재욱 대통령 공보비서관.

[인터뷰]
중간에 두 번째는 이기욱 재무차관.

[앵커]
재무차관은 나중에 돌아가셨고.

[인터뷰]
그런데 북의 음모인 듯, 이것은 제일 처음에 사고가 나니까 버마 대통령과 그당시 버마 실권자가 네 윈 장군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두 분이 연쇄적으로 와서 미안합니다 이러면서 버마, 자기들 나라의 정보부장을 교체를 했는데 이 친구들이 장난을 쳐서 이런 것 같다, 자기들 내부 사정으로 돌려요.

내부사정으로 올렸는데 불과 일주일 전에 미문화원 사건이 있었거든요. 그것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북괴의 테러가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그러니까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금방 아시는 것이죠. 버마까지 와서 나를 해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야, 이건 버마 사정이 아니다하면서 딱 얘기를 해요. 이건 우리 대한민국 국민 수십명이 겪은 것이니까 버마 내부 사정이 아니다, 이건 북측으로 단정을 해라. 그러니까 수색도 어떻게 하냐면 내부에서 자기들 나라에 수색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내뺄 때는, 내륙에 없거든요.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바닷가로 해서 배로 갈지 모르니 거기로 수색로를 좁혀라, 이랬거든요. 그래서 금방 잡혔어요.

[앵커]
그래서 나중에 다 잡혔죠, 북한 사람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잡혔고 그래서 옥살을 했고요. 그러면 북한이 그 당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테러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러면 응징을 해야 되겠다, 이걸 그대로 둘 수 있겠느냐, 그런 여론이 당시 있지 않았습니까?

[인터뷰]
많았었죠. 많았는데 그런데 그때 전 대통령께서는 왜 그러면 버마라든지 인도, 스리랑카, 호주 이런 데를 왜 방문을 하셨냐 하면 전에는 아프리카를 방문했습니다, 그 험한 데를. 그리고 그 2년 전에는 올림픽을 유치했습니다.

그러니까 전 대통령께서는 올림픽을 성공시키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우수성을, 남북대화에서 완전히... 그 당시만 해도 남북상태가 어땠냐 하면 UN총회에서 미국측이 우리나라를 지지해서 하면 그것도 가결이 되고. 또 소련이 해서 북한을 도와주면 그것도 가결이 되는. UN외교가 치열했어요.

그래서 UN외교에서도 이기고 올림픽에서 많은 나라를 오게 하겠다, 그게 목적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속으로는 응징을 하고 싶은데 응징을 해서 전쟁을 하면 올림픽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거든요. 올림픽뿐만 아니라 아니었어요.

86년 아시안게임까지있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귀국하실 때부터 담화에 이건 마지막 인내다, 한 번 더 참으시겠다, 이거죠. 그리고 국내 보수단체도 있고 군인들, 후배들, 아주 다 말렸어요. 참아라. 결단할 때는 내가 결단할 테니까 참아라. 너희가 잘못해서 전쟁이 일어나면 올림픽이고 뭐고 어떻게 되느냐. 모든 것은 나한테 맡겨라. 그렇게 무마를 하셔서 견뎌오셨습니다.

[앵커]
장관님께서는 그 뒤에 김대중 대통령 때 자민련 소속으로 환경부 장관을 하셨고 그뒤에 국회의원도 하셨고. 그때 그야말로 정말 구사일생으로 죽을 뻔한 자리에서 살아나셔서 그 뒤에 제2의 인생을 사신 것인데 그 뒤에 어떤 심정으로 사셨습니까?

[인터뷰]
그때는 새로운 덤인생이니까 제 딴에는 최선을 다했고요. 저한테 맡겨진 임무를 하나하나 하는 것은 내가 제 생의 기쁨이라기보다 제 생의 보답이다, 나라를 위한.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봅니다.

[앵커]
32년 전의 일입니다마는 오늘 시사하는 바도 여전히 크다고 생각을 하고요. 들으면서 우리가 지금 남북관계, 또 복잡한 동북아 정세 속에서 이것을 어떻게 교훈으로 삼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던 것 같습니다. 최재욱 전 환경부 장관께 들었습니다.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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