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국가장' 예정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국가장' 예정

2015.11.22. 오후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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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우, YTN 보도국 부국장

[앵커]
이동우 YTN 보도국 부국장과 함께 고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 새벽에 향년 88세로 영면했습니다. 우리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던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인물로 평가할 수가 있을까요?

[인터뷰]
김영삼 전 대통령만큼 역대 대통령 중에 공과 과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분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우선 한국사회 민주화와 문민화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고요. 그렇지만 IMF로 저평가된 대통령이다, 이런 얘기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공을 보게 되면 금융실명제 도입이라든지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든지 그리고 지방자치제도 부활한 것, 이런 정치, 경제, 사회에 큰 변화를 이끈 분이죠. 이에 반해서 정권 마지막에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세계적으로 망신을 사는 그런 일이 있었고요.

또 정권 마지막에 친인척이라든지 측근비리가 터져서 레임덕 현상을 아주 심각하게 겪기도 했었죠. 그렇지만 어쨌든 IMF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경제라든지 사회 부문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그런 효과도 있었다, 이렇게 보는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

[앵커]
공과 과가 확실한 그런 대통령이라고 말씀을 해 주셨는데 일단은 대통령의 그런 업적과 과를 뒤로 하고 서거를 했기 때문에 장례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항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국가장이라는 것으로 치러지게 되는데요. 국가장이라는 것은 어떤 절차일까요?

[앵커]
이것도 좀 생소한데요.

[인터뷰]
국가장이라는 게 국장과 국민장을 합쳐서 국가장으로 통일을 한 것인데요. 이번에 국가장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 처음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 장을...

[앵커]
이전에는 그게 국장, 이렇게 했던 것이죠?

[인터뷰]
국장이 상위 개념이고 그 밑에 국민장 개념이 있었는데 2개의 장례 절차를 합쳐서 통합한 것입니다. 우선 조금 전에 이종구 기자나 기자들이 전한 것처럼 5일장으로 정해졌고요. 26일 영결식이 열리게 되는데요. 오후 2시에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게 되는데 현재는 장군제3묘역 우측 능선에 묘역이 마련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요. 정확히 이것은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국가장을 치르는 동안에는 국회에는 조기를 달고요. 전국 각지에 분향소도 설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회의사당 앞에 가장 큰 분향소가 설치될 예정이고요. 이번에 분향소가 설치될 뿐만 아니라 재외공관에도 분향소가 설치가 돼서 재외 우리 동포들도 분향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가 되어 있습니다.

[앵커]
목요일 오후 2시에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이 거행될 예정이죠. 여야 정치권도 일제히 김 전 대통령 서거에 애도를 표하고 있는데요. 최근까지도 정치적인 무게감이 있다고 봐야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표적인 상도동계의 대부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상도동계가 현재 집권당인 새누리당에 김무성 대표가 있고요. 그리고 넘버2라고 할 수 있는 서청원 최고위원도 상도동계죠. 그러니까 지금 새누리당의 핵심 실세라인들을 다 상도동계가 잡고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요.

특히 김무성 대표 같은 경우는 오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가서 본인이 상주를 하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본인에게는 정치적 아버지다라고까지 선언하면서 김현철 차남하고 같이 나란히 서서 지금 상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외에도 새누리당에는 정병국 의원이 있고요. 이상일 의원, 친박계 의원이죠. 이분들 같은 경우는 대표적인 상도동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박진 전 의원 같은 경우도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에서 근무를 했었고요.

[앵커]
처음에 통역을 맡아서 일을 했었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의전비서관 역할을 했었죠. 그 이후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시킨 정치적 거물들이 너무 많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든지 이명박 전 대통령 그리고 지금 정의화 국회의장이라든지 15대 때 유명한 인사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피에트로 검사로 알려진 홍준표 경남지사죠. 창원시장을 하고 있는 안상수 전 대표, 이분 같은 경우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담당검사로 이름을 알렸던 분인데요.

이외에도 김문수 전 경기지사라든가 이재오 의원, 이런 민중당 출신 의원들도 여러 명 영입을 해서 15대 때 대부분 정치에 입문을 시킨 그런. 현재 정치의 대부분의 정치인을 입문시킨 그런 장본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앵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상주 역할을 자청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입니다. 정치적 아버지를 잃은 잠겼다라는 표현도 썼는데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 어떤 인연이 있을까요?

[인터뷰]
김무성 대표가 상도동계의 막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겠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 민정비서관을 했었고요. 사정1비서관을 했었고 그당시에 내무차관을 거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많은 인물들이 국회에 진출한 15대 때 처음으로 총선에서 당선이 됩니다. 그래서 정계에 입문을 하게 됐고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지금 그림에도 나옵니다마는 YS는 나의 정치적 아버지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일종의 멘토로 지금까지 쭉 삼아왔던 그런 분이 김무성 대표라고 할 수 있고요.

아까 화면에서 나왔었지만 김무성 대표가 오늘 상가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상당히 비통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김무성 대표가 어떤지...

[앵커]
조문하는 화면이 나오고 있군요.

[인터뷰]
지금 화면이 나오고 있죠. 정치적으로 결정을 해야 될 사안이라든지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꼭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여쭤보고 결정을 했다는 그런 후문이 있습니다.

[앵커]
화면을 잠깐 계속해서 보시면 지금 김무성 대표 같은 경우에 얼마 전 2005년에 만들어진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사단법인의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계속해서 그런 역할을 해왔던 것이고.

[인터뷰]
2012년에 그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당시 김무성 대표는 친박계였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박근혜 당시 후보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그당시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명박 당시 후보를 지원을 했죠.

그래서 이명박 후보가 결국 결선에서 승리하고 대권까지 거머쥐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지난 2012년 대선 과정에서는 YS는 박근혜 후보를 지원을 했죠. 반대로 차남인 김현철 씨는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는, 그런 부자간에 정치적으로 행보를 달리하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도 대단한 정치 역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전체적으로 9선을 했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9선 기록이 지금 최다선 기록이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최다선인데 김종필 전 총리가 있고요.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9선을 했습니다. 우선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54년에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만 26세로 최연소로 당선이 됐고요.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1967년에 신민당 원내총무를 했었고요. 70년에 아시다시피 신민당 대선 후보를 놓고 김대중 대통령과 치열하게 경합을 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한테 역전패를 당하죠. 그리고 72년에 가택연금을 당했었고 79년에는 의원직 제명을 당합니다.

97년에 의원직 제명을 당한 것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경고하는, 이런 식으로 하면 정권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경고한 것에 대해서 보복차원에서 의원직 제명을 당한 거고요. 그리고 80년에 신군부에 의해서 3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고 이때 단식투쟁을 합니다.

23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었고요. 90년에 아시다시피 3당 합당을 하게 되죠. 그래서 사실 호남을 포위하는 그런 전략을 통해서 92년에 마침내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겠다고 했는데 실제 92년에 대통령이 됐고.

[앵커]
민주자유당에 합류를 한 것이죠?

[인터뷰]
민정당과 그당시에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통일민주당, 이렇게 3당이 합당을 해서 대통령에 당선이 됐고 98년에 IMF 외환위기를 맞고 레임덕을 거친 뒤에 결국 지금까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하다가 오늘 새벽 결국 서거하신 거죠.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이 지금 다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건 의원직에서 제명됐을 때 발언이거든요. 그때 배경을 설명해 주실까요.

[인터뷰]
그당시에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팔레비 이란 국왕 왕정이 무너집니다. 민주항쟁으로 인해서 그게 무너지는데. 박정희 정권도 이런 식으로 민중을 무시하다 보면 결국 정권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경고를 했던 것이죠.

그에 대해서 정권 차원에서 그당시 공화당에서 159명의 의원이 찬성을 해서 결국 의원직 제명을 당하고 그 의원직 제명 당한 것에 대해서 성명서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서 이후에도 회자되고 있는 거고요.

이외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했던 어록 중에 우째 이런 일이, 이런 게 있습니다. 우째 이런 일은 최형우 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의 아들 입시 부정 관련 기사가 나옵니다. 그때 우째 이런 일이, 이런 말씀을 하셔서 지금도 많이 알려진 얘기고요.

이 외에도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뒤에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 이어지자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버리겠다, 이런 식으로 상당히 외교적으로는 강경한, 직설적인 그런 멘트를 해서 한일관계가 냉각되고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앵커]
요즘 젊은 친구들 스타일로 말하면 굉장히 돌직구 스타일세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아주 직설적이고... 그리고 그 외에도 김현철 씨 한보사태 비리 나왔을 때,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의 허물이 아버지의 허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게 2003년에 최병렬 당시 대표가 단식농성을 하는데 나도 단식을 해봤지만 굶으면 죽은 것은 확실하다, 이런 말씀을 하셔가지고 상당히 재미있는 어록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앵커]
그중에서 가장 또 대표적인 게 대도무문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붓글씨로도 많이 쓰셨던 것 같고.

[앵커]
제 기억으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직접 써서 줬던 걸로...

[앵커]
청와대에서 주는 기념시계에도 대도무문이 쓰여있었던 것 같은데.

[인터뷰]
저는 그 당시에 청와대를 출입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마는. 대도무문과 나의 미래 꿈은 대통령, 본인 책상 위에 올려놨다고 해서 그것도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일화라고 할 수가 있죠.

[앵커]
80년대의 겨울 같은 그런 시절을 보내고 수십 년의 어려운 시절을 거쳐서 93년부터 98년까지 14대 대통령에 오르지 않습니까? 대통령 기간 동안 공과 과를 평가를 한다고 하면 앞서도 조금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가장 큰 공은 역시 하나회 척결이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하나회 척결을 통해서 군부 쿠데타가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것이죠. 그래서 이런 얘기도 하셨습니다.

[앵커]
그 이전까지는 본인이 오랫동안 정치인으로 일을 했던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언제든지 군부가 쿠테타를 일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하나회 척결이 없었다면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하나회 척결이라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군부 쿠데타의 싹을 자르는 그런 상징적인 조치였다, 이렇게 평가를 할 수가 있겠고요.

그 외에도 금융실명제라든지 그다음에 부동산실명제, 그리고 공직자재산 공개, 본인이 직접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공직자들의 재산을 공개하는 그런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죠. 그로 인해서 그당시에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이라든지 김덕주 대법원장이라든지 재산공개를 할 때 많은 공직자들이 결국 옷을 벗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몰린 것이죠.

그리고 또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서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을 전격 구속시켰고요. 이런 것은 한국사회를 뒤흔든 변화와 개혁이라고 볼 수 있었고. 반면에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한보사태 등 여러 가지 비리가 터지면서 결국 이것에 대한 대처를 제대로 못하면서 도산하면서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그런 위기를 겪으면서 결국 대통령 지지도가 초반에는 90%까지 올랐었거든요.

막판에는 10% 이하로까지 떨어지고 급전직하하는 그런 상황을 맞았었고요. 다만 마지막에는 그뿐만 아니라 김현철 씨나 홍인길 총무수석이라든가 장한길 청와대 수석 비리 사건이라든지 이런 친인척 비리 때문에 많은 곤혹을 치르기도 하고 그랬었죠.

[앵커]
임기 말에 이런 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당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실 많은 역할을 했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인제 후보가 출마하는데 어떻게 보면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준 측면도 있고요.

뿐만 아니라 그당시에 김대중 비자사건이 터져서 검찰에서 수사를 할지 말지 고민했었는데 수사 중단 지시를 내리죠. 그당시 김태정 검찰총장 시절인데. 그래서 이 수사를 할 경우에 국가가 너무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그 수사를 중단시킴으로 인해서 어떻게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 그런 측면도 있고요.

어쨌든 그와 관계 없이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 중에 어떻게 보면 업적으로는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그런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다. 아까 말씀을 드렸듯이 저평가된 대통령이라는 얘기가 요즘 들어서 특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앵커]
김대중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양김시대. 우리 한국정치사에 뗄래야 뗄 수 없는 두 분, 한때는 동지였고 어떻게 보면 영원한 친구이자 동지이자 그러면서도 끝없는 그런 경쟁자 관계였던 것 같아요. 어떻게 평가하실 수 있을까요?

[앵커]
6년의 시차를 두고 서거를 한 것이죠? 큰 정치 지도자를 잃었는데, 우리 정치사에는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인터뷰]
두 분은 영원한 정치적 라이벌이었었죠.

[앵커]
민주화를 향해서는 동지이기도 했고요.

[인터뷰]
동지이자 경쟁자였고요. 2009년 8월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에 그당시 의식이 없을 때였는데 병문안을 가서 거기에서 이제 우리는 화해를 했다, 이렇게 선언을 했고요. 거기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가장 오랜 경쟁관계였고 협력관계였다. 그리고 세계사에 유례 없는 특수관계다, 이렇게 본인이 그 부분을 확실하게 정리하기도 하고 했었는데요. 결국 양김 두 분이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한국 정치사가 한단계 어떻게 보면 나아가는, 그런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현재의 정치구도에서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두 정치세력이 상당 부분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보면 그 시제를 넘어서서 한 단계 진전되는 그런 과정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양김시대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이렇게 평가를 할 수가 있겠고요. 어떻게 보면.

[앵커]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닐 것이고 지금의 정치인들이 그런 과제를 안게 됐다, 이렇게 봐야 되겠죠?

[인터뷰]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나가고 그래야 하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새시대의 장자가 되고 싶었는데 결국 정치를 하다 보니 구시대의 막내 역할밖에 못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듯이 어느 정치인이든 새로운 정치인이 새시대의 장자역할을 하는 그런 정치인들이 많이 나와야겠죠.

[앵커]
박근혜 대통령 해외순방 중에 애도를 표했고요. 내일은 귀국하자마자 바로 조문을 하기로 했다는 속보를 전해드렸었는데 박근혜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떤 관계라고 봐야 되는 것입니까?

[인터뷰]
어떻게 보면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죠. 아까 말씀을 드렸듯이 어쨌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앙숙이지 않았습니까? 단식투쟁도 하고 아까 말씀을 드렸듯이 의원직 제명도 당하고 그런 관계였습니다마는 어쨌든 2012년 대선 과정에서는 박근혜 당시 후보를 지원을 했고요.

물론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를 지원하기는 했습니다마는. 그 이후에는 상당 부분, 2012년 이후는 상당 부분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은 상당 부분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내일 대통령이 귀국을 하시면 바로 조문을 하면서 상당히 애도를 표할 것으로 보입니다.

[앵커]
만감이 교차할 수 있겠군요. 이동우 정치담당 부국장이었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앵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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