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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근 / 데일리안 편집국장, 한옥정 / 前 북한 예술 선전대 가수, 림 일 / 탈북 작가, 최단비 / 변호사
[앵커]
이달 초 북한의 해외식당 종업원 13명이 집단 탈북해 우리나라로 입국했죠.이후 나머지 종업원들은북한으로 송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는데요그런데 미국 CNN이 북한으로 송환된 종업원그러니까 집단 탈출한 종업원들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평양에서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무슨 말을 했을까요. 잠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터뷰 : (지배인이) 조국에서 새로운 지시가 있어서 동남아시아로 식당을 옮겨가야 된다. 그러니 모든 동무들이 그동안 준비하고 있다가 그 다음에 준비하고 있다가 자기가 지시 주는 날에 다같이 움직여서 (가자고 속였습니다.)]
[앵커]
이들은 탈북한 동료들이 모두 속아서 남한에 넘어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함께 귀순하려다 결국 실패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요. 진실은 뭘까요. 계속해서 이야기 나눠봅니다.
[앵커]
지금 이 자리에는 탈북작가시죠, 림일 작가. 그리고 한옥정 전 북한미사일 선전대 가수 나와계시고요. 이종근 국장님, 최단비 변호사님 두 분 함께 하시죠. 지금 인터뷰 보셨죠? 류주현 앵커가 소개해 드렸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이거? 특히 우리 림 작가님은 해외로 계셨죠, 노동자로. 이런 것을 보시면 대충 짐작은 가실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인터뷰]
평양에 남겨졌다고 보는 7명들의 접대원들은 끌려갔지만요. 대단히 운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결단을 해서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그게 13명입니다.
그분들이 제가 보니까 입었던 옷, 신발, 메이커 보니까 완전히 남한 사람 찜쪄먹게끔 되어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중국으로 나와서 체류하면서 군부기관의... 자기 운명을 바꿨죠, 대한민국으로 들어와서. 어리버리하다가 7명은 그냥 당국의 그냥 소환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고려호텔에서 시인 안 하고 기자회견했는데 당연히 저 사람들은 저기에서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자기 아쉽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못한다는 거죠. 당 앞에서 얘기하는 거니까... 그래서 엉뚱하게 끌려갔다, 납치했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앵커]
지배인이 그렇게 주동을 했다고 보세요?
[인터뷰]
저는 그렇게 했다고 봅니다.
[앵커]
그런데 북한이 필요하면 가족들 서울을 보내겠다, 우리가 보내라, 그러면 진짜 보낼까요?
[인터뷰]
사실 그것은, 그 정도로 우리가 납치한 것이,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납치해 간 것이지 쟤네들은 정말로 자발적으로 간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죠. 저는 생각을 했던 게 13명이 한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게 정말 충격이었어요. 탈북자 입장에서는 혈명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친적들도 아니잖아요.
우리 대한민국에 온 탈북자들 중에는 가족끼리 많이 온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가족이라는 거죠. 정말 모르는 남남끼리 13명이 같이 탈북을 했다는 것은 정말 저희 탈북자들이 듣기에도 보기에도 진짜 충격이다라고 할 정도로. 왜냐하면 해외에 근무하는 애들은 정말 출신 성분부터 다 따져서 나온 아이들이거든요.
[인터뷰]
오늘 북한이 가족이 필요하다면 가족을 서울로 보내겠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 뉴스를 접하고 이것은 우리가 북한을 배울 것도 좀 있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과거를 봅시다. 납북자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납북됐다고 온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뭡니까. 북한은 시종일관 납북자 없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가령 납북자 가족을 평양에 보내겠으니 받겠냐고 그러면 이 사람들은 노코멘트입니다, 납북자가 없다고 하니까. 이번에 왜 저것을 배우고 싶었냐 하면, 개인적으로요. 이번에 13명이 왔다는 이야기를 안 했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북한이 이렇게 나오겠지, 오늘. 13명 있지 않느냐? 우리는 끝까지 없다, 무슨 소리냐. 그런 일이 없다. 똑같이 한번 좀 해 봤으면...
[앵커]
과거 림 작가님이 쿠웨이트에 계실 때 누가 감시를 했죠?
[인터뷰]
북한 주민들은 쿠웨이트가 아니고 평양에 있어도 서로 감시.
[앵커]
그런데 쿠웨이트에서 누가 감시를 했습니까?
[인터뷰]
저희는 지배인도 있고 당비서는 안 들어왔는데 작업반마다 알게 모르게 있어요. 그것은 누가 감시자라고.
[앵커]
누군지는 모르는데?
[인터뷰]
모르죠. 그것은 비밀리에 임무를 주고 감시하라고 준 사람은 있어요.
[앵커]
그러니까 13명이 한꺼번에 나왔다는 게 이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배신을 하거나 보고를 하면 끝났을 것 아니에요.
[인터뷰]
북한은 해외로 나오면 엄호감시체제가 상호감시체제로 바뀌잖아요. 3명이 1명 중에 누가 간첩일지 모를 정도로 그게 극비리가 돼서 넘어올 수가 있다는 것. 한 명의 변절자도 없었다는 게 신기하죠.
[인터뷰]
저희가 봐야 할 것이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겁니다. 이 7명을 통해서 선전전을 벌이는 것이. 사실은 굉장히 쉬운, 그러니까 지금 거의 일주일을 넘긴, 8일이나 9일 정도에 걸렸거든요. 이들이 그만큼 말을 맞추고 해야 되는 상황들이 굉장히 길었다는 뜻으로 보여지고요.
아니라면 당장 며칠 후에라도 이들을 통해서 선전전을 벌였을 수도 있었는데도 거의 10일 가까운 시간 동안을 이들을 통해서 입을 맞춰야 되는 상황들이 굉장히 많았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앵커]
그렇죠. 시간상으로 봤을 때. 그런데 어쨌든 요새 북한이 굉장히 여러 가지로 당황하고 있는 일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김일성 생일이죠, 태양절 때. 이게 외국인 공연당을 불렀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한동안 안 불렀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요새 다시 불렀다. 아무래도 탈북 가수시니까 외국인 공연단 북한에서 본 적 있습니까?
[인터뷰]
저희는 평양에 사는 사람들만 그 공연을 관람을 하고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TV를 통해서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4월이라고 하면 우리 4월 봄 친선예술축전 나오고 사실은 북한에서 외국인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보니까 하여튼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노라면 미국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정말 미국이나 이런 외국을 상징할 수 있는 사람.
[앵커]
우리나라도 그랬어요.
[인터뷰]
그렇죠. 그런 것처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머릿결이 다른 사람들이 나와서 정말 그때 감동을 받았었어요, 저희는 북한에 있을 때. 저 사람들이 북한의 조선말을 할 줄도 모르는 저 사람들이 어버이 수령님, 장군님 하면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
[앵커]
우리나라 말로?
[인터뷰]
그런데 그거 하면 가산점을 주거든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사실 그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까 그냥 일반, 외국인 그런 사람들이 가서 공연을 하는데 북한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돈들을 투자를 해서 소비를 해서 오는 거죠.
[앵커]
평양에 사셨잖아요, 림 작가님. 4월이면 2월 16일이죠? 김정일 생일이. 김일성 생일은 4월 15일이고. 그럴 때마다 외국인들 오는 것 보시고 그러셨겠네요?
[인터뷰]
보는 것 정도가 아니라 공연, 평양 시내에 각 극장들에 배당돼서 공연을 하는데 거기에 방청객으로 가는 거죠.
[앵커]
그런데 그게 의무참석자라면서요?
[인터뷰]
그것은 당연히 당 조직에서 임원을 보냅니다. 거기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정치 행사기 때문에 참가해야 됩니다. 그 행사가...
[앵커]
공연 보는 게 정치행사다?
[인터뷰]
그럼요. 정치행사죠, 북한에서는. 그 공연이 북한에서 가장 긴, 전통적인 국제 공연이에요. 그러니까 김일성의 70회 생일부터, 82년부터 시작했는데 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죽었으니까 이제는 안 하겠네, 살았을 때 칭송하는 노래였으니까. 그런데 죽었어도 계속해 왔다는 거죠. 그리고 2008년 경부터는 그게 북한 당국의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여러 가지로 축소하고 또 아니면 북한 군내의 음악축제와 엇바꿔서 하다가 김정은 시대 들어와서 다시 다시 초창기만큼 부활시켜서 더 웃기는 것은 김정은 시대에 와서 4월 달에 달라지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 기념관. 꽃 박람회처럼 좋은 온실을 마련했어요, 평양에.
그리고 김정일 시대 때는 김일성 75회, 80회 소위 이렇게 꺾어지는 해에 축포를 쏘고 그랬는데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는 해마다 불꽃놀이를 한다는 거죠. 이게 달라졌다는 겁니다. 김정은 시대에 와서 더 할아버지 우상화가 더 심각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거죠.
[앵커]
그런데 어쨌든 이거 지금 우리 화면에서 박수치던 사람들 우리는 물론 구경간 사람이다, 물론 돈 내고 구경갔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동원됐다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인터뷰]
의상을 꼭 맞춰 입고 가야 됩니다. 여자들 같은 경우에는 한복을 입는다거나 무조건 김일성, 김정은 배지를 달고 그런 식으로 여기처럼 청바지 입고 들어갈 수가 없는 거죠.
[인터뷰]
두 분은 거기에서 살고 오셨지만 어쨌든 제가 듣기에도 80년도부터 시작을 해서 이게 순기능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외국 문물을 보는 것은 이게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이것을 보고 아 외국이 이렇구나 하는 어떤 문화를 접하는 유일한 통로다, 이런 순기능도 있었다고.
[앵커]
그런데 아무리 외국문화를 어떻게 보여주려고 해도 이게 건물이 무너지면 참 그런데. 지난 10일에 평양에서 건물 붕괴 사고가 나서 수백명이 매몰되었다. 사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거든요. 일본에서 지진나서 지금 40 몇 명이죠? 돌아가신 그 사건. 얼마나 전세계적으로 크게 얘기를 합니까? 그런데 어떻게 만일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수백명이 매몰되었는데도 사실상 그게 잘 알려지지 않는 현실이 저는 더 큰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세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고 보십니까?
[인터뷰]
폐쇄국가 북한이라서 가능하고 북한에서는 그것은 뉴스거리도 아닙니다,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감추기 십상이거든요. 제가 96년까지 평양에 있었는데 93년도에 통일거리 건설하면서 25층짜리 아파트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650명이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와서 이런 것을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까 러시아 무슨 통신에서 나온 기사 한 박스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한에서는 이런 것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평양에 있을 때 600명의 참사를 눈으로 보고 나왔는데도 이런 것은 비일비재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저렇게 맨손으로 철거하다가 수백명이 매몰된 것은 여명거리에서 있었습니다. 여명거리는 과거에 한 70년대까지, 그때는 깨나 좋은 거리였는데 이제는 40년 됐으니까 노후화가 됐고 또 김일성이 시내에서 궁전 들어가는 메인 도로예요. 그 주변을 김정은이 아주 야심차게 거기다가 건설을 하라고 하고 그것도 기간까지.
[앵커]
건설을 하려고 부수다가 무너진 거죠?
[인터뷰]
네. 기한을 찍어준 게 문제죠. 올해 10월 10일까지 완공하라니까 이게 날림공사 저렇게 사고공사가 되죠.
[인터뷰]
제가 있을 때는 사촌오빠도 갱도건설을 하다가 갱도가 무너져서 북한에서는 갱도 무너져서 군인들이 사고났다고 그러면 사람부터 구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구할까요? 총알 먼저 찾습니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장군님한테, 수령님한테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까 그냥 다 매몰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체도 못 찾았는데 우리 아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 보니까 그냥 지나가다가 못을 밟았는데 파상풍이 걸려 죽었다고 하면 그러면 끝이에요, 북한은. 더 알려고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처음 왔을 때 이런 뉴스들이 다 나오잖아요. 찔렀다, 불렀다, 무너졌다고 다 나오는 게 그게 더 이상해 보였어요, 저희 입장에서는.
[앵커]
그런데 이게 인명 피해는 어느 나라에서는 가슴이 아픈 일인데 정말 씁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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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이달 초 북한의 해외식당 종업원 13명이 집단 탈북해 우리나라로 입국했죠.이후 나머지 종업원들은북한으로 송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는데요그런데 미국 CNN이 북한으로 송환된 종업원그러니까 집단 탈출한 종업원들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평양에서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무슨 말을 했을까요. 잠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터뷰 : (지배인이) 조국에서 새로운 지시가 있어서 동남아시아로 식당을 옮겨가야 된다. 그러니 모든 동무들이 그동안 준비하고 있다가 그 다음에 준비하고 있다가 자기가 지시 주는 날에 다같이 움직여서 (가자고 속였습니다.)]
[앵커]
이들은 탈북한 동료들이 모두 속아서 남한에 넘어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함께 귀순하려다 결국 실패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요. 진실은 뭘까요. 계속해서 이야기 나눠봅니다.
[앵커]
지금 이 자리에는 탈북작가시죠, 림일 작가. 그리고 한옥정 전 북한미사일 선전대 가수 나와계시고요. 이종근 국장님, 최단비 변호사님 두 분 함께 하시죠. 지금 인터뷰 보셨죠? 류주현 앵커가 소개해 드렸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이거? 특히 우리 림 작가님은 해외로 계셨죠, 노동자로. 이런 것을 보시면 대충 짐작은 가실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인터뷰]
평양에 남겨졌다고 보는 7명들의 접대원들은 끌려갔지만요. 대단히 운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결단을 해서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그게 13명입니다.
그분들이 제가 보니까 입었던 옷, 신발, 메이커 보니까 완전히 남한 사람 찜쪄먹게끔 되어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중국으로 나와서 체류하면서 군부기관의... 자기 운명을 바꿨죠, 대한민국으로 들어와서. 어리버리하다가 7명은 그냥 당국의 그냥 소환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고려호텔에서 시인 안 하고 기자회견했는데 당연히 저 사람들은 저기에서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자기 아쉽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못한다는 거죠. 당 앞에서 얘기하는 거니까... 그래서 엉뚱하게 끌려갔다, 납치했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앵커]
지배인이 그렇게 주동을 했다고 보세요?
[인터뷰]
저는 그렇게 했다고 봅니다.
[앵커]
그런데 북한이 필요하면 가족들 서울을 보내겠다, 우리가 보내라, 그러면 진짜 보낼까요?
[인터뷰]
사실 그것은, 그 정도로 우리가 납치한 것이,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납치해 간 것이지 쟤네들은 정말로 자발적으로 간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죠. 저는 생각을 했던 게 13명이 한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게 정말 충격이었어요. 탈북자 입장에서는 혈명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친적들도 아니잖아요.
우리 대한민국에 온 탈북자들 중에는 가족끼리 많이 온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가족이라는 거죠. 정말 모르는 남남끼리 13명이 같이 탈북을 했다는 것은 정말 저희 탈북자들이 듣기에도 보기에도 진짜 충격이다라고 할 정도로. 왜냐하면 해외에 근무하는 애들은 정말 출신 성분부터 다 따져서 나온 아이들이거든요.
[인터뷰]
오늘 북한이 가족이 필요하다면 가족을 서울로 보내겠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 뉴스를 접하고 이것은 우리가 북한을 배울 것도 좀 있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과거를 봅시다. 납북자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납북됐다고 온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뭡니까. 북한은 시종일관 납북자 없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가령 납북자 가족을 평양에 보내겠으니 받겠냐고 그러면 이 사람들은 노코멘트입니다, 납북자가 없다고 하니까. 이번에 왜 저것을 배우고 싶었냐 하면, 개인적으로요. 이번에 13명이 왔다는 이야기를 안 했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북한이 이렇게 나오겠지, 오늘. 13명 있지 않느냐? 우리는 끝까지 없다, 무슨 소리냐. 그런 일이 없다. 똑같이 한번 좀 해 봤으면...
[앵커]
과거 림 작가님이 쿠웨이트에 계실 때 누가 감시를 했죠?
[인터뷰]
북한 주민들은 쿠웨이트가 아니고 평양에 있어도 서로 감시.
[앵커]
그런데 쿠웨이트에서 누가 감시를 했습니까?
[인터뷰]
저희는 지배인도 있고 당비서는 안 들어왔는데 작업반마다 알게 모르게 있어요. 그것은 누가 감시자라고.
[앵커]
누군지는 모르는데?
[인터뷰]
모르죠. 그것은 비밀리에 임무를 주고 감시하라고 준 사람은 있어요.
[앵커]
그러니까 13명이 한꺼번에 나왔다는 게 이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배신을 하거나 보고를 하면 끝났을 것 아니에요.
[인터뷰]
북한은 해외로 나오면 엄호감시체제가 상호감시체제로 바뀌잖아요. 3명이 1명 중에 누가 간첩일지 모를 정도로 그게 극비리가 돼서 넘어올 수가 있다는 것. 한 명의 변절자도 없었다는 게 신기하죠.
[인터뷰]
저희가 봐야 할 것이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겁니다. 이 7명을 통해서 선전전을 벌이는 것이. 사실은 굉장히 쉬운, 그러니까 지금 거의 일주일을 넘긴, 8일이나 9일 정도에 걸렸거든요. 이들이 그만큼 말을 맞추고 해야 되는 상황들이 굉장히 길었다는 뜻으로 보여지고요.
아니라면 당장 며칠 후에라도 이들을 통해서 선전전을 벌였을 수도 있었는데도 거의 10일 가까운 시간 동안을 이들을 통해서 입을 맞춰야 되는 상황들이 굉장히 많았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앵커]
그렇죠. 시간상으로 봤을 때. 그런데 어쨌든 요새 북한이 굉장히 여러 가지로 당황하고 있는 일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김일성 생일이죠, 태양절 때. 이게 외국인 공연당을 불렀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한동안 안 불렀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요새 다시 불렀다. 아무래도 탈북 가수시니까 외국인 공연단 북한에서 본 적 있습니까?
[인터뷰]
저희는 평양에 사는 사람들만 그 공연을 관람을 하고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TV를 통해서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4월이라고 하면 우리 4월 봄 친선예술축전 나오고 사실은 북한에서 외국인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보니까 하여튼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노라면 미국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정말 미국이나 이런 외국을 상징할 수 있는 사람.
[앵커]
우리나라도 그랬어요.
[인터뷰]
그렇죠. 그런 것처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머릿결이 다른 사람들이 나와서 정말 그때 감동을 받았었어요, 저희는 북한에 있을 때. 저 사람들이 북한의 조선말을 할 줄도 모르는 저 사람들이 어버이 수령님, 장군님 하면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
[앵커]
우리나라 말로?
[인터뷰]
그런데 그거 하면 가산점을 주거든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사실 그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까 그냥 일반, 외국인 그런 사람들이 가서 공연을 하는데 북한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돈들을 투자를 해서 소비를 해서 오는 거죠.
[앵커]
평양에 사셨잖아요, 림 작가님. 4월이면 2월 16일이죠? 김정일 생일이. 김일성 생일은 4월 15일이고. 그럴 때마다 외국인들 오는 것 보시고 그러셨겠네요?
[인터뷰]
보는 것 정도가 아니라 공연, 평양 시내에 각 극장들에 배당돼서 공연을 하는데 거기에 방청객으로 가는 거죠.
[앵커]
그런데 그게 의무참석자라면서요?
[인터뷰]
그것은 당연히 당 조직에서 임원을 보냅니다. 거기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정치 행사기 때문에 참가해야 됩니다. 그 행사가...
[앵커]
공연 보는 게 정치행사다?
[인터뷰]
그럼요. 정치행사죠, 북한에서는. 그 공연이 북한에서 가장 긴, 전통적인 국제 공연이에요. 그러니까 김일성의 70회 생일부터, 82년부터 시작했는데 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죽었으니까 이제는 안 하겠네, 살았을 때 칭송하는 노래였으니까. 그런데 죽었어도 계속해 왔다는 거죠. 그리고 2008년 경부터는 그게 북한 당국의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여러 가지로 축소하고 또 아니면 북한 군내의 음악축제와 엇바꿔서 하다가 김정은 시대 들어와서 다시 다시 초창기만큼 부활시켜서 더 웃기는 것은 김정은 시대에 와서 4월 달에 달라지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 기념관. 꽃 박람회처럼 좋은 온실을 마련했어요, 평양에.
그리고 김정일 시대 때는 김일성 75회, 80회 소위 이렇게 꺾어지는 해에 축포를 쏘고 그랬는데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는 해마다 불꽃놀이를 한다는 거죠. 이게 달라졌다는 겁니다. 김정은 시대에 와서 더 할아버지 우상화가 더 심각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거죠.
[앵커]
그런데 어쨌든 이거 지금 우리 화면에서 박수치던 사람들 우리는 물론 구경간 사람이다, 물론 돈 내고 구경갔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동원됐다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인터뷰]
의상을 꼭 맞춰 입고 가야 됩니다. 여자들 같은 경우에는 한복을 입는다거나 무조건 김일성, 김정은 배지를 달고 그런 식으로 여기처럼 청바지 입고 들어갈 수가 없는 거죠.
[인터뷰]
두 분은 거기에서 살고 오셨지만 어쨌든 제가 듣기에도 80년도부터 시작을 해서 이게 순기능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외국 문물을 보는 것은 이게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이것을 보고 아 외국이 이렇구나 하는 어떤 문화를 접하는 유일한 통로다, 이런 순기능도 있었다고.
[앵커]
그런데 아무리 외국문화를 어떻게 보여주려고 해도 이게 건물이 무너지면 참 그런데. 지난 10일에 평양에서 건물 붕괴 사고가 나서 수백명이 매몰되었다. 사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거든요. 일본에서 지진나서 지금 40 몇 명이죠? 돌아가신 그 사건. 얼마나 전세계적으로 크게 얘기를 합니까? 그런데 어떻게 만일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수백명이 매몰되었는데도 사실상 그게 잘 알려지지 않는 현실이 저는 더 큰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세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고 보십니까?
[인터뷰]
폐쇄국가 북한이라서 가능하고 북한에서는 그것은 뉴스거리도 아닙니다,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감추기 십상이거든요. 제가 96년까지 평양에 있었는데 93년도에 통일거리 건설하면서 25층짜리 아파트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650명이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와서 이런 것을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까 러시아 무슨 통신에서 나온 기사 한 박스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한에서는 이런 것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평양에 있을 때 600명의 참사를 눈으로 보고 나왔는데도 이런 것은 비일비재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저렇게 맨손으로 철거하다가 수백명이 매몰된 것은 여명거리에서 있었습니다. 여명거리는 과거에 한 70년대까지, 그때는 깨나 좋은 거리였는데 이제는 40년 됐으니까 노후화가 됐고 또 김일성이 시내에서 궁전 들어가는 메인 도로예요. 그 주변을 김정은이 아주 야심차게 거기다가 건설을 하라고 하고 그것도 기간까지.
[앵커]
건설을 하려고 부수다가 무너진 거죠?
[인터뷰]
네. 기한을 찍어준 게 문제죠. 올해 10월 10일까지 완공하라니까 이게 날림공사 저렇게 사고공사가 되죠.
[인터뷰]
제가 있을 때는 사촌오빠도 갱도건설을 하다가 갱도가 무너져서 북한에서는 갱도 무너져서 군인들이 사고났다고 그러면 사람부터 구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구할까요? 총알 먼저 찾습니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장군님한테, 수령님한테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까 그냥 다 매몰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체도 못 찾았는데 우리 아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 보니까 그냥 지나가다가 못을 밟았는데 파상풍이 걸려 죽었다고 하면 그러면 끝이에요, 북한은. 더 알려고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처음 왔을 때 이런 뉴스들이 다 나오잖아요. 찔렀다, 불렀다, 무너졌다고 다 나오는 게 그게 더 이상해 보였어요, 저희 입장에서는.
[앵커]
그런데 이게 인명 피해는 어느 나라에서는 가슴이 아픈 일인데 정말 씁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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