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 붕괴 20년...1995년 6월 29일 무슨 일이?

삼풍백화점 붕괴 20년...1995년 6월 29일 무슨 일이?

2015.06.29. 오후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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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순, YTN 취재기자 (삼풍참사 최초 보도) / 경광숙, 당시 도봉소방서 구조대장

[앵커]
6월 29일, 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났었던 날입니다. 1987년이 6.29선언이었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그리고 2002년 6월 29일이 제2연평해전이었습니다.

오늘은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처음 보도했었던, 그때 아시는 대로 저희 YTN이 특종보도를 했었습니다. 그때 처음 보도했었던 취재기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도봉소방서 구조대장이었고 여러분 기억하시는 첫 생존자 구조했었던 최명석 씨를 구조했었던 경광숙 당시 구조대장, 그리고 저희 YTN의 이상순 기자 두 분을 초대했습니다. 당시 상황 회고해 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벌써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20년 딱 된 거죠. 어떻습니까? 지금도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십니까, 대장님은?

[인터뷰]
저는 그 당시에 구조 못 한 여자분의 목소리를 들어서 알게 모르게 상당히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때로는 너무 심하게 고통스러울 때는 병원 치료를 받는 경우도 때로는 있고 그렇습니다.

[앵커]
그때 어떤 상황이었기에 못 잊으시는 건가요?

[인터뷰]
저희들이 구조활동 하는 과정에서 저희 대원이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여자 목소리를 확인을 하는데 확인하는 위치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지휘본부로 연락을 해서 20여 명의 구조대원을 더 추가해서 구조활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첨단장비가 없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위치파악하는 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리를, 위치가 제일 가까운 쪽이 아무래도 제일 잘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라비아 숫자로 숫자를 셀 테니까 잘 들리는 쪽을 숫자를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하나, 둘, 셋 했습니다. 그랬더니 1번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1번쪽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주변에 혹시라도 붕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안전조치를 하면서 구조활동에 임했거든요.

한 1m 정도 파고 들어가서 또다시 확인하는데 이번에는 전혀 반대쪽을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시루떡처럼 백화점 내부에 판매 상품들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음성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소리가 잘 전달이 되지 않는 것도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위치 파악하는 데 어려웠던 게...

[앵커]
그래서 못 구하셨군요, 결국?

[인터뷰]
네, 연기가 너무 많이 난다고 숨을 못 쉬겠더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일 제가 힘들었던 부분이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했던 얘기거든요. 그런데 저뿐만 아니라 모든 구조대원들이 살려달라는 그 요구조자 목소리를 듣고도 그 당사자를 살리지 못 했다는 건 직무유기가 될 수도 있고 큰 죄책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이후에 많은 시간을 고생을 했습니다.

[앵커]
그 소리를 잊지 못하시는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20년이 지났지만 다 잊혀지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을 하게 됩니다.

[인터뷰]
아마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스럽고 송구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앵커]
그때 이상순 기자가 국내, 국외를 통틀어서 처음 그 현장을 봤고 최초로 보도한 기자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 처음에 알게 되신 거죠?

[기자]
당시 제가 그 해 5월 1일에 입사한 초년병 기자였습니다. 그래서 법원에 처음 출입을 하면서 취재를 하게 됐는데요. 그날이 마침 가정법원장실에 취재기자들이 모여서 그 달의 가정법원판결문을 보고 취재를 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렵이 오후 6시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때 전부 판결문을 보고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나가보니까 백화점이 무너졌다고 해서 가정법원장실에 있던 복도 끝에 삼풍백화점 볼 수 있는 창이 있었어요, 끝까지 가면. 창에 달려가서 보니까 건물 두 채가 보여야되는데 한 채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 회사에 전화를 해서 보도를 하게 됐습니다.

[앵커]
그리고 바로 현장으로 갔습니까?

[기자]
제가 처음에 회사에 전화를 해서 보고를 하고 보도를 했을 때는 삼풍백화점 반이 날아갔다고 제가 정확하게 보고를 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 상황이 무너졌다고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예를 들면 폭발사고나 당시에 일부에서는 테러 아니냐, 그런 얘기도 있었고.

[앵커]
그때 유난히 가스폭발 사고가 유난히 있었거든요. 대구에서도 있고 아현동에서도 있었고요.

[기자]
제가 회사에 전화를 해서 일부 보도한 이후 현장에 가봤을 때도 건물 잔해라든가 백화점에 있던 물건들이 길 밖으로 많이 튀어나와 있었거든요. 당시 상황을 현장에서 봤을 때는 폭발사고인 듯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입니다.

[앵커]
그렇죠. 그래서 갔더니 어떤 상황이던가요? 아직 구조대도 도착하기 전이었죠?

[기자]
네, 무너진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요, 제가 갔을 때가. 그런데 그때만 해도 생존자분들이 건물 잔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투성이가 돼서 나오는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전쟁터하고 다를 바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앵커]
그때 이 기자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마 알기로는 이상순 기자 다음으로 현장에 도착한 기자였거든요. 그날이 사상 최초의 지방선거, 서울시장을 민선으로 뽑는 그다음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순 시장이 그때 당선돼서 서울 지하철공사를 방문한, 방배동에 있거든요, 그게. 제가 거기 취재를 갔다가 회사에서 급하게 연락이 와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단다라고 해서 차를 막 경광등을 켜고 가는데 이렇게 돌아왔는데 벽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회사에 전화를 했어요, 제가. 그래서 '백화점이 멀쩡한대요' 라고 했더니 회사에서 그 선배들이 무슨 소리냐고 욕을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차가 코너를 돌았는데 이쪽 벽만 있고 나머지가 다 없는, 저도 충격적인 장면을 지금도 기억하거든요.

[기자]
믿기지 않는 사고였죠.

[앵커]
대장님은 언제쯤 어떻게 소식을 듣고서 현장에 도착하신 건가요?

[인터뷰]
저는 그날 휴무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조 업무 관련 책자를 쓰고 있는 게 있어서 그 자료 수집차 교보빌딩에 그 시간에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업무용 삐삐, 무선호출기가 막 너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사무실로 전화를 해 봤더니 사무실이 전화를 안 받는 거예요. 물론 그 시간에 출동지령을 받고 대원들은 다 출동한 상태이기 때문에 전화를 안 받았겠죠.

그래서 나중에 본부로 확인을 해 봤더니 본부에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지금 삼풍백화점이 붕괴돼서 지금 구조 비상출동이 걸렸다.
어디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빨리 현장으로 출동하라고 위치를 알려주더라고요.

교보빌딩에서, 광화문에서 그쪽으로 가려면 택시를 타야 되는데 택시를 탈 데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광화문 지하차도를 넘어와서 택시 잡기 위해서 서 있는데 동아일보사에서 사이렌을 치면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직감적으로 이분들도 현장에 가실 것 같다고 해서 중간에 차를 막았죠. 차를 막고 혹시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으로 가시느냐고 하니까 그렇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저 구조대장인데 현장에 빨리 가야 되는데 괜찮으시면 탑승시켜서 현장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더니 타시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취재차량에 탑승하고 나서 정말로 그분들이 빨리 가셨어요. 제 기억으로는 7분 만에 현장에 도착을 하셨어요.

[앵커]
신호 그때는 다...

[인터뷰]
그렇죠, 그만큼 급박한 거고 또 기자분들이기 때문에 보도에 대한 걸 신속하게 보도해 드려야 되는 의무가 있는 분들이라서 그렇게 빨리 하셨던 것 같아요.

[앵커]
지금 세대들은 사실 삼풍백화점 그러면 사고 난 데로만 알지 그때 어떤 곳이었는지 잘 모르거든요. 삼풍백화점이 그 당시로 치면 어떤 정도의 백화점이었는지 설명해 주시죠.

[기자]
저도 서초동에 법원과 검찰 취재를 다니면서 지나다니기만 했지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가장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부티끄백화점, 고급백화점이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매출규모로도 롯데백화점 다음으로 가는 그런 큰 규모의 백화점이었죠.

[앵커]
그랬군요. 그런 백화점이 무너졌으니까 더 어떤 면에서 충격이 큰 그런 면이 있었던 거죠. 그때 며칠 동안 현장에서 구조활동 하셨습니까?

[인터뷰]
저는 현장에서 사고 당시에 복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교보빌딩에서 양복 차림이었거든요. 그 상태로 들어가서 차량이 와서 활동복으로 갈아입고 29일 만에 철수를 했던 걸로 생각합니다.

[앵커]
29일 동안 현장에서 숙식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네, 그 부분에 대한 건 한 25일 정도 돼서 사실상 구조활동에 대한 모든 것은 상황이 종료됐어요. 그런데 한 4일 정도에 대한 건 유가족들 또 실종자, 흔적이 없이 사라져버린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의 가족들이 저희들이 철수를 하게 되면 이 부분이 마무리가 안 된다. 다시 한 번 좀더 확인해 달라, 확인해 달라. 사실상 확인할 게 없을 정도로 다 정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요청에 따라서 한 4일 정도 더 현장에 있었습니다.

[앵커]
그때 기자들도 이상순 기자도 그렇고 거의 한 달을 거기서 계속 숙식하다시피 했을 텐데요. 그때 취재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잊지 못한 순간들은 이 기자는 어떤 것들인가요?

[기자]
일단 제가 붕괴사고 직후에 현장에 갔을 때 제가 그때 기억에 남는 분이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한데요. 어느 여자 분이, 아마 삼풍백화점에서 일하는 분이었던 것 같아요. 허옇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피를 흘리시면서 나오시면서 제정신이 아니죠, 사고가 워낙 컸으니까요. 그렇게 뛰어나오시면서 울부짖던 게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고요.

당시에 저희 YTN 같은 경우에 공식적인 개국일이 5월 1일에 개국해서 한 달 반 정도 만에 아마 단군 이래 가장 큰 사고를 방송을 하고 또 현장에서 제가 취재했던 기자인데요. 그러다 보니까 그 삼풍백화점 사고를 계기로 해서 저희도 많은, 기자 개인으로도 경험을 쌓고 또 나름대로 유가족분들이나 또 저희가 다른 방송사들과는 달리 거의 한 달 이상 저희가 특보를 진행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 그래서 유족들이라든가 또 관계자분들이 저희 뉴스를 보고 또 사고 수습이나 그런 데 많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측면에서 자부심이 있습니다.

[앵커]
제 기억에 그때 유가족이 모여있었던 데가 서초구청이었나요?

[기자]
서초구청도 있었고요. 현장에 근접한 본부는 당시에 건너편에 삼풍주유소가 있었죠. 거기에 본부가 있었고요.

[앵커]
거기서 항상 YTN을 틀어놓고. 왜냐하면 YTN 통해야만 소식을 그때 하나하나 접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이 의지하셨던, 저희가 저희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랬었던 것이 저도 기억이 납니다.

대장님께서 그때 최명석 씨, 오랫동안 있다가 11일 만에 구조됐었던 최명석 씨를 구조하셨는데요. 삼풍 사고를 떠올릴 때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는 세 사람 당시 청년이었던 박승현 씨, 유지환 씨 그리고 최명석 씨. 이 세 사람의 극적인 구조소식, 그 소식이 참 그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주는 그런 소식이었습니다. 그때 최명석 씨를 구조한 분이 바로 저희가 오늘 초대한 경광숙 구조대장입니다. 그 당시 상황 좀 들어보겠습니다. 그때 어떻게 처음 아시고 구조를 하시게 된 겁니까?

[인터뷰]
저희들이 구조활동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포지션들을, 지역적인 섹터를 나눴습니다. 그래서 1시간 전에 다른 타구조대로부터 저희들이 업무를 인계를 받고 현장을 수색을 하고 있는데 저희 대원하고 제가 거리가 떨어져 있었거든요. 떨어져있던 이유가 대원들이 위해 요인이 있는지 없는지, 같이 서 있으면 확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대원이 그러더라고요. 사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빨리 현장으로 와 달라고 얘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현장에 가서 확인을 해 보니까 사람의 위치는 확인이 안 되는데 목소리가 남자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제 말이 잘 들리시냐고 그랬더니 잘 들린다고 얘기를 했고요. 이름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최명석이라고 대답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저희들이 구조활동을 시작을 할 건데 혹시라도 소리가 나거나 아니면 본인이 어떤 위험 요인이 생긴다고 그러면 소리를 질러서 알려달라고 하고 지휘본부로 연락을 했죠. 생존자 발견, 구조 활동 시작할 테니까 전 중장비에 대한 작업을 중단해 주시고 인원을 투입해 달라고. 그래서 그 많은 인원이, 어차피 그 중장비 작업은 그 상태에서 하기가 어렵거든요.

[앵커]
위험하니까요.

[인터뷰]
생존자에 직접적인 위해요인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수작업으로 하고 있는 그런...

[앵커]
당시 화면 저희가 보여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11일 만에 바깥으로 나온 것이니까 눈이 손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눈을 가리는 거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햇빛을 보기 전에 11일이라는 많은 시간 동안에 햇빛을 못 봤기 때문에 눈이 햇빛을 보게 되면 시력에 큰 저해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그걸 예방하기 위해서 타올로 시야를 가렸습니다.

[앵커]
처음에 구조하는 순간 최명석 씨가 뭐라고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혹시 기억나시는 거 있습니까?

[인터뷰]
특별하게 본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던 건 아니고요. 자기 나이와 내가 최명석이라는 건 또렷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앵커]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일단 특별한 부상도 없었고요. 아마 그분이 그렇게 멀쩡하게 생존의 저해요인이 없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최명석 군 아버님께서 봉사활동, 사고난 다음부터 계속 현장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셨었어요.

[앵커]
쉽지 않을 일일 텐데 당신의 아들 생사도 모르는데 거기서 봉사를 한다는 게.

[인터뷰]
당신께서 그런 얘기를 하셨던 것 같아요. 내 아들이 여기 있는데 내가 여기서 봉사활동하면서 내 아들의 시신이라도 구조대원들이 찾아주면 데려가야 되기 때문에 나는 뿌리칠 수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그분뿐만이 아니라 또 어머님도 같이 오셔서 봉사활동 같이 거들기도 하시고 그랬기 때문에 그런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그때 기자들도 현장에서 그와중에서 그 소식을 듣고 다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습니까?

[기자]
그랬죠.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사실 생존자가 있기를 희망은 했지만 과연 생존자가 있을까, 다들 그런 생각을 했었던 참이었습니다. 최명석 씨가 그렇게 생존해서 나오고 그래서 다들 많이 놀랐고요. 그런데 그야말로 기적이기 때문에 몇 분만이 현장에서 살아나오셨다는 게 지금도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앵커]
그 뒤로 이틀 지나서 유지환 씨가 나왔고 또 나흘이 지나서 박승현 씨가 나왔고요. 최명석 씨는 혹시 그 뒤로 만나보시거나 연락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최명석 군은 아버님하고 같이 2달 정도 지나고 나서 저희 사무실에 찾아오셨었어요. 그래서 당신의 삶에 대한 생존을 하게끔 해 줘서 고맙다는 그런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저희 구조대원들하고. 사실상 희생된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한 분이라도 돌아오실 수 있는 역할을 했다는 것 자체에 대한 건 큰 보람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저는 사실 2003년도, 저때 부터 8년 지나서 최명석 씨를 직접 만나본 적이 있는데요. 어느 큰 건설회사 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저희가 건설 현장으로 찾아가서 만났었습니다. 그때 제 느낌은 반듯하게 잘 성장을 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었고 그러나 인터뷰는 아주 간곡하게 고사를 했었고. 지금은 잘 지내는지 혹시 소식은 못 들으셨죠?

[기자]
저도 앵커께서 말씀하신 정도만 알고 있고요. 본인은 기억 자체를 떠올리는 게 원치 않을 거라는 게 이해가 충분히 갑니다.

[앵커]
이 세 분이 다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존중을 하고 그냥 놓아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제 이런 사고를 겪은 지 20년이 됐는데 그 뒤로도 많은 사고들이 또 계속해서 나오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래서 달라진 것이 있는지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요. 이 기자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그때 와는 다른 게 달라졌고,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기자]
기자 입장에서 이런 사건사고를 늘 취재하고 있는데요. 늘 저희가 늘상 기자로서 기사를 쓰면서 하는 말이 인재다, 이런 말을 항상 쓰면서 다음 번에는 이런 말 안 썼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가장 최근에 세월호 참사까지, 인재라는 말 지금까지 쓰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우리 사회가 바뀐 것이 있는가에 대해서, 아마 우리 모두가 공감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바뀐 게 뭐가 있는가 싶은 그런 마음입니다.

[앵커]
대장님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해 주시죠, 당부나.

[인터뷰]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재난이나 사고를 유발하게 되는 건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정부의 정책적인 변화 또는 아니면 개정이라든지 법률, 그런 것도 필요하겠죠.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사고가 남의 사고라고만 생각을 하고 당신이 닥칠 수 있는 사고라고 전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내 사고라고 하면, 또 내가 닥칠 수 있고 내 가족들이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과연 놓칠까요?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우리 국민들 스스로가 조금 더 안전에 대한 걸 관심을 가지고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기업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 기업인으로서의 직원들에 대해서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안전을 확보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자]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과연 적절한 책임을 물었는가에 대한 물음인데요. 삼풍백화점 같은 경우에 대표적으로 이준 전 회장이죠. 이준 회장 같은 경우에 업무상 과실치사 등 해서 4가지 혐의로 징역 10년 6개월의 1심을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7년 6개월로 감형돼서 그 정도 복역하고 나왔는데 당시 그때 법감정과도 거리가 먼 처벌 수준이었고요. 이런 면에서 일단 책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정해야 한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곱씹어야 될 대목인 것 같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두 분 이렇게 나와 주셔서, 증언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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