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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우병우 전 수석은 영주에서 교사로 재직한 아버지를 따라 줄곧 영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릴 때부터 '천재'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서울대 법대 4학년이던 20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소년 등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는데요.
당시 장래희망을 '검사'라고 했던 우 전 수석에 대해 고3 담임이었던 한병태 전 영주고 교장은 이렇게 기억하기도 했습니다.
[한병태 / 前 영주고 교장 (우병우 前 수석 고3 담임) : 우 수석에게 왜 검사를 하려고 하느냐 물었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와 부정과 부패가 없는 국가를 만들겠다' 당돌하리만큼 또박또박 말했다. 참 독특한 학생으로 기억한다.]
이후 우 전 수석은 검찰에서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1990년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그가 검사로 임관할 때 성적은 2등이었습니다.
그는 초임을 서울중앙지검에서 보냈습니다.
법조 관계자는 "우 수석은 어릴 적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만큼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감 있던 모습을 보였다. 이게 주변을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그래서 젊은 시절 우 수석에게 '깁스'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검 중수부 1과장이던 지난 2009년엔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했습니다.
당시 그는 미리 준비한 200여 개의 질문을 들고 노 전 대통령을 직접 심문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수사를 받은 지 20여 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당시 그는 노 전 대통령과 가족들에 대한 피의사실을 언론에 실시간 중계하듯 알려 과잉공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뒤 우 수석은 자리를 옮겨 대검 범죄정보기획관과 수사기획관을 지내면서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건 수사를 지휘했습니다.
이후 인천지검 부천지청장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을 거친 뒤 지난 2013년 5월 스스로 검찰을 떠났습니다.
늘 엘리트였지만 2012년과 2013년 두 번이나 검사장 승진에 실패한 뒤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쿨'하게 사직서를 던졌지만 그가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린 짧은 글을 보면 검사장에 오르지 못한 상실감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검사장 탈락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검사'였다는 일각의 견해와 '너무 많은 재산'이 더 큰 악재로 작용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재력가 사위'로 불렸던 우 전 수석은 고 이상달 회장의 네 딸 가운데 한 명과 결혼했습니다.
이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우 수석 처가의 재산은 부동산과 주식 등을 합쳐 수천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우병우 사태'의 시발점이 된 넥슨과의 서울 강남 부동산 거래에서는 매매가액이 1,300억 원대에 이르는 처가 보유 건물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검찰을 떠나 변호사 생활을 하던 우 전 수석은 박근혜 정부 2년 차인 2014년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으로 기용되며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비서관에서 수석으로 유례없는 승진한 우 전 수석은 검찰과 경찰 등 사정 라인을 관리하며, 이른바 문고리 3인방과 함께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위세를 떨쳤습니다.
'우병우 사단'이라는 말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물밑에서 위세를 떨치던 우 수석은 7월 18일 뜻하지 않게 수면 위로 부상했습니다.
[조선일보]는 7월 18일자 1면에 우 수석 처가의 부동산 매매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이후 주요 언론들은 '우병우'라는 이름을 매일같이 보도했습니다.
당시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의 처가와 넥슨이 1,300억 원대 부동산을 거래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터질 문제가 터졌다며, 권력 곳곳에 퍼져있는 우병우 사단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지원 /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 권력의 정점에서 인사·사정… 모든 권력을 전횡했고 심지어 비서실장까지 무력화시킨 장본인, 우병우 수석 문제가 터질 것이 이제 터졌습니다. 우리는 정부권력기관 도처에 열려있는 우병우 사단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했던 지난 25일 청와대 참모진은 일괄 사의를 논의했지만, 우병우 수석이 당시 "대통령에 대한 배신"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며, 안종범 수석도 이에 동조하면서 결국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청와대 비서진의 일괄 사퇴를 반대했다고 알려진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향해 "청와대 안에 숨어서 수사회피 하나. 본인들이 거기 있으면 제대로 사태 수습이 가능하냐"고 질타하기도 했습니다.
[우상호 / 민주당 원내대표 : 수사 대상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먼저 사퇴하겠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청와대 비서진들의 일괄 사퇴를 반대했다는 데 더 어안이 벙벙합니다. 이런 뻔뻔한 수석들이 어디 있습니까? 청와대 안에 숨어서 수사를 회피할 생각이십니까?]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박 대통령은 10월 28일 한밤 청와대 수석비서관 10명 전원을 대상으로 일괄사표 제출을 전격 지시했습니다.
우병우 전 수석은 처가 땅 의혹이 최초 보도된 지 111일째,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지 80일 만인 어제 검찰에 출석했는데요.
취재기자를 쏘아보는가 하면 검찰 청사 안에서 팔장을 끼고 웃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면서 '황제 소환'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리틀 김기춘'이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민정수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정권 전체의 실세로 자리매김하며 '대통령의 남자'로 불렸던 우병우, 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어릴 때부터 '천재'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서울대 법대 4학년이던 20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소년 등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는데요.
당시 장래희망을 '검사'라고 했던 우 전 수석에 대해 고3 담임이었던 한병태 전 영주고 교장은 이렇게 기억하기도 했습니다.
[한병태 / 前 영주고 교장 (우병우 前 수석 고3 담임) : 우 수석에게 왜 검사를 하려고 하느냐 물었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와 부정과 부패가 없는 국가를 만들겠다' 당돌하리만큼 또박또박 말했다. 참 독특한 학생으로 기억한다.]
이후 우 전 수석은 검찰에서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1990년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그가 검사로 임관할 때 성적은 2등이었습니다.
그는 초임을 서울중앙지검에서 보냈습니다.
법조 관계자는 "우 수석은 어릴 적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만큼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감 있던 모습을 보였다. 이게 주변을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그래서 젊은 시절 우 수석에게 '깁스'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검 중수부 1과장이던 지난 2009년엔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했습니다.
당시 그는 미리 준비한 200여 개의 질문을 들고 노 전 대통령을 직접 심문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수사를 받은 지 20여 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당시 그는 노 전 대통령과 가족들에 대한 피의사실을 언론에 실시간 중계하듯 알려 과잉공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뒤 우 수석은 자리를 옮겨 대검 범죄정보기획관과 수사기획관을 지내면서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건 수사를 지휘했습니다.
이후 인천지검 부천지청장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을 거친 뒤 지난 2013년 5월 스스로 검찰을 떠났습니다.
늘 엘리트였지만 2012년과 2013년 두 번이나 검사장 승진에 실패한 뒤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쿨'하게 사직서를 던졌지만 그가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린 짧은 글을 보면 검사장에 오르지 못한 상실감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검사장 탈락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검사'였다는 일각의 견해와 '너무 많은 재산'이 더 큰 악재로 작용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재력가 사위'로 불렸던 우 전 수석은 고 이상달 회장의 네 딸 가운데 한 명과 결혼했습니다.
이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우 수석 처가의 재산은 부동산과 주식 등을 합쳐 수천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우병우 사태'의 시발점이 된 넥슨과의 서울 강남 부동산 거래에서는 매매가액이 1,300억 원대에 이르는 처가 보유 건물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검찰을 떠나 변호사 생활을 하던 우 전 수석은 박근혜 정부 2년 차인 2014년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으로 기용되며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비서관에서 수석으로 유례없는 승진한 우 전 수석은 검찰과 경찰 등 사정 라인을 관리하며, 이른바 문고리 3인방과 함께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위세를 떨쳤습니다.
'우병우 사단'이라는 말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물밑에서 위세를 떨치던 우 수석은 7월 18일 뜻하지 않게 수면 위로 부상했습니다.
[조선일보]는 7월 18일자 1면에 우 수석 처가의 부동산 매매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이후 주요 언론들은 '우병우'라는 이름을 매일같이 보도했습니다.
당시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의 처가와 넥슨이 1,300억 원대 부동산을 거래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터질 문제가 터졌다며, 권력 곳곳에 퍼져있는 우병우 사단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지원 /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 권력의 정점에서 인사·사정… 모든 권력을 전횡했고 심지어 비서실장까지 무력화시킨 장본인, 우병우 수석 문제가 터질 것이 이제 터졌습니다. 우리는 정부권력기관 도처에 열려있는 우병우 사단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했던 지난 25일 청와대 참모진은 일괄 사의를 논의했지만, 우병우 수석이 당시 "대통령에 대한 배신"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며, 안종범 수석도 이에 동조하면서 결국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청와대 비서진의 일괄 사퇴를 반대했다고 알려진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향해 "청와대 안에 숨어서 수사회피 하나. 본인들이 거기 있으면 제대로 사태 수습이 가능하냐"고 질타하기도 했습니다.
[우상호 / 민주당 원내대표 : 수사 대상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먼저 사퇴하겠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청와대 비서진들의 일괄 사퇴를 반대했다는 데 더 어안이 벙벙합니다. 이런 뻔뻔한 수석들이 어디 있습니까? 청와대 안에 숨어서 수사를 회피할 생각이십니까?]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박 대통령은 10월 28일 한밤 청와대 수석비서관 10명 전원을 대상으로 일괄사표 제출을 전격 지시했습니다.
우병우 전 수석은 처가 땅 의혹이 최초 보도된 지 111일째,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지 80일 만인 어제 검찰에 출석했는데요.
취재기자를 쏘아보는가 하면 검찰 청사 안에서 팔장을 끼고 웃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면서 '황제 소환'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리틀 김기춘'이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민정수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정권 전체의 실세로 자리매김하며 '대통령의 남자'로 불렸던 우병우, 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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