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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들이 호두책방 안으로 들어오도록 설치한 경사로/ 호두책방 제공)
지난해 말 문을 연 경북 경산시의 '호두책방'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서점 측은 고객의 편의를 위해 출입구에 외부경사로를 설치했다. 해당 경사로는 경산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장애인 편의 증진을 위해 지체장애인협회로 보낸 보조금으로 만든 시설이었다.
그런데 해당 경사로가 '보행자가 다니기 불편한 불법 시설물'이라는 민원이 들어왔다. 경산시청 도로철도과 공무원들은 민원을 받고 현장에 나왔다. 경산시청은 호두책방의 장애인 경사로가 도로법에 저촉되는 불법 시설물이라며 철거를 하거나 점용허가를 받으라고 말했다.
도로법 시행령 제55조 10호에 따라 장애인 편의시설 가운데 주 출입구 접근로는 도로점용허가를 받을 수 있는 범위에 포함된다. 장애인 경사로는 도로법 제68조 7호에 따라 도로점용료도 감면받을 수 있다.
(▲ 도로법 시행령 제55조 캡쳐본/ 국가법령정보센터)
호두책방 측은 경산시청에 도로점용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점용허가를 내주기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책방 측은 '인도 쪽으로 경사로가 나 있어 인도 통행에 방해가 될 수 있고, 이에 대한 민원이 들어온 상태라 분쟁이 생길 소지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며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 충분한 데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한, 현장에 나온 공무원은 '이번 경우에 허가를 내주면 일대에 경사로를 신청하는 모든 가게에 점용허가를 내줘야 해서 안 된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호두책방은 SNS를 통해 "시민을 위한 법과 행정이 아니다"라며 "경산시 장애인 경사로 철거의 전례를 만들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YTN PLUS와의 인터뷰에서 경산시청은 지금 바로 철거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도로철도과 관계자는 "개발허가부서에서 점용허가를 검토한 뒤 철거 여부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만약 허가가 안 나면 불법 시설물로 볼 수밖에 없고, 최대한 자진 철거를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산시청은 "아직 여러 경우의 수가 있어 즉답을 드리기는 어렵다"면서도 "역 앞이라 인파가 붐빌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안전사고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외부 경사로를 두기보다는 건물 출입구 문턱을 낮추는 방향으로 건물주와 합의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 2014년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한 웹툰 공모전 최우수작인 '어느 날 설치된 경사로' 영상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하지만 현실적으로 건물주와 합의를 거쳐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제7조에 따르면 공공건물 및 공중이용시설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대상이지만 개인 건물에는 강제성이 적은 권고 수준에 가깝기 때문이다.
호두책방은 YTN PLUS와의 인터뷰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아 경사로를 설치한다고 해도 귀찮아하는 건물주가 부지기수"라며 "특히 오래된 건물의 경우 이미 턱이 높은 상황에서 모두 헐어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라 주장했다. 또한 "인도 통행에 크게 불편을 주지 않는 경사로인데 허가를 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이와 같이 건물주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구조에서 세입자에게 장애인 접근권을 위한 장치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미국의 경우 모든 편의시설을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소극적으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도 차별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건물을 짓는 단계에서 '보편적 이동권'을 보장하기 어려운 설계는 허가가 나지 않고, 야구장 같은 공공시설은 반드시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하는 편이다.
(▲ 미국 장애인법인 ADA 제정 25주년을 맞아 만들어진 영상/ Chazz Menendez)
반면 한국 국가인권위에서 지난달 발표한 조사에서 편의시설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닌 공중이용시설의 경우 85% 이상에 장애인용 화장실이 없고, 80% 이상에 점자 블록이 없으며, 2cm 이상의 턱이 존재하는 경우가 80%를 넘겼다. 턱이 있는 경우 경사로를 설치하지 않은 비율이 67%였고, 설치한 경사로가 법적 기준 미달로 평가받는 경우가 20%에 달했다.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르면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과 설비를 동등하게 이용하고,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디자인 단계부터 모두의 접근권을 고려해 설계하면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도 편리한 경우가 많다. 인권 변호사 엘리제 로이는 "장애인을 위해 디자인하면 모두가 편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개인이 조금씩 양보하지 않으면 장애인만 양보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대중교통을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하는 장애인은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이웃이다.
YTN PLUS 김지윤 모바일PD
(kimjy827@ytnplus.co.kr)
[사진 출처= 호두책방, 국가법령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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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문을 연 경북 경산시의 '호두책방'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서점 측은 고객의 편의를 위해 출입구에 외부경사로를 설치했다. 해당 경사로는 경산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장애인 편의 증진을 위해 지체장애인협회로 보낸 보조금으로 만든 시설이었다.
그런데 해당 경사로가 '보행자가 다니기 불편한 불법 시설물'이라는 민원이 들어왔다. 경산시청 도로철도과 공무원들은 민원을 받고 현장에 나왔다. 경산시청은 호두책방의 장애인 경사로가 도로법에 저촉되는 불법 시설물이라며 철거를 하거나 점용허가를 받으라고 말했다.
도로법 시행령 제55조 10호에 따라 장애인 편의시설 가운데 주 출입구 접근로는 도로점용허가를 받을 수 있는 범위에 포함된다. 장애인 경사로는 도로법 제68조 7호에 따라 도로점용료도 감면받을 수 있다.
(▲ 도로법 시행령 제55조 캡쳐본/ 국가법령정보센터)
호두책방 측은 경산시청에 도로점용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점용허가를 내주기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책방 측은 '인도 쪽으로 경사로가 나 있어 인도 통행에 방해가 될 수 있고, 이에 대한 민원이 들어온 상태라 분쟁이 생길 소지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며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 충분한 데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한, 현장에 나온 공무원은 '이번 경우에 허가를 내주면 일대에 경사로를 신청하는 모든 가게에 점용허가를 내줘야 해서 안 된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호두책방은 SNS를 통해 "시민을 위한 법과 행정이 아니다"라며 "경산시 장애인 경사로 철거의 전례를 만들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YTN PLUS와의 인터뷰에서 경산시청은 지금 바로 철거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도로철도과 관계자는 "개발허가부서에서 점용허가를 검토한 뒤 철거 여부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만약 허가가 안 나면 불법 시설물로 볼 수밖에 없고, 최대한 자진 철거를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산시청은 "아직 여러 경우의 수가 있어 즉답을 드리기는 어렵다"면서도 "역 앞이라 인파가 붐빌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안전사고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외부 경사로를 두기보다는 건물 출입구 문턱을 낮추는 방향으로 건물주와 합의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 2014년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한 웹툰 공모전 최우수작인 '어느 날 설치된 경사로' 영상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하지만 현실적으로 건물주와 합의를 거쳐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제7조에 따르면 공공건물 및 공중이용시설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대상이지만 개인 건물에는 강제성이 적은 권고 수준에 가깝기 때문이다.
호두책방은 YTN PLUS와의 인터뷰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아 경사로를 설치한다고 해도 귀찮아하는 건물주가 부지기수"라며 "특히 오래된 건물의 경우 이미 턱이 높은 상황에서 모두 헐어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라 주장했다. 또한 "인도 통행에 크게 불편을 주지 않는 경사로인데 허가를 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이와 같이 건물주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구조에서 세입자에게 장애인 접근권을 위한 장치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미국의 경우 모든 편의시설을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소극적으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도 차별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건물을 짓는 단계에서 '보편적 이동권'을 보장하기 어려운 설계는 허가가 나지 않고, 야구장 같은 공공시설은 반드시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하는 편이다.
(▲ 미국 장애인법인 ADA 제정 25주년을 맞아 만들어진 영상/ Chazz Menendez)
반면 한국 국가인권위에서 지난달 발표한 조사에서 편의시설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닌 공중이용시설의 경우 85% 이상에 장애인용 화장실이 없고, 80% 이상에 점자 블록이 없으며, 2cm 이상의 턱이 존재하는 경우가 80%를 넘겼다. 턱이 있는 경우 경사로를 설치하지 않은 비율이 67%였고, 설치한 경사로가 법적 기준 미달로 평가받는 경우가 20%에 달했다.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르면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과 설비를 동등하게 이용하고,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디자인 단계부터 모두의 접근권을 고려해 설계하면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도 편리한 경우가 많다. 인권 변호사 엘리제 로이는 "장애인을 위해 디자인하면 모두가 편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개인이 조금씩 양보하지 않으면 장애인만 양보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대중교통을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하는 장애인은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이웃이다.
YTN PLUS 김지윤 모바일PD
(kimjy827@ytnplus.co.kr)
[사진 출처= 호두책방, 국가법령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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