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 방송: YTN 뉴스N이슈
■ 진행: 정찬배 앵커, 장민정 앵커
■ 출연: 최영일 시사평론가, 김태현 변호사
◇앵커> 제주 4.3 사건은 5.18 민주화 운동이나 4.19 혁명보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기도 하는데 어떤 사건이었고 왜 이 사건만 사건이라고 칭하는지 설명을 해 주시죠.
◆인터뷰> 워낙 길었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런데요. 이게 민주화 운동은 아닙니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해방 직후에 벌어진 혼란의 역사인데요. 제주 4.3 사건 이렇게만 부르고 있죠. 47년 3.1에 일이 터집니다. 그런데 45년에 해방되고 나서 제주 도민들이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많았는데 이게 정치적인 이유라기보다 일제 때 부역했던 경찰들이 군정 경찰이 됐어요.
◇앵커> 친일파들이 다시 돌아온 거죠.
◆인터뷰> 친일파들이 공권력을 행사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민심이 안 좋았죠. 그러다 47년 3월 1일에 기마 경찰에 의해서 3.1절 행사를 구경하던 어린이가 밟혀서 다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주민들이 화가 나서 돌멩이를 던졌는데 폭동이다라고 판단하고 경찰들이 발포해서 6명이 사망합니다. 이때부터 1년간 민심이 소용돌이치다가 48년 4월 3일 새벽에 이번에는 무장대라고 하는 좌익 청년들이 우익 인사들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져요. 이러면서 좌우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정부 차원에서 엄혹한 탄압이 시작된 겁니다. 좌익 색출이라는 명목 하에 양민 학살이 굉장히 지속적으로 벌어지는데 54년 9월에야 이 사태가 끝나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무장대라고 이야기하는 좌익청년들이 끝까지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데 이들의 수는 불과 60여 명이었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계속 군대가 가면서 토벌을 한 결과 제주도민들의 10분의 1의 인구 1만 4000명이 공식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는데 공식 집계 이외에도 지금까지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유가족들의 사정들을 우리가 돌아보면 더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앵커> 2만 7000이다, 3만이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인터뷰> 한 2배 이상 될 것이다라는 추정이 있고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찰도 140명, 군인도 180명 전사자들이 나왔고요. 그러니까 이거는 문재인 대통령 말씀처럼 편협한 이념격돌 속에서 죄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사건입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제주도민들이 당시에 좀 좌익단체를 중심으로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었어요. 그러니까 또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이다라는 차원에서 탄압이 벌어지고 이 사이에 또 6.25전쟁이 벌어진 과정에는 또 공비토벌이다라고 해서 토벌이 벌어지고 굉장히 아픈 역사가 제주에서는 오랫동안 지속됐던 그런 사건입니다.
◇앵커> 그래서 그 당시만 하더라도 가족 중의 한 사람만 없어도 어디에 갔냐, 대답을 잘 못 하면 한라산에 마치 빨치산 항쟁하듯이 올라가듯 숨어 있는 거다라고 하면서 가족들까지 다 학살을 합니다. 그 일을 겪었던 당시 11살 소녀가 있었죠.
◇앵커> 국가의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도 받지 못했는데요. 피해자 할머니의 목소리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홍춘호 / 4·3사건 생존자 (MBC라디오 '양지열의 시선집중') : 그때는 그렇게 숨어 살아난 사람들 서귀포 가서 영창 생활 몇 개월 동안 하면서 배고픈 생각, 석방. 한가을 들어가니까 우리 사람들 다 석방시키대요. 석방시키니까 이제 갈 데 없고 하니까 우리도 안덕면 소재지에 왔어요. 소재지에 오니까 안덕면 사람들 우리 폭도라고 집도 안 빌려줍니다. 폭도라고 집도 안 빌려주고 집도 그냥 살지 못하고 이불도 하나도 없고 이불도 다니면 몸덩이밖에 없으니까 이불도 없고 집도 안 빌려주고 하니까. (왜 그런 얘기를 가족들에게 자식들에게도 못하셨는지 그걸….) 지금은 하려고, 부끄러워가지고 창피해가지고 나 안 했어요. (창피하다고요? 왜 뭐가 창피하세요? )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 창피해가지고 난….]
◇앵커> 할머니도 손녀, 손자들한테 이런 얘기를 못 했다고 하고요.
◆인터뷰> 못했다는 거죠.
◇앵커> 왜냐하면 폭도로 그냥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70년대 그리고 80년대 저희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이 사건은 그냥 항쟁이라는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고요. 4.3사태, 폭동 이렇게 규정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4.3사건으로. 그러니까 항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폭동이라고 보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폭동이라고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터뷰> 오늘도 그렇게 얘기를 했죠.
◇앵커> 역사적 해석이 좀 달라지는 이유. 그리고 왜 지금까지도 규명 안 됐을까요?
◆인터뷰> 정치적인 관점의 문제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79년에 현기영 작가 이 4.3 사건을 드러나는 소설을 하나 씁니다. 순이 삼촌이라는 것인데 삼촌은 진짜 삼촌이 아니고 제주사람끼리는 일가뿐 아니고 동네 주민들이 다 삼촌, 삼촌 부르는데 순이 삼촌은 놀랍게 또 여성입니다. 그 집안의 이야기가 풀려나오거든요. 그 이야기가 최근에도 김대중 정부 때 그 섬에 가고 싶다, 최근 2013년의 기슬, 이런 독립영화들이 나와서 계속 사건을 알리는데 아직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이게 정치적인 사건이 이념적으로 얽혀 있어서 90년대까지도 4.3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좀 불순하게 여겼던 제주도민들은 이것을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 왜냐하면 또 일가가 일가를 서로 죽여야 했던 역사가 묻어있거든요.
◇앵커> 그렇죠. 같은 주민들끼리 벌어진 일이거든요.
◆인터뷰> 그런데 제주 안에서는 이 문제를 애시당초에 다 화해하고 용서하고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때도 화해와 치유 문제를 이때 언급하고 이때 대대적으로 처음으로 조사를 한 거예요. 실태 상황을 조사했고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이 최초로 가서 2006년에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4.3위령제에 참석해서 이 문제는 국가가 잘못한 일이다라고 사과를 합니다. 이게 첫 번째고요.
오늘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를 다시 한 번 함과 동시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고 화해 치유를 해야 한다. 제주도 내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잘잘못은 가리지 말자. 다만 이것을 용서하고 화해하자. 그런데 이때 완전히 잘못된 게 뭐냐 하면 미군정 보고서를 보면 제주도민의 70%가 좌익이다, 이렇게 단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해안선에서 5km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처단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영화를 보면 학교 운동장에 주민들 다 모아놓고 중간에 선을 쭉 긋습니다. 좌익은 왼쪽, 우익은 오른쪽. 그래놓고 사살을 하게 되는데 아이들은 뭣 모르고 운동회 하는지 모르고 뛰어놀다가 총 맞고 이런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좀 당시의 제주도민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정치색이 투철한 사람은 몇이나 됐다고 전체 도민들을 색깔로 분류했던 아주 나쁜 사건이죠.
◇앵커> 가장 안타까운 사건이 그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모르는 일반 제주도민들이 이념 갈등의 희생양이 됐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그게 사실은 그 당시에 8.15 광복 이후에 우리나라 정부 수립 6.25, 6.25이후까지 그때까지 10년이 혼란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이념의 잣대로 갈라서 하는 부분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좀 제주도민들이 많이 희생된 가슴 아픈 역사이고. 다만 4.3사건에 대해서 완벽하게 정리가 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두 단계로 나눠서 진압 과정에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모르는제주도민들이 정말 불쌍한 양민들이 희생된 것, 그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그 사건의 촉발했던 그 부분이 홍준표 대표가 얘기했던 남로당의 어떤 우리 5.10총선거를 방해하는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민중의 항쟁인지 그런 폭동과 항쟁, 그 사건의 출발점에 대한 해석에 대한 다툼은 아직은 그것은 좀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 진행: 정찬배 앵커, 장민정 앵커
■ 출연: 최영일 시사평론가, 김태현 변호사
◇앵커> 제주 4.3 사건은 5.18 민주화 운동이나 4.19 혁명보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기도 하는데 어떤 사건이었고 왜 이 사건만 사건이라고 칭하는지 설명을 해 주시죠.
◆인터뷰> 워낙 길었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런데요. 이게 민주화 운동은 아닙니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해방 직후에 벌어진 혼란의 역사인데요. 제주 4.3 사건 이렇게만 부르고 있죠. 47년 3.1에 일이 터집니다. 그런데 45년에 해방되고 나서 제주 도민들이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많았는데 이게 정치적인 이유라기보다 일제 때 부역했던 경찰들이 군정 경찰이 됐어요.
◇앵커> 친일파들이 다시 돌아온 거죠.
◆인터뷰> 친일파들이 공권력을 행사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민심이 안 좋았죠. 그러다 47년 3월 1일에 기마 경찰에 의해서 3.1절 행사를 구경하던 어린이가 밟혀서 다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주민들이 화가 나서 돌멩이를 던졌는데 폭동이다라고 판단하고 경찰들이 발포해서 6명이 사망합니다. 이때부터 1년간 민심이 소용돌이치다가 48년 4월 3일 새벽에 이번에는 무장대라고 하는 좌익 청년들이 우익 인사들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져요. 이러면서 좌우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정부 차원에서 엄혹한 탄압이 시작된 겁니다. 좌익 색출이라는 명목 하에 양민 학살이 굉장히 지속적으로 벌어지는데 54년 9월에야 이 사태가 끝나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무장대라고 이야기하는 좌익청년들이 끝까지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데 이들의 수는 불과 60여 명이었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계속 군대가 가면서 토벌을 한 결과 제주도민들의 10분의 1의 인구 1만 4000명이 공식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는데 공식 집계 이외에도 지금까지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유가족들의 사정들을 우리가 돌아보면 더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앵커> 2만 7000이다, 3만이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인터뷰> 한 2배 이상 될 것이다라는 추정이 있고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찰도 140명, 군인도 180명 전사자들이 나왔고요. 그러니까 이거는 문재인 대통령 말씀처럼 편협한 이념격돌 속에서 죄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사건입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제주도민들이 당시에 좀 좌익단체를 중심으로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었어요. 그러니까 또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이다라는 차원에서 탄압이 벌어지고 이 사이에 또 6.25전쟁이 벌어진 과정에는 또 공비토벌이다라고 해서 토벌이 벌어지고 굉장히 아픈 역사가 제주에서는 오랫동안 지속됐던 그런 사건입니다.
◇앵커> 그래서 그 당시만 하더라도 가족 중의 한 사람만 없어도 어디에 갔냐, 대답을 잘 못 하면 한라산에 마치 빨치산 항쟁하듯이 올라가듯 숨어 있는 거다라고 하면서 가족들까지 다 학살을 합니다. 그 일을 겪었던 당시 11살 소녀가 있었죠.
◇앵커> 국가의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도 받지 못했는데요. 피해자 할머니의 목소리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홍춘호 / 4·3사건 생존자 (MBC라디오 '양지열의 시선집중') : 그때는 그렇게 숨어 살아난 사람들 서귀포 가서 영창 생활 몇 개월 동안 하면서 배고픈 생각, 석방. 한가을 들어가니까 우리 사람들 다 석방시키대요. 석방시키니까 이제 갈 데 없고 하니까 우리도 안덕면 소재지에 왔어요. 소재지에 오니까 안덕면 사람들 우리 폭도라고 집도 안 빌려줍니다. 폭도라고 집도 안 빌려주고 집도 그냥 살지 못하고 이불도 하나도 없고 이불도 다니면 몸덩이밖에 없으니까 이불도 없고 집도 안 빌려주고 하니까. (왜 그런 얘기를 가족들에게 자식들에게도 못하셨는지 그걸….) 지금은 하려고, 부끄러워가지고 창피해가지고 나 안 했어요. (창피하다고요? 왜 뭐가 창피하세요? )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 창피해가지고 난….]
◇앵커> 할머니도 손녀, 손자들한테 이런 얘기를 못 했다고 하고요.
◆인터뷰> 못했다는 거죠.
◇앵커> 왜냐하면 폭도로 그냥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70년대 그리고 80년대 저희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이 사건은 그냥 항쟁이라는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고요. 4.3사태, 폭동 이렇게 규정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4.3사건으로. 그러니까 항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폭동이라고 보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폭동이라고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터뷰> 오늘도 그렇게 얘기를 했죠.
◇앵커> 역사적 해석이 좀 달라지는 이유. 그리고 왜 지금까지도 규명 안 됐을까요?
◆인터뷰> 정치적인 관점의 문제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79년에 현기영 작가 이 4.3 사건을 드러나는 소설을 하나 씁니다. 순이 삼촌이라는 것인데 삼촌은 진짜 삼촌이 아니고 제주사람끼리는 일가뿐 아니고 동네 주민들이 다 삼촌, 삼촌 부르는데 순이 삼촌은 놀랍게 또 여성입니다. 그 집안의 이야기가 풀려나오거든요. 그 이야기가 최근에도 김대중 정부 때 그 섬에 가고 싶다, 최근 2013년의 기슬, 이런 독립영화들이 나와서 계속 사건을 알리는데 아직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이게 정치적인 사건이 이념적으로 얽혀 있어서 90년대까지도 4.3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좀 불순하게 여겼던 제주도민들은 이것을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 왜냐하면 또 일가가 일가를 서로 죽여야 했던 역사가 묻어있거든요.
◇앵커> 그렇죠. 같은 주민들끼리 벌어진 일이거든요.
◆인터뷰> 그런데 제주 안에서는 이 문제를 애시당초에 다 화해하고 용서하고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때도 화해와 치유 문제를 이때 언급하고 이때 대대적으로 처음으로 조사를 한 거예요. 실태 상황을 조사했고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이 최초로 가서 2006년에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4.3위령제에 참석해서 이 문제는 국가가 잘못한 일이다라고 사과를 합니다. 이게 첫 번째고요.
오늘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를 다시 한 번 함과 동시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고 화해 치유를 해야 한다. 제주도 내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잘잘못은 가리지 말자. 다만 이것을 용서하고 화해하자. 그런데 이때 완전히 잘못된 게 뭐냐 하면 미군정 보고서를 보면 제주도민의 70%가 좌익이다, 이렇게 단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해안선에서 5km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처단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영화를 보면 학교 운동장에 주민들 다 모아놓고 중간에 선을 쭉 긋습니다. 좌익은 왼쪽, 우익은 오른쪽. 그래놓고 사살을 하게 되는데 아이들은 뭣 모르고 운동회 하는지 모르고 뛰어놀다가 총 맞고 이런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좀 당시의 제주도민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정치색이 투철한 사람은 몇이나 됐다고 전체 도민들을 색깔로 분류했던 아주 나쁜 사건이죠.
◇앵커> 가장 안타까운 사건이 그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모르는 일반 제주도민들이 이념 갈등의 희생양이 됐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그게 사실은 그 당시에 8.15 광복 이후에 우리나라 정부 수립 6.25, 6.25이후까지 그때까지 10년이 혼란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이념의 잣대로 갈라서 하는 부분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좀 제주도민들이 많이 희생된 가슴 아픈 역사이고. 다만 4.3사건에 대해서 완벽하게 정리가 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두 단계로 나눠서 진압 과정에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모르는제주도민들이 정말 불쌍한 양민들이 희생된 것, 그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그 사건의 촉발했던 그 부분이 홍준표 대표가 얘기했던 남로당의 어떤 우리 5.10총선거를 방해하는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민중의 항쟁인지 그런 폭동과 항쟁, 그 사건의 출발점에 대한 해석에 대한 다툼은 아직은 그것은 좀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