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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 가수
[앵커]
오늘 공감토크 초대손님은 데뷔 30년을 맞은 라이브의 황제이자 또 나눔과 기부에 앞장서고 있는 분이죠. 보컬의 신입니다. 가수 이승철 씨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원래 연말이면 바쁘시지만 올해 연말은 특히 바쁘시다고 하던데요. 해외공연 준비하고 계시다고요?
[인터뷰]
올해 12월부터 투어가 시작이 돼서 내년 월드투어까지 쭉 연결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월드투어라고 하면 어느 나라 가시는 건가요?
[인터뷰]
일단 1월 4일에 밴쿠버, 그다음에 1월 8일, 9일 이틀 동안 토론토 그리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멜번, 뉴질랜드 그다음에 미국, 중국 다 포함이 되어 있죠.
[앵커]
데뷔 30년을 맞은 공연이기 때문에 더 뜻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인터뷰]
30주년,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막상 소감이 어떠세요, 감회가 어떠세요라고 여쭤보시면 그때쯤 조금 시간 참 빠르다라는 생각이 좀 들고요.
무엇보다 우리 막내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데서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앵커]
공연에 가면 기억에 남는 부분이 다 다르겠지만 제가 지난 연말에 공연을 갔다왔는데 공연이 끝나고 이승철 씨가 팬들이 다 나갔는데도 계속 손을 흔들면서 무대에 서 계시더라고요. 그게 왜 그러신 건가요?
[인터뷰]
공연장에 오시면 팬분들에게 배웅하는 느낌이고요. 처음에는 우연치 않게 공연장이 끝나면 몇 천 명이 한 번에 나가시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해요.
그래서 그 위험을 방지해 보자. 그러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내가 무대에 계속 남아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천천히 나가시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10분에서 15분 정도 손을 계속 흔드는데 그 모습을 계속 보시고 감동받으신 글들이 많이 올라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이게 진정한 팬서비스 같다.
[앵커]
이승철 씨가 국민가수에서 애국가수라는 수식어까지 얻었습니다. 독도에서 탈북청소년들과 노래도 불렀고요. 그리고 긴 기간 동안 다큐멘터리도 찍어서 상까지 받으셨죠. 탈북청소년들과는 인연이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인터뷰]
우연히 저를 찾아왔고요. 그 친구들이 본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만들어 주시고 그걸 독도에서 부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독도냐라고 했더니 한국과 함께 늘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해요.
독도와 위안부, 이 두 가지의 이슈에 대해서는 항상 같은 목소리를 내는데. 그래서 독도에 너무 가 보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갔죠.
[앵커]
다큐멘터리를 이승철 씨 자비로 찍었다고 해서 더 큰 화제가 됐습니다.
[인터뷰]
준비를 하고 다큐멘터리를 해야 하는데 그냥 저희 집사람이 이 친구들을 너무 도와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시작부터 한 거죠. 하다 보니까 후원도 받지 못하고 일단 날짜는 다가오고 하니까 나중에 받지 뭐, 사비로 냈다가. 어쨌든 좋은 결과가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앵커]
탈북 청소년들과 독도송을 부를 때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인터뷰]
어떻다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가슴 뭉클함이 밀려와요. 그리고 독도도 3대가 덕을 쌓아야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날씨가 안 좋은 섬인데 저희는 너무나 운이 좋게 아주 파도도 잔잔한 그때 들어가서 노래하고 합창 부르고. 그 독도라는 곳은 저희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있는 그런 섬인 것 같아요.
[앵커]
그때는 감동이 컸지만 막상 일본에 가려다가 입국거부를 당했을 때는 많이 속상했을 것도 같은데요, 그때는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인터뷰]
저희가 부른 노래는 사실 독도에 대한 노래는 아니죠. 평화에 대한 노래죠. 그날이라는 노래가 세계평화를,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자는 노래였는데 일단 독도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연예인들은 리스트에 올라가고 입국거부를 당하는 경우가 꽤 있죠. 그런 부분들이 안타깝고 아쉬웠고 밝혀진 것이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한일관계가 좀 정상화가 돼서 그런 것들이 녹듯이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됐으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앵커]
많은 분들이 데뷔 30주년이시니까요. 예전부터, 어릴 때부터 이승철 씨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있지만 요즘 젊은 세대 같은 경우에는 이승철 씨 하면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기억하는 친구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은 어떤 경험이었을까요, 이승철 씨에게.
[인터뷰]
제가 아주 젊어지는 기분이었어요. 무엇보다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하고 싶은데 부모님의 반대나 개인사정으로 인해서 음악을 포기해야 되는 친구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등불이 되어 줄 수 있는 멘토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는 것에 뿌듯했고 행복했고요.
우리가 그럼으로서 그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오디션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그 원조 프로그램이 성공을 하면서 이런 공정한 기회를 통해서 가수 데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많은 성공적인 사례도 있지만 최근에는 미리 좀 짜고 하는 게 아니냐, 이런 의혹도 제기가 됐고요.
논란이 좀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인터뷰]
짜고 할 수가 없죠. 그건 짜고 할 수는 없고 심사위원의 취향과 시청자들의 취향이 다를 수는 있죠. 그렇지만 그건 철저하게 그렇게 만들어질 수가 없고요, 상황 자체가. 그리고 특히나 현장 심사, 톱10에 올라가면 현장에서 점수를 주는데 서로가 어떻게 점수를 주고 이런 합의가 되지 않거든요.
미리 누가 되는 것, 그런 것은 할 수가 없어요. 그건 큰일나죠.
[앵커]
가장 기억에 남거나 애착이 가는 지원자가 있다면 어떤 사람을 꼽을 수 있을까요?
[인터뷰]
울랄라세션의 임윤택 군이 아까웠어요. 세상을 먼저 떠났지만 그 울랄라세션을 보면서 그 팀의 브레인과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떠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친구와 얘기하다 보면 이 친구가 왜 이제 와서 발견이 됐을까 할 정도로 굉장히 아이디어도 많고 센스도 있고 감각도 좋은 친구였던 것 같아요.
[앵커]
전세대에 걸쳐서 팬분들이 앉아서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럴 수 있는 가수가 우리나라에 몇 명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승철 씨 콘서트가 더 특별한 이유가 콘서트장에 가면 나눔에 동참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콘서트 수익을 아프리카 차드 학교 짓는 데 기부하셨죠? 지금 몇 개 학교까지 지어진 것인가요?
[인터뷰]
지금 5개 정도 지었고요. 제가 처음에 차드를 가게 된 이유가 박용하 군이 먼저 시작한 학교를 개교식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나서 제가 대신 개교식을 하러 갔다가 너무 감동을 받아서 제 마음속으로 앞으로는 내 자신이 10년간 여유있게 학교를 짓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그다음에 한국에 오자마자 모든 투어의 중요한 하이라이트는 차드가 메인이 된 거죠. 그래서 매년 학교를 하나씩 짓고 있고. 요새 가보면 첫 번째 졸업생이 나왔어요.
[앵커]
벌써 졸업생이 나왔군요. 차드의 한 아이를 집에서 돌봐주신 적도 있다고 하던데요?
[인터뷰]
눈이 어렸을 때 잘못 비벼서 감염이 돼서 한쪽 눈은 퇴화가 되고 한쪽눈은 눈 밖으로 튀어나왔어요.
그건 뇌신경하고 연결이 돼있기 때문에 차드하고 우리나라가 수교는 되어 있었는데 그때 비자 같은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그런 지역이었는데 그때 대통령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시고 해서 그 아이를 한국에 와서 차병원에서 한쪽 눈은 적출을 하고 한쪽눈은 시신경이 뇌와 연결이 돼 있으니까 여기는 좀더 지켜 보자고 해서 그건 놔뒀는데 지금은 아주 건강하게 잘 학교를 다니고 있고 저희 집에서 3개월 정도 있다가 완치가 돼서 갔죠.
그래서 지금 맹인학교 다니고 있어요.
[앵커]
많은 분들이 왜 라이브의 황제 이승철 씨가 나눔과 기부에 이렇게 올인을 하게 됐는지 큰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런 게 궁금할 것 같아요.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인터뷰]
저는 결혼과 종교, 가족과 종교가 저를 계속 그렇게 좋은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어느 인터뷰를 보니까 결혼을 퍼펙트 초이스라고 표현을 하셨던데요. 아내분의 어떤 부분이 이승철 씨 인생에 빛이 됐다고 볼 수가 있을까요?
[인터뷰]
음악하는 사람들은 좀 이기적이죠. 결혼을 하면서 창작의 고갈 같은 것에 대해서 두려움도 좀 느끼고. 그런 것들을 전혀 느끼지 않게 해 주는 사람. 결혼생활도 안정적으로 하게 되고 또 가정도 안정적으로 되니까 음악도 오히려 더 잘 되고. 결혼해서 히트곡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이 나왔던 것 같아요.
[앵커]
결혼 하고 잘 된 연예인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이승철 씨가 뽑히지 않습니까?
[인터뷰]
많은 분들이 잘됐다고 하던데요. 제 주위에도 결혼하는 분들이 많은데 정말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죠. 공연을 하나 만들어도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부인과 상의를 하고 의상도 같이 골라 주고 하니까 아무래도 큰 힘이 돼죠.
[앵커]
그리고 예쁜 딸 원이도 있잖아요.
[인터뷰]
딸은 정말 최고의 보물이고요.
[앵커]
원이가 요즘 노래에 소질을 보인다고요, 아빠 닮아서, 그런 얘기가 있던대요.
[인터뷰]
요즘이 아니고 원래 노래를 잘하고요. 원이는 지금도 기분이 좋으면 눈 떠서 잘 때까지 노래를 해요. 그리고 음악하는 것 정말 좋아하고 흥도 많고 끼도 많고.
[앵커]
원하면 가수 시켜주실 건가요?
[인터뷰]
저는 하게 되면 제대로 가르치고 싶어요. 그래서 이론부터 해서 피아노까지. 이제는 중국말도 가르쳐야.
[앵커]
해외진출까지 생각하시는군요?
[인터뷰]
중국말 중요하죠.
[앵커]
이승철 씨 음악인생에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하셨는데 재산 1호 가운데 하나, 팬분들을 빼놓을 수가 없잖아요. 30년 동안 이승철 씨를 지켜준 분들인데요.
팬분들 지금 이승철 씨 인생에 어떤 의미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
핵잠수함급의 에너지가 아닐까요? 저를 지금까지 만들어주시고 지금까지 에너지 있게 활동하게 만들어주신 거고요.
[앵커]
이번 주말이 이승철 씨 생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인터뷰]
내일이.
[앵커]
많은 팬분들과 시간을 함께 보낸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미리 팬분들의 인사를 좀 담아와 봤습니다.
[인터뷰]
그래요?
[앵커]
네, 함께 보시죠.
[인터뷰]
일단 노래하고요. 오빠의 눈 봤을 때, 처음 눈을 봤을 때 거의 빠져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인터뷰]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갑자기 눈에 하트 뿅뿅 생기면서.
[인터뷰]
지금에 와서 오빠가 키가 더 클 수도 없는 것이고, 사실은. 그러니까 다만 건강하셔야지 노래를 오래 할 수 있으니까 오빠가 건강하시기를 바라고요.
[인터뷰]
30년, 40년 더 롱런하는 가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빠, 사랑합니다.
[앵커]
어떻게 보셨습니까?
[인터뷰]
저희 팬클럽이 이름이 새침떼기인데요. 처음에는 귀여웠는데 지금은 민망하기는 하네요. 민망한 팬클럽 이름이기는 하죠. 한 27년 정도 됐는데 이제는 팬클럽 회장이 노안이 올 정도로 세월이...
[앵커]
팬클럽 회장이 노안까지 올 정도로 긴 시간을.
[인터뷰]
저랑 회의를 하면 둘이 돋보기 끼고. 얼마나 행복해요.
[앵커]
고맙게도 오늘 케이크도 보내주셨습니다.
[인터뷰]
이 앞에 써 있는 글씨가 정말 감동인 것 같아요.
[앵커]
함께 한 30년, 함께 할 30년.
[인터뷰]
정말 한과 할. 딱 한 단어씩인데도 느낌이 아주 감동적이네요. 너무 고맙네요.
[앵커]
팬들이 카드도 보내주셨어요. 제가 잠시 읽어드릴게요. 오빠, 생신 축하드립니다. 무한 응원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난생처음 오빠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봤어요. 이렇게 삼행시를 지어주셨는데 운을 좀 띄워주시죠.
[인터뷰]
이.
[앵커]
이 시대의 최고의 가수인.
[인터뷰]
승.
[앵커]
승철오빠의 노래와 인간성을.
[인터뷰]
철.
[앵커]
철썩같이 믿고 끝까지 따라다닐게요. 정말 감동의 카드가 아닐까 싶은데요. 함께 한 30년이고요. 함께 할 30년. 앞으로도 하실 일이 정말 많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30년은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으신가요?
[인터뷰]
그러면 80이란 얘기인데. 어쨌든 무슨 노래를 하는 것보다 항상 이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항상 이 자리에서 노래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앵커]
지금까지 라이브의 황제, 이승철 씨와 즐거운 시간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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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오늘 공감토크 초대손님은 데뷔 30년을 맞은 라이브의 황제이자 또 나눔과 기부에 앞장서고 있는 분이죠. 보컬의 신입니다. 가수 이승철 씨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원래 연말이면 바쁘시지만 올해 연말은 특히 바쁘시다고 하던데요. 해외공연 준비하고 계시다고요?
[인터뷰]
올해 12월부터 투어가 시작이 돼서 내년 월드투어까지 쭉 연결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월드투어라고 하면 어느 나라 가시는 건가요?
[인터뷰]
일단 1월 4일에 밴쿠버, 그다음에 1월 8일, 9일 이틀 동안 토론토 그리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멜번, 뉴질랜드 그다음에 미국, 중국 다 포함이 되어 있죠.
[앵커]
데뷔 30년을 맞은 공연이기 때문에 더 뜻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인터뷰]
30주년,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막상 소감이 어떠세요, 감회가 어떠세요라고 여쭤보시면 그때쯤 조금 시간 참 빠르다라는 생각이 좀 들고요.
무엇보다 우리 막내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데서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앵커]
공연에 가면 기억에 남는 부분이 다 다르겠지만 제가 지난 연말에 공연을 갔다왔는데 공연이 끝나고 이승철 씨가 팬들이 다 나갔는데도 계속 손을 흔들면서 무대에 서 계시더라고요. 그게 왜 그러신 건가요?
[인터뷰]
공연장에 오시면 팬분들에게 배웅하는 느낌이고요. 처음에는 우연치 않게 공연장이 끝나면 몇 천 명이 한 번에 나가시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해요.
그래서 그 위험을 방지해 보자. 그러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내가 무대에 계속 남아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천천히 나가시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10분에서 15분 정도 손을 계속 흔드는데 그 모습을 계속 보시고 감동받으신 글들이 많이 올라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이게 진정한 팬서비스 같다.
[앵커]
이승철 씨가 국민가수에서 애국가수라는 수식어까지 얻었습니다. 독도에서 탈북청소년들과 노래도 불렀고요. 그리고 긴 기간 동안 다큐멘터리도 찍어서 상까지 받으셨죠. 탈북청소년들과는 인연이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인터뷰]
우연히 저를 찾아왔고요. 그 친구들이 본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만들어 주시고 그걸 독도에서 부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독도냐라고 했더니 한국과 함께 늘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해요.
독도와 위안부, 이 두 가지의 이슈에 대해서는 항상 같은 목소리를 내는데. 그래서 독도에 너무 가 보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갔죠.
[앵커]
다큐멘터리를 이승철 씨 자비로 찍었다고 해서 더 큰 화제가 됐습니다.
[인터뷰]
준비를 하고 다큐멘터리를 해야 하는데 그냥 저희 집사람이 이 친구들을 너무 도와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시작부터 한 거죠. 하다 보니까 후원도 받지 못하고 일단 날짜는 다가오고 하니까 나중에 받지 뭐, 사비로 냈다가. 어쨌든 좋은 결과가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앵커]
탈북 청소년들과 독도송을 부를 때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인터뷰]
어떻다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가슴 뭉클함이 밀려와요. 그리고 독도도 3대가 덕을 쌓아야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날씨가 안 좋은 섬인데 저희는 너무나 운이 좋게 아주 파도도 잔잔한 그때 들어가서 노래하고 합창 부르고. 그 독도라는 곳은 저희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있는 그런 섬인 것 같아요.
[앵커]
그때는 감동이 컸지만 막상 일본에 가려다가 입국거부를 당했을 때는 많이 속상했을 것도 같은데요, 그때는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인터뷰]
저희가 부른 노래는 사실 독도에 대한 노래는 아니죠. 평화에 대한 노래죠. 그날이라는 노래가 세계평화를,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자는 노래였는데 일단 독도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연예인들은 리스트에 올라가고 입국거부를 당하는 경우가 꽤 있죠. 그런 부분들이 안타깝고 아쉬웠고 밝혀진 것이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한일관계가 좀 정상화가 돼서 그런 것들이 녹듯이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됐으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앵커]
많은 분들이 데뷔 30주년이시니까요. 예전부터, 어릴 때부터 이승철 씨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있지만 요즘 젊은 세대 같은 경우에는 이승철 씨 하면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기억하는 친구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은 어떤 경험이었을까요, 이승철 씨에게.
[인터뷰]
제가 아주 젊어지는 기분이었어요. 무엇보다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하고 싶은데 부모님의 반대나 개인사정으로 인해서 음악을 포기해야 되는 친구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등불이 되어 줄 수 있는 멘토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는 것에 뿌듯했고 행복했고요.
우리가 그럼으로서 그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오디션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그 원조 프로그램이 성공을 하면서 이런 공정한 기회를 통해서 가수 데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많은 성공적인 사례도 있지만 최근에는 미리 좀 짜고 하는 게 아니냐, 이런 의혹도 제기가 됐고요.
논란이 좀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인터뷰]
짜고 할 수가 없죠. 그건 짜고 할 수는 없고 심사위원의 취향과 시청자들의 취향이 다를 수는 있죠. 그렇지만 그건 철저하게 그렇게 만들어질 수가 없고요, 상황 자체가. 그리고 특히나 현장 심사, 톱10에 올라가면 현장에서 점수를 주는데 서로가 어떻게 점수를 주고 이런 합의가 되지 않거든요.
미리 누가 되는 것, 그런 것은 할 수가 없어요. 그건 큰일나죠.
[앵커]
가장 기억에 남거나 애착이 가는 지원자가 있다면 어떤 사람을 꼽을 수 있을까요?
[인터뷰]
울랄라세션의 임윤택 군이 아까웠어요. 세상을 먼저 떠났지만 그 울랄라세션을 보면서 그 팀의 브레인과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떠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친구와 얘기하다 보면 이 친구가 왜 이제 와서 발견이 됐을까 할 정도로 굉장히 아이디어도 많고 센스도 있고 감각도 좋은 친구였던 것 같아요.
[앵커]
전세대에 걸쳐서 팬분들이 앉아서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럴 수 있는 가수가 우리나라에 몇 명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승철 씨 콘서트가 더 특별한 이유가 콘서트장에 가면 나눔에 동참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콘서트 수익을 아프리카 차드 학교 짓는 데 기부하셨죠? 지금 몇 개 학교까지 지어진 것인가요?
[인터뷰]
지금 5개 정도 지었고요. 제가 처음에 차드를 가게 된 이유가 박용하 군이 먼저 시작한 학교를 개교식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나서 제가 대신 개교식을 하러 갔다가 너무 감동을 받아서 제 마음속으로 앞으로는 내 자신이 10년간 여유있게 학교를 짓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그다음에 한국에 오자마자 모든 투어의 중요한 하이라이트는 차드가 메인이 된 거죠. 그래서 매년 학교를 하나씩 짓고 있고. 요새 가보면 첫 번째 졸업생이 나왔어요.
[앵커]
벌써 졸업생이 나왔군요. 차드의 한 아이를 집에서 돌봐주신 적도 있다고 하던데요?
[인터뷰]
눈이 어렸을 때 잘못 비벼서 감염이 돼서 한쪽 눈은 퇴화가 되고 한쪽눈은 눈 밖으로 튀어나왔어요.
그건 뇌신경하고 연결이 돼있기 때문에 차드하고 우리나라가 수교는 되어 있었는데 그때 비자 같은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그런 지역이었는데 그때 대통령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시고 해서 그 아이를 한국에 와서 차병원에서 한쪽 눈은 적출을 하고 한쪽눈은 시신경이 뇌와 연결이 돼 있으니까 여기는 좀더 지켜 보자고 해서 그건 놔뒀는데 지금은 아주 건강하게 잘 학교를 다니고 있고 저희 집에서 3개월 정도 있다가 완치가 돼서 갔죠.
그래서 지금 맹인학교 다니고 있어요.
[앵커]
많은 분들이 왜 라이브의 황제 이승철 씨가 나눔과 기부에 이렇게 올인을 하게 됐는지 큰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런 게 궁금할 것 같아요.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인터뷰]
저는 결혼과 종교, 가족과 종교가 저를 계속 그렇게 좋은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어느 인터뷰를 보니까 결혼을 퍼펙트 초이스라고 표현을 하셨던데요. 아내분의 어떤 부분이 이승철 씨 인생에 빛이 됐다고 볼 수가 있을까요?
[인터뷰]
음악하는 사람들은 좀 이기적이죠. 결혼을 하면서 창작의 고갈 같은 것에 대해서 두려움도 좀 느끼고. 그런 것들을 전혀 느끼지 않게 해 주는 사람. 결혼생활도 안정적으로 하게 되고 또 가정도 안정적으로 되니까 음악도 오히려 더 잘 되고. 결혼해서 히트곡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이 나왔던 것 같아요.
[앵커]
결혼 하고 잘 된 연예인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이승철 씨가 뽑히지 않습니까?
[인터뷰]
많은 분들이 잘됐다고 하던데요. 제 주위에도 결혼하는 분들이 많은데 정말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죠. 공연을 하나 만들어도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부인과 상의를 하고 의상도 같이 골라 주고 하니까 아무래도 큰 힘이 돼죠.
[앵커]
그리고 예쁜 딸 원이도 있잖아요.
[인터뷰]
딸은 정말 최고의 보물이고요.
[앵커]
원이가 요즘 노래에 소질을 보인다고요, 아빠 닮아서, 그런 얘기가 있던대요.
[인터뷰]
요즘이 아니고 원래 노래를 잘하고요. 원이는 지금도 기분이 좋으면 눈 떠서 잘 때까지 노래를 해요. 그리고 음악하는 것 정말 좋아하고 흥도 많고 끼도 많고.
[앵커]
원하면 가수 시켜주실 건가요?
[인터뷰]
저는 하게 되면 제대로 가르치고 싶어요. 그래서 이론부터 해서 피아노까지. 이제는 중국말도 가르쳐야.
[앵커]
해외진출까지 생각하시는군요?
[인터뷰]
중국말 중요하죠.
[앵커]
이승철 씨 음악인생에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하셨는데 재산 1호 가운데 하나, 팬분들을 빼놓을 수가 없잖아요. 30년 동안 이승철 씨를 지켜준 분들인데요.
팬분들 지금 이승철 씨 인생에 어떤 의미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
핵잠수함급의 에너지가 아닐까요? 저를 지금까지 만들어주시고 지금까지 에너지 있게 활동하게 만들어주신 거고요.
[앵커]
이번 주말이 이승철 씨 생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인터뷰]
내일이.
[앵커]
많은 팬분들과 시간을 함께 보낸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미리 팬분들의 인사를 좀 담아와 봤습니다.
[인터뷰]
그래요?
[앵커]
네, 함께 보시죠.
[인터뷰]
일단 노래하고요. 오빠의 눈 봤을 때, 처음 눈을 봤을 때 거의 빠져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인터뷰]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갑자기 눈에 하트 뿅뿅 생기면서.
[인터뷰]
지금에 와서 오빠가 키가 더 클 수도 없는 것이고, 사실은. 그러니까 다만 건강하셔야지 노래를 오래 할 수 있으니까 오빠가 건강하시기를 바라고요.
[인터뷰]
30년, 40년 더 롱런하는 가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빠, 사랑합니다.
[앵커]
어떻게 보셨습니까?
[인터뷰]
저희 팬클럽이 이름이 새침떼기인데요. 처음에는 귀여웠는데 지금은 민망하기는 하네요. 민망한 팬클럽 이름이기는 하죠. 한 27년 정도 됐는데 이제는 팬클럽 회장이 노안이 올 정도로 세월이...
[앵커]
팬클럽 회장이 노안까지 올 정도로 긴 시간을.
[인터뷰]
저랑 회의를 하면 둘이 돋보기 끼고. 얼마나 행복해요.
[앵커]
고맙게도 오늘 케이크도 보내주셨습니다.
[인터뷰]
이 앞에 써 있는 글씨가 정말 감동인 것 같아요.
[앵커]
함께 한 30년, 함께 할 30년.
[인터뷰]
정말 한과 할. 딱 한 단어씩인데도 느낌이 아주 감동적이네요. 너무 고맙네요.
[앵커]
팬들이 카드도 보내주셨어요. 제가 잠시 읽어드릴게요. 오빠, 생신 축하드립니다. 무한 응원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난생처음 오빠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봤어요. 이렇게 삼행시를 지어주셨는데 운을 좀 띄워주시죠.
[인터뷰]
이.
[앵커]
이 시대의 최고의 가수인.
[인터뷰]
승.
[앵커]
승철오빠의 노래와 인간성을.
[인터뷰]
철.
[앵커]
철썩같이 믿고 끝까지 따라다닐게요. 정말 감동의 카드가 아닐까 싶은데요. 함께 한 30년이고요. 함께 할 30년. 앞으로도 하실 일이 정말 많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30년은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으신가요?
[인터뷰]
그러면 80이란 얘기인데. 어쨌든 무슨 노래를 하는 것보다 항상 이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항상 이 자리에서 노래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앵커]
지금까지 라이브의 황제, 이승철 씨와 즐거운 시간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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