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토크] 매일 부활하는 남자_그룹 '부활' 리더 김태원

[공감토크] 매일 부활하는 남자_그룹 '부활' 리더 김태원

2016.01.15. 오후 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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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원, 그룹 '부활' 리더

[앵커]
공감토크 오늘 초대 손님은 예능을 통해 많은 시청자와 만나고 또 감성적인 노래로 록음악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분이죠. 최근에는 음악으로 또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그룹 부활의 리더입니다.

김태원 씨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반갑습니다.

[앵커]
지난해 연말이 바쁘셨습니다. 부활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했는데요. 이렇게 30년을 맞는 그룹이 우리나라에 몇 개 없죠?

[인터뷰]
다소 슬픈 이야기지만 시나위가 86위고요. 들국화가 85 그리고 많이 지금도 알려지려고 노력하는 팀이 하나있는데 블랙홀이라는 팀은 그 팀도 한 28~29년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부활이 있습니다.

[앵커]
30년의 시간동안 우여곡절이 많았고 부활 그룹에. 30년을 돌이켜 봤을 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리자면 어떤 순간이었을까요?

[인터뷰]
3분의 2는 힘들었다고 봐야죠.

[앵커]
3분의 2면 20년은 힘든 시간이었을까요.

[인터뷰]
그것도 조금 넉넉하게 잡은 겁니다. 사실 저는 93년도나 87년도나 어려웠던 포인트들이 있는데 그 포인트들이 그 당시에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게 지나고 나니까 제가 쓰는 곡의 가사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려웠지만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음악을 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냥 힘든 자체도 굉장히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앵커]
그룹 이름처럼 부활을 거듭할 수 있었던 건 주옥같은 노래들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지금까지의 노래들, 참 많았지만 그 중에 한 곡을 뽑자면 부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곡. 어떤 곡을 꼽을 수 있을까요?

[인터뷰]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정확히 10년에 한 곡씩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생각하냐 하면 90년대에는 사랑할수록이라는 노래가 있었고 2002년도에는 네버엔딩스토리가 있었고 그리고 제가 만든 곡은 아니지만 80년대에는 희야가 있었고. 굳이 말씀을 드린다면 1993 사랑할수록 이죠.

[앵커]
어떤 점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곡으로 꼽으신 건가요?

[인터뷰]
사랑할수록이란 음악은 그 친구와 제가 너무 처절했을 때 너무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부활의 존폐위기나 기로에 있을 때 만든 곡이라 그리고 또 그 노래를 녹음하다가 돌아가셨고.

그러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그게 의미가 노래라는 것이 사람들이 그 가수가 의미를 담으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다는 어떤 예를 보여준 음악이 아닌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앵커]
어떤 기억이 가장 많이 나십니까?

[인터뷰]
일단 이 사진을 제 와이프가 찍었어요. 그러니까 제 와이프의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눈빛이 완전 남자답지 않습니까, 정말로?

만약에 저 친구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금일에도 모르겠지만 아마 꽤 오랫동안 저와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마치 박완규 씨처럼 헤어졌어도 헤어진 것이 아닌 헤어졌어도 늘 그 친구가 그리운데. 이승철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그 모든 보컬들이 부활의 역사잖아요. 그 역사 중에 어떤 한 역사를 뗄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왜냐하면 그거는 왜곡이니까.

[앵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승철 씨와는 어떤 인연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인터뷰]
이승철 씨가 저를 표현한 말이 하나있습니다. 뭐냐했냐 하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옛 연인같다. 그런 말을 방송에서.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약간 제가 오해를 했는데 그럴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앵커]
그래도 이승철 씨와 김태원 씨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희야는 1986 이고 네버엔딩스토리라는 명곡이 탄생한 것이 아닙니까?

[인터뷰]
희야, 네버엔딩은 2002 아닙니까? 그 2002에도 부활의 기로에 서 있었거든요. 거의 절벽에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렇게 전화를 저한테 할 지는 몰랐죠. 그런 미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고요.

[앵커]
부활 30년 오는 동안 리더로서의 모습도 많이 바뀌셨을 것 같은데 지금 멤버들에게는 어떤 리더의 모습이십니까?

[인터뷰]
지금 멤버들한테도 여전히 모자란 리더예요. 그러니까 시행착오가 많고.

[앵커]
부활의 현재와 미래를 김태원 씨와 함께 해 준 멤버들인데 저희가 미리 멤버들에게 김태원 씨에게 한 말을 조금 들어봤습니다. 함께 들어보시죠.

[서재혁 / 베이시스트 : 태원이 형 요즘 감자탕 많이 드시고 계신데 동생들을 위해서 다른 메뉴도 드셔주셨으면 좋겠고요. 제가 꼭 다른 것을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형의 건강을 위해 골고루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갔으면 좋겠습니다. 화이팅!]

[김동명 / 보컬리스트 : 형님이 부활의 30주년 기념 앨범곡 작업을 하시는데 30년 동안 부활을 이끌어오시면서 그렇게 고뇌하시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참 정말 존경스럽고 멤버를 떠나서 정말 존경스럽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채제민 / 드러머 : 태원이 형. 건강하세요. 형이 서서 기타쳐야 우리도 삽니다. 건강하게 40년, 50년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태원 화이팅!]

[앵커]
왜 감자탕만 드십니까, 요즘?

[인터뷰]
위가 좋지 않아서 감자탕은 씹을 필요가 없잖아요. 녹잖아요, 입에서. 그런데 열량이 많은 단점이 있는데. 하여튼 먹고는 살아야 되니까. 메뉴를 바꾸겠습니다.

[앵커]
국민할매여서 이가 안 좋으신 건지.

[인터뷰]
이를 너무 관리를 안 하고 살았어요. 이게 병원을 가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겁이 많아요.

[앵커]
국민 할매가 상표등록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맞는 건가요?

[인터뷰]
네. 지금 생각은. 그때는 제가 이제 음악을 하는 시기가 너무 어려웠던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너무 힘들면 그 상표로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에서 그랬는데.
[앵커]
일종의 수입원 이유도 있었던 거네요.

[인터뷰]
특히 그룹 음악은 미래를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아이돌이 아니기 때문에...

[앵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김태원 씨 정도면 음원 수입이 상당할 것이다. 이렇게 예측을 하기 때문에 그런 수입원 마련이 필요할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인터뷰]
그런데 그것은 다소 오해인 경우가 많습니다. 음원은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그렇게 외국처럼 그렇게 뮤지션을 위한 사이즈가 아닙니다.

[앵커]
액수가 상당히 적은 건가요?

[인터뷰]
적죠. 그렇죠. 저작권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것도 요즘 잘 나가는 작곡가들 분들처럼 매년 히트곡을 치지 않으면 그러면 줄어듭니다, 점점.

[앵커]
요즘에는 예능프로그램에서 아들 우현 군과 나오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현의 모습을 티브이에서 보면 요즘에 보면 상당히 밝아졌더라고요.

[인터뷰]
몇 년 사이예요. 그러니까 아버지라는 사람의 역할이 분명히 있는 건데 제가 그 역할을 못했던 거죠. 최근에 그 방송을 하면서 많이 친해졌죠.

[앵커]
어떤 노력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우현이가 드럼을 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대에 세워보자 하는 제가 노력을 했는데 무대에 선 모습을 보고 제가 반한 거예요. 너무 놀란 거예요. 저 친구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듯한, 아빠로서. 그게 너무 미안하니까 제가 달라지기 시작했죠.

[앵커]
우현이가 그림 소질도 상당하던데요?

[인터뷰]
네. 그 친구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악기하고 보컬.

[앵커]
보니까 마이크 잡고 있는 그림도 있고. 음악이 거의 대부분의 소재네요.

[인터뷰]
맞습니다. 자기 스스로 그런 사이트에서 80년대 90년대의 록음악을 많이 봐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저는 아시다시피 음악을 잘 안 듣기 때문에 제가 음악을 들어서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앵커]
우현이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분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실테고 이번에 우현이가 밝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점을 강조하고 싶으십니까? 어떤 게 이렇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십니까?

[인터뷰]
김우현이 2000년도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현재 이 상황이 없습니다. 무척 고통스러운 날도 있었지만 제가 노래를 만들고 제 와이프가 크리스천에 빠지고 그리고 와이프가 최근에 책을 썼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책을 쓰고 이런 운명들이 불행한 줄만 알았던 아이의 탄생으로 쭉 ~축복으로 바뀌어가는 그 무엇이 있거든요.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아이한테 그런 미래를 만날것을 확신하셔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우현 군이 조금 전에 그림에서 음악소재로 그림을 그린 걸 볼 수 있었는데 딸 서현 양도 음악적 소질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보컬을 맡고 있죠?

[인터뷰]
지금 싱어송라이터로 작사, 작곡, 노래까지. 자기가 만든 노래도 자기가 부를 수 있는 거죠. 그게 음악이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가 겪었던. 우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그가 갑자기 소외되고 이런 가슴 아픔을 그것으로 음악을 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앵커]
언젠가 따님이 부활의 보컬로도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서현 양이 보내온 영상메시지 잠깐 보시죠.

[김서현 / 딸 : 아빠, 항상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일을 해 주고 우리를 위해서 항상 일어나주고 우리를 위해서 활동도 해 주는데 그 감사함을 지금도 100% 느끼는 건 아니겠지만 여태까지 못 느껴서 많이 미안했어. 그리고 항상 지금 많이 모자라지만 열심히 일하는 딸이 될게. 사랑해.]

[이현주 / 아내 : 늘 저를 외조를 해 주는 남편. 내가 내조해 주는 것보다 신랑이 저의 외조를 많이 해 주거든요. 저를 믿고 지원해 줘서 고맙고 사랑해.]

[인터뷰]
미 투.

[앵커]
어떤 존재일까요? 김태원 씨에게, 아내분은?

[인터뷰]
제가 모든 것을 잃어도 나를 버리지 않을. 그것을 역사로 보여줬습니다. 늘 죽을 때까지 갚는 맛으로 삽니다. 갚으려고 하고 그게 부부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뭐랄까... 영원히 서로 지켜주는. 영원히,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녀를 지키는. 그게 제가 태어나서 한 일 중에 아마 가장 가장 자랑스럽다고 생각을 하고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앵커]
서로를 영원히 지켜준다는 그 강한 사랑이 오늘날의 부활의 30년 역사를 만들지않나 싶은데요. 아내분 덕분에 요즘에는 나눔을 많이 실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큰 돈도 기부하셨는데 나눔을 실천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인터뷰]
과거에는 팀이 흥하면 그걸 서로 나누기 바빴는데 이제는 부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느낌을 우리 첫 공연을 기부를 하자. 그래서 대전의 살리시오에서 집을 짓는데 그래서 그때 수익 1억원 정도를 아마 다 기부를 했죠. 그 집이 완공될 겁니다.

[앵커]
부활 30년의 3분의 2가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부활을 지켜오셨습니다. 그리고 음악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오셨는데요. 많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꿈을 좇다가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그런 말 좀 전해 주시죠.

[인터뷰]
누군가를 위해서 말을 하고. 그렇게 말을 아름답게 하면 그 말대로 된다고 하는 것을 저는 믿어요.

그래서 저는 30년 전에 기타를 치기 전에는 그 바로 전에는 굉장히 불량학생이었어요, 제가. 그런데 기타를 치면서 스스로가 제 자신한테 말을 좋게 하자, 아름다운 말만 하자. 이런 생각으로 사실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레슨 결과 제 자신을 레슨시킨 거죠. 크게 이상한 단어나 이런 것이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그게 음악의 자산이거든요.

[앵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만 하는 게 중요하시다는 거죠.

[인터뷰]
그렇죠. 그리고 남을 위해서 좋은 말을 하고.

[앵커]
김태원의 열정이라면 부활, 앞으로의 30년이 저는 기대가 되는 것 같아요.

[인터뷰]
30년이면 제가 80살... 제가 흰머리를 휘날리며 제가 기타를 치겠습니다.

[앵커]
저는 계속 박수를 보내겠습니다.

[인터뷰]
저도 굉장히 팬입니다. 늘 보고 있습니다.

[앵커]
지금까지 부활의 김태원 씨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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