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가장서 장관 거쳐 상아탑 수장, 김동연 아주대 총장

소년 가장서 장관 거쳐 상아탑 수장, 김동연 아주대 총장

2016.06.16. 오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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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연 / 아주대 총장

[앵커]
오늘 저희 뉴스인이 초대한 분은 김동연 아주대 총장입니다. 최근에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 영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살면서 이렇게 양심적이고 맑은 사람은 처음이었다라면서 김동연 총장을 단수 후보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려고 시도를 했었는데 본인이 결국 고사해서 못했다라는 발언을 한 것이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저희가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
별 말씀을요.

[앵커]
지금 아주대 총장 재직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인터뷰]
1년 5개월 정도 됐습니다.

[앵커]
그래서 대학과 약속 때문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지 못하겠다고 고사하셨다면서요?

[인터뷰]
제가 다만 1년 5개월 정도 밖에 안 됐고 학교에서 할 일도 많고 또 벌려놓은 일도 많고 또 학생들과 약속한 것도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제가 일을 더 하는 것이 맞는 처사라고 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앵커]
그래서 오늘 학교 얘기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앵커]
유쾌한 반란이라고 얘기를 하신다고 하는데요. 특히 해외에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학점이나 이런 걸 따지지 않고 해외에 보내서 연수를 하는 그 사업을 작년부터 하셨다면서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애프터 유라고 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애프터 유는 영어로 다른 사람에게 당신 먼저, 양보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학생들, 주로 소득 분위 5분위. 해외 취업을 할 수 없는 학생들, 그런 학생들을 뽑아서 미국에 3개 대학, 예를 들면 미시간대학, 존스홉킨스대학 이런 대학과 중국의 상해교통대학, 저희가 보내주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뽑을 때 성적 이런 걸 보지 않고 왜냐하면 성적을 보면 대개 소득하고 비례를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전혀 성적을 보지 않고 실제 생계 수준과 본인의 의지만을 가지고 뽑아서 이번 여름에도 121명을 지금 보낼 계획에 있습니다.

[앵커]
작년에도 보내셨고요?

[인터뷰]
작년에도 100명을 보내셨습니다.

[앵커]
100명 보내셨군요? 다른 학교 학생들도 포함이 돼 있다면서요?

[인터뷰]
그중에 20%를 우리는 타학교 학생을 뽑습니다.

[앵커]
무슨 취지로?

[인터뷰]
저희가 외국 펀딩을 해서 저희가 이것을 하게 된 취지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시혜적으로 도와주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너무 양극화가 심하고 또 사회적 이동이 어려운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계층 이동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주대학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에 확산시켰으면 좋겠다라는 측면에서 타교 학생을 20%을 뽑아서 장학금을 같이 줘서 보내고 있습니다.

[앵커]
얼마 동안 보내시는 겁니까?

[인터뷰]
한 달 보냅니다.

[앵커]
한 달 동안이요? 갔다오면 학생들이 뭐라고들 합니까?

[인터뷰]
갔다와서는 굉장히 많이 변해 옵니다. 제가 얘기를 하는 것이 두 가지 면에서 눈빛이 변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하는데 하나는 꿈을 가지고 도전을 했으면 좋겠다. 두 번째는 남에 대한 배려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런 얘기를 하는데 갔다 온 학생들이 넓은 세상을 봤고 꿈을 찾게 됐고 정말 용감하게 도전을 하게 됐다는 식으로 많이 바뀌고요. 두 번째는 그런 장학금을 바깥에서 많은 분들이 사회적 이동 취지에 찬성을 해서 참여를 해 주셨기 때문에 학생들 대부분이 자기도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남에게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렇게들 얘기를 하고 있어서 정말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앵커]
그 재원을 그러니까 뜻있는 분들이 그 학생들을 위해서 기부를 하는 걸로 그걸로 보내시는 거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학교 예산을 쓰게 되면 다른 쪽 사업에 지장을 받기 때문에 애초부터 이것은 바깥에 있는 분들로부터 이 사업 취지로 그런 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시도록 해서 금액의 다과에 불문하고 있습니다마는 100만 원의 기적이라는 구호를 가지고 한 분당 100만 원 기준으로 쭉 모금을 했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취지에 찬성하셔서 참여를 해 주셨습니다.

[앵커]
총장님도 누구보다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셨기 때문에 그 학생들 보시는 눈이 아마 좀 남다르실 것 같고 굉장히 애틋한 마음이시겠네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학생들이 많고요. 특히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거의 대부분이 요건도 참 안 좋은 학생들입니다. 그런데 갔던 미시간 대학이나 존스홉킨스대학에서도 어려운 학생들이라고 들었는데 학생들이 이렇게 밝을 수가 있나 하는 반응들이 있었고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 학생들이 그렇게 밝고 자기 꿈을 키우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마음이 뿌듯하고요. 이런 것들이 단순히 우리 아주대학생뿐만 아니고 다른 학교 또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해서 이런 계층이동이 되는 사회가 되도록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앵커]
총장님이 아이디어 내신 건가요, 애프터 유가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파란학기제라는 것을 시행을 하신다고 하는데 학생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정해서 그걸 한 학기 동안 하면 그걸 학점으로 인정을 해 주시는 거라면서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지금 학교에서는 교수들이 쭉 과목을 제시하고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하게 되어 있는데 제가 그것에 반대되는 시도를 해 본 것이죠. 그래서...

[앵커]
반란이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반란입니다. 뒤집어 엎는 것인데. 그래서 학생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 자기가 하고 싶은 활동을 가지고 제가 과목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제시를 하면 학교에서 심사를 해서 자기주도성, 창의성 그다음에 학문적 가치 이런 걸 따져서 인정을 해 주게 되면 과목으로 인정을 받고 학생들이 학점을 따는 것인데. 이번 학기에 42개 과목이 만들어졌고 120명의 학생들이 참여를 해서 얼마 전에 발표회까지 잘 마쳤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학생들이 만든 거군요, 42개 과목을?

[인터뷰]
그렇습니다. 과목을 보면 학교나 교수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과목들이 많이 나오고요. 예를 들면 어떤 학생들은 대학생 자동차 경주대회를 국제대회가 있는데 거기에 출품하는 자동차를 설계부터 제작까지 해서 출품을 하겠다라는 학생들도 있었고요. 또 어떤 학생들은 세계 최초로 수화를 가지고 장애인들에게 심리상담을 해 주는 과목을 자기네가 만들겠다고 해서 만들었는데 이걸 만든 취지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는 그런 뜻입니다. 많은 청년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잘 모릅니다. 대개는 정해진 스펙, 정해진 틀에 매여 있는데 그걸 벗어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그런 도전과 시도를 해 봐라. 그리고 가능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봐라라는 취지에서 해봤는데 아주 결과가 좋습니다.

[앵커]
그러면 한 학기 동안 그것만 몰두하면 다른 건 다 해결되는 겁니까?

[인터뷰]
아닙니다. 학점을 3학점부터 18학점까지 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8학점을 따는 학생은 그 과목을 가지고 한 학기를 다 하는 거고요. 3학점 따는 학생은 3학점만큼 하고 나머지는 또 학교 수업을 듣는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참여하는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자기 학점보다 보통 학교에서 듣는 과목의 3배 정도 시간을 투자한다고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니까요.

[앵커]
이것도 총장님이 아이디어를 내신 겁니까? 파란학기제, 파란이 파랗다는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인터뷰]
파란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아주대학교 색깔이 파란색입니다. 그래서 파란이 있고요. 두 번째로는 한자로 알을 깬다는, 깨트릴 파에 알 란 자를 해서 다음 단계로 가자는 뜻이 있고 세 번째로는 우리 너무나 틀에 박힌 교육을 시키는 우리 대학 사회에 파란을 일으켜보자 해서 좀 여러 가지 중의적으로 그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앵커]
총장님이 1968년에 11살 때, 그때 아버님께서 그 전까지는 꽤 유복한 가정이었는데 아버님께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별세를 하셨고 그래서 사실상 소년가장이 되신 건가요, 그때?

[인터뷰]
아버지께서 그때 33살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32살이셨는데 그때부터 제가 소년가장이 됐다기보다 그때는 어머니께서 정말 고생을 하셨고요. 제가 실질적으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고,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17살 때부터 소년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앵커]
동생들이 세 분이시고요?

[인터뷰]
그때는 어머니와 할머니.

[앵커]
고3때 부터 모셨고. 그래서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청계천의 무허가 판자촌으로 가셨다면서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11살 때지만 그런 갑작스러운 환경변화 그리고 내가 그걸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시던가요?

[인터뷰]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청계천 그때 무허가 판자촌으로 쫓기듯이 갔고요. 또한 2년 뒤에는 그게 철거가 돼서 지금은 성남시입니다마는 그당시 경기도 광주의 허허벌판에 강제이주를 당해서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너무 어렸을 때니까 특별한 생각이 있다기보다는 많이 힘들었죠. 그리고 맏이고 동생들이 있고 어머님, 할머님이 있었으니까 빨리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그런 책임감은 많이 있었지만 뾰족한 수는 없이 힘든 시간을 보냈었죠.

[앵커]
자칫하면 그렇게 갑자기 환경이 변하면 좀 비뚤어질 수도 있고 원망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런 마음은 안 드셨습니까?

[인터뷰]
들었죠. 그때도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뭔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었고 그렇지만 비뚤어진 생각은 들지는 않았지만 뭔가 거기서 일탈을 했으면 하는 생각은 했었습니다마는 홀로 힘들게 가족을 책임지시는 어머니라든지 할머니 뵐 때마다 제가 빨리 열심히 뭔가를 해야 되겠다는 그런 책임감이 오히려 강했다고 볼 수 있겠죠.

[앵커]
그래서 아까 말씀을 하신 고3 때, 그당시 덕수상고, 가난한 집 수재들이 많이 가는 학교였죠?

[인터뷰]
수재라기보다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앵커]
그래서 덕수상고를 졸업하기 전에 서울신탁은행? 한국신탁은행에 입행을 해서 그때부터 또 주경야독을 하시면서 그때 고시공부를 하셨다면서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은행 생활을 했는데 그때 만 17살이었고요. 그러다가 타오르는 갈증이 있어서 이게 뭘까 하다가 야간 대학을 제가 지원을 해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낮에는 직장생활, 밤에는 대학생활을 하던 중에 우연한 기회에 고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 고시공부를 시작하게 돼서.

[앵커]
쓰레기통에서 고시 잡지를 선배가 버린 것을 보셨다면서요?

[인터뷰]
네, 어느 선배 방에 놀러갔다가 나오는데 책을 많이 버려놓으셨더라고요. 그래서 무심코 한 권 집어들고 나왔는데 보니까 그게 고시잡지였어요. 과목을 보면 그래서 이거 한번 해 보면 어떨까 해서 그때부터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저녁에 대학 다니고 밤에는 고시공부를 하고 그런 생활을 20대 초반에 했었죠.

[앵커]
그게 말이 그렇지, 보통 노력으로 그렇게 해서 고시를 패스를 한다는 것은... 더더군다나 2개를 하셨던데 입법고시, 행정고시를 같은 해에 하셨던데 그게 사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저희가 듣기로는 덕수상고 출신의 고시 합격하신 분 중에서도 직장생활 계속 하시면서 고시 합격한 분은 총장님밖에 없다고 하시던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겁니까, 어떻게 노력을 하셨길래?

[인터뷰]
열심히 했죠. 제가 말씀드리기 조금 부끄럽습니다마는. 그때는 이 세상 누구도 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했으니까 정말 열심히 했고요. 그리고 생활도 단순화시키고 시간관리도 철저히 하고 그런 생활을 하면서 했고요. 저희 고등학교 출신 중에 고시 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고 다만 저는 집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중간에 직장을 그만 두지 못하고 끝까지 하면서 공무원 발령 받는 날 은행을 그만 뒀기 때문에 은행 그만둔 날짜하고 공무원 시작한 날짜하고 같은 날짜입니다.

[앵커]
그게 몇 년도입니까?

[인터뷰]
82년도입니다.

[앵커]
1982년도군요? 잠도 거의 못 주무시고 공부를 하신 건가요?

[인터뷰]
잠을 안 잔 건 아니고요. 자기는 잤죠, 많이 줄였죠. 줄이고 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것보다는 조각난 시간들을 많이 이용을 했고요. 그다음에 시간 관리에 있어서는 특히 내가 온전히 쓸 수 있는 내 시간의 확보, 거기에 신경을 많이 써서 처음에 2시간부터 시작해서 3시간, 4시간 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훈련을 많이 했는데 너무 오래된 얘기입니다.

[앵커]
그래서 드디어 공무원이 되셨는데 그 당시에 경제기획원, 지금 기획재정부죠. 거기는 원래부터 아주 엘리트주의가 있는 곳들이고 경기고, 서울대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고 그분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 데에서 상고, 야간대학교 국제대 나오셔서 거기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텐데 거기서 계속 요직을 다 맡으셨단 말입니다. 그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인터뷰]
글쎄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앵커]
본인 입으로 하시기에 조금 어려운 얘기죠?

[인터뷰]
어려운 얘기고 제가 과분하게 제 실력이나 자질에 비해서 과분한 중요한 자리를 많이 했고 또 대학까지 오게 됐죠. 다만 앵커께서 질문하신 취지에 맞는 답이라면 젊었을 때, 어렸을 때 어려웠던 환경이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어떻게 보면 결핍의 힘이죠. 그런 결핍이 절실함을 만들고 그런 절실함에서 비롯된 꿈, 열정 그런 것들이 제게 큰 자양분이 됐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그 당시 젊었을 때 어려웠던 시절을 저는 위장된 축복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많이 어렵거든요. 누구나 다 어렵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여러분이 축복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어려움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극복하고 노력을 하면 삶이 그만큼 크는 것이고 그런 얘기를 하는데 아마 그런 것들이 제게도 좋은 영향을 많이 미치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위장된 축복이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또 어떤 표현으로는 축복은 때로는 고통의 모양의 탈을 쓰고 찾아오기도 한다라고 말을 하시기도 하셨는데요. 아마 젊은이들 입장에서는 그렇지만 환경이 다르지 않느냐. 그때는 급속하게 우리가 성장하는 시대였고 그래서 기회들이 많이 열려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사회가 많이 안정돼 있고 그래서 젊은이들이 그렇게 기회를 찾기가 노력을 하더라도 어렵다, 그런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것 같거든요. 어떤 얘기들을 해 주십니까?

[인터뷰]
맞습니다. 지금 정확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지금 청년들이 제가 만약에 제 어렸을 때를 얘기를 하게 되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총장님은 그때 상업학교 나오셔도 은행 들어가셨잖아요,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지금 학생들 취업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늘 학교에 와서 느끼는 것 중 하나인데 기성세대,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가 또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많은 분들이 반성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회적인 인센티브를 만들었고 교육도 그렇게, 저희도 그렇게 학생들을 키워오고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세팅을 만들어준 것이죠. 그래서 우리 학생들의 탓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많은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 학생들도 멋을 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자기의 길을 찾아야 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떤 열정과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 힘들게 축복이 고통이라는 탈을 쓰고 자기 얼굴에 찾아오죠. 얼굴에 딱 덮어씁니다. 그 탈을 깨트리는 것은 결국 자기가 할 일이거든요. 그래서 그 탈을 깨뜨리고 고통의 탈, 역경의 탈 뒤에 있는 보석처럼 빛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라, 이런 얘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앵커]
지금 젊은이들이 많은 역경들을 겪고 있지만 총장님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그것보다는 대체로 낮겠죠. 그러니까 아마 총장님한테는 그런 말씀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쨌건 그 뒤에 경제 관료로 승승장구를 하시다가 기획재정부 차관 때 2012년에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께서도 그때 무상보육을 공약을 하셨을 때고, 여당 후보가. 야당에서도 또 경쟁적으로 무상보육을 비롯한 무상복지 내놓을 때인데 그때 차관이, 경제관료가 재벌집 손자도 무상보육하는 게 맞는 일은 아니다라는 발언을 아주 이례적으로 드렸단 말입니다. 더더군다나 정권 교체 직전에. 장관하시고 싶은 생각이 없으셨습니까, 그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셨죠?

[인터뷰]
믿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장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없었고요, 그때는 제가 국가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자리에 있었고요. 그 당시가 이번 말고 지난번 총선 전입니다. 각 당에서 선거공약으로 특히 복지 공약을 많이 제시를 하셨는데. 저희가 그걸 분석을 쭉 해서 이런 것들이 우리 재정이 과연 감내할 수 있는지 짚어봐야 되겠다 하는 것 하나 있었고요.

두 번째는 복지든 교육이든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이런 것들의 일에 대해서는 철학과 비전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국가가 관료가 하는 복지의 방향은 무엇이고 그것을 뒷받침할 철학은 무엇인지가 중요한데 많은 경우에 그런 철학과 우리가 나아갈 비전보다는 마이크로한 프로젝트를 줄거냐 말거냐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정치권에서 얘기하는 공약의 규모가 공약을 달성하는 규모가 실제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들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여러 가지 과정이 있을 것이다. 무상보육 관련해서는 조금 우리가 그런 것을 감안해서 얘기를 해야 되겠다는 얘기를 했던 것이었는데 나름대로 재정을 지키는 책임자로서 제가 속에 있는 얘기를 했다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앵커]
어쨌건 나는 이 얘기를 해야 되겠다는 책임감, 정의감 같은 것이었군요?

[인터뷰]
그 정도라기보다도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될 그런 당연한 책무였었죠.

[앵커]
그런데 결국 나중에 장관으로 발탁되셨단 말입니다, 국무조정실장으로.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어깨가 무거웠고요. 평상시에 제 생각 중 하나가 공직자로서 가장 불행한 공직자가 자기 몸보다 큰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이 옷이 내게 맞는 옷인지 또 국무조정실장은 일을 하는 것에 따라서 국정의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있는 자리라서 제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해야 될지라는 것에 대해서 책임감을 많이 느꼈고요. 하는 내내 늘, 공직 생활 32년을 했는데요. 하면서 갖고 있는 소망 중의 하나가 제가 물러날 때도 아는 공무원이 되고 싶다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한 1년 반 정도 국무조정실장을 하다가 이제 제가 물러날 때다. 제 마음, 내면에서 이제는 물러날 때다 하는 목소리를 들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사의를 표하고 운 좋게 이렇게 공직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앵커]
총장님께서 자주 하는 말씀이 조금 전에 저희가 보여드렸습니다마는 나는 원망하기보다는 항상 다음 단계의 꿈을 꾼다. 그래서 상고 그다음에 야간대학 하셨고 그다음에 고시하셨고 이렇게 계속 꿈을 꿔오셨는데 그다음 단계, 지금 꾸시고 있는 꿈은 뭡니까? 혹시 정치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인터뷰]
지금 정치에는 관심도 없고요.

[앵커]
전혀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지금 학교 일도 바쁘고 또 제가 공직생활 중에 갖고 있었던 공직생활을 하는 이유는 사회변화에 대한 기여입니다.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는 모든 각계각층에서 다할 수 있는 것이죠. 공직자도 할 수 있고 정치인도 할 수 있고 우리 앵커님도 할 수 있는 거고 저는 지금 제 위치에서 제 학교, 제 위치에서 우리 학생들과 호흡을 하면서 좋은 교육을 시키고 그리고 정답이 아니라 자기 답을 찾는 그런 청년들을 길러내는 것이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의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여당의 비대위원장이니까 사실상 여당 대표직까지 제안을 받았던 분이시니까 정치에 입문하는 게 나쁜 일이 아니니까요. 또는 공직 오래하셨던 분이니까 총리도 한번 하실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던데요. 전혀 생각이 없습니까?

[인터뷰]
제가 우리 학생들에게 제일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학생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했는데 그 꿈의 모습이 아마도 명사가 아니라 동사일 것이다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명사는 대개 뭐가 되는 것이죠. 또는 직업이죠, 어떤 자리죠. 물론 젊었을 때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숙이 되고 많은 노력을 하게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동사 형태로 나타나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런 것이다. 아까 말씀드린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라든지 학생들에게 작은 예입니다마는 파란학기제를 통해서 정답이 아닌 자기 답을 찾는 도전을 해 봐라. 또는 애프터 유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런 기회를 줌으로써 보다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마음껏 네 꿈을 펼쳐봐라. 그리고 또 그런 도전을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어봐라, 이런 동사형의 꿈들이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영국 속담에 잔잔한 바다는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은, 우리 청년들은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 파도 치는 바다에 나가라. 거기에서 힘들게 노 젓는 연습을 하고 짠물도 먹고 물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물에 빠져도 다 건져줄 테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해봐라, 이런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꿈은 지금 제 위치에서 동사형의 형태로 제가 하고 싶은 사회변화에 대한 기여 그런 것들이 우리 교육이나 학생이나 또 아주대학교의 총장으로서 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맞는 일이 아닌가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앵커]
총장님, 마지막으로 아까 결핍이 나를 길렀다, 나의 동력이었다 말씀을 하셨는데 많은 경우에 그런 분들이 성공을 하더라도 야망에 불타거나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총장님에 대해서는 주위에서 맑고 순수하다는 평가를 많이 한 걸로 제가 들었는데 어떻게 그 마음을 지킬 수 있었는지 어떤 개인적인 성취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배려,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음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인지 그걸 좀 듣고 싶었습니다.

[인터뷰]
제가 맑고 깨끗하고 그런 사람은 아니고요. 다만 애프터 유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 어려운 학생들하고 대화를 하고 또 어렵지 않은 학생들도 보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되니까요. 아마도 제가 운이 많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어려웠던 과정에서 힘들게 살면서 없는 분들, 덜 가진 분들, 덜 배운 분들 이런 분들이 갖고 있는 가슴 속에 따뜻한 마음이라든지 또 일을 하면서 자리나 이런 명예보다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성취감,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성취감은 주어진 일이나 남이 시킨 일에는 잘 안 옵니다. 그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되거든요. 국장이든 차관이든 어떤 자리에 있든 자기 주어진 일 중에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할 때 그 순수성이 유지되는 것 같아요.

총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총장이니까 이런 일, 저런 일을 해야지 하는 의무감이 아니라 여기에서 제가 몸을 바쳐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찾아서 하게 되면 우선 진정성 있게 되고요. 열정을 갖게 되고 그러면 아마도 조금 사심 없이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맑고 깨끗한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런 것 같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김동연 아주대 총장을 모셔서 들었습니다. 총장님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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