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앵커]
최근 북한인권 실태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죠, ICC 회부를 골자로 하는 북한인권결의안 초안이 UN에서 협의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북한의 대표적인 인권사각지대죠.
북한의 수용소, 그 처참한 현실을 현실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우리나라 정보기관이 인정한 최장기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로 18호 관리소에서 13살 때부터 41살까지 무려 28년을 살았던 분이죠.
김혜숙 씨 나와 계시고요.
그리고 제15호 요덕관리소 출신 탈북자 북한전략센터 강철환 대표 두 분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안녕하세요.
그런데 수용소 얘기하기 전에 김정은이 지팡이를 치웠어요.
한동안은 다시 젊어지는 모양이죠?
30 되죠, 지금?
[인터뷰]
이제 30 됐죠.
[앵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나이 먹은 척 하고 다니더니 지팡이를 치웠어요.
[인터뷰]
그러니까 40일 동안 안 보일 때 뭔가 혈관계통에 문제가 있거나 고관절, 여러 가지 설들이 나왔는데 우리나라 국정원이 발표한 대로 발목 수술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발목 수술해서 아마 완치가 되니까 지팡이를 놓고 다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마 아직까지는 발목 외에는 다른 문제는 없는 걸로 저렇게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앵커]
발목에서 혹 떼어냈다.
[인터뷰]
발목이 접질러지면서 거기에 물이 차니까 그걸 좀 빼고 수술했다.
[앵커]
그집 식구들이 혹이 많아요.
김일성도 귀에 혹이 있고. 손주로 내려갈수록 점점 혹의 위치가 발목까지 내려갔나, 그건 모르겠는데,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강 대표한테 여쭤볼게요.
양강도에 있는 군사학교에 누가 인분을 누가 던진 모양이에요.
그런데 군사학교라는 게 일단 뭡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이제 뭐 군단단위로 소위 장교들 배출하는 사관학교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학교에 아마 누군가가 인분, 똥을 투척을 한 모양입니다.
요즘에 군부대가 워낙 식량공급이 안 돼서 민간으로 습격해가지고 돼지 훔쳐가고, 옥수수 훔쳐가고 거의 도적질로 살아가다보니까 이 군대 약탈에 정말 환멸을 느낀 인근 주민들이아마 이 똥이나 먹어라, 이런 식으로 해서 인분을 투척한 것 같아요.
[앵커]
군도 먹고 살기 힘들군요.
[인터뷰]
그러니까 제일 문제가 일반 주민들은 지금 어느 정도 시장화가 되어 있어서 자급이 되는데.
[앵커]
자급자족이군요.
[인터뷰]
인민들로 뺏어내서 분배를 해야 되는데 이게 잘 되지 않으니까, 지금 군대가 굉장히 어려운 상태거든요.
그래서 군량미를 얻으려면 중국이나 한국에서 쌀 같은 것을 받아야 되는데 그것도 안 되죠.
그러다 보니까 북한의 인민군대, 120만으로 보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굉장히 힘든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마 군부대가 있는 지역은 거의 쑥대밭이거든요.
그래서 아마 군부대를 상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총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마 누가 화풀이로 군관학교에서 똥이나 먹어라, 이런 식으로 갖다 확 뿌린 것 같습니다.
[앵커]
제가 할 얘기를 대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수용소 얘기도 좀 해 볼 텐데요.
우리 김혜숙 씨 같은 경우에는 13살부터 41살까지 그러면 탈북은 언제 하셨어요, 몇 년도에?
[인터뷰]
2009년도요.
[앵커]
우리나라에 오신 게 2009년.
[인터뷰]
네.
[앵커]
그러면 중국에도 중간에 계셨을 것 아닙니까?
[인터뷰]
중국에 2005년도에 팔려갔다가 2008년도에 또 체포돼가지고.
[앵커]
2008년도에 또 중국 공안에.
[인터뷰]
연길 식당에 팔려갔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내가 시켰어요, 돼지 사오라고, 그래서 북한에 넘어갔어요.
[앵커]
돼지 사러 넘어가셨구나.
[인터뷰]
넘겨 보내줬어요.
[앵커]
돼지값이 북한이 싼 모양이죠?
그때 중국돈 100위안 한 장에 북한에는 5만원 했어요.
그리고 중국에서 돼지 한 마리는 350원, 그러니까 저를 내보내서 돼지를 사러 갔다가 제가 잡혔어요.
그래서 제가 어디에 거주한 데가 없으니까 다시 18호 수용소로 끌려들어갔어요.
[앵커]
원래 18호 수용소.
제가 이거 잠깐 판넬을 보면서 저도 이걸 사실 잘 몰라요.
그래서 지금 우리 강철환 대표가 계셨던 데는 요덕이 어디 있어요?
[인터뷰]
요덕 수용소가 여기 15호수용소고요.
[인터뷰]
저는 18호.
[앵커]
여기네요.
그런데여기 18호 이 수용소에 계셨다가 13살에 들어가서 41살에 나오신 거죠?
[인터뷰]
42살에.
[앵커]
2002년도에 나와서 3년 동안 뭐하셨어요.
[인터뷰]
3년 동안 왔다갔다 했어요.
[앵커]
2005년에 탈북하셔서 다시 잡혔다, 그래서 다시 이리로 왔다 이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나오셨어요?
[인터뷰]
거기서 안전원들이 2명이 청진으로 왔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저를 회송해서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저를 그래도 중국땅이 아니고 돼지사러 넘어가서 무산에서 붙잡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좀 경계줬어요.
[앵커]
이 안에는 노동단련대도 있나 보죠?
[인터뷰]
노동교양소.
[인터뷰]
김혜숙 씨가 북창관리소에 있었는데 여기가 수용소가 굉장히 많았어요.
이 북창 지역에, 그러니까 약간 인민보위부 이런 일부 수용소가 해체가 되면서 그 지역에 아마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마 거기서 그 지역에 단련대로 갔던 모양인데요.
[앵커]
조금 더 제가 여쭤보는 게 2005년도에 탈북하셨죠?
그런데 2002년까지 여기 북창수용소에 있었단 말씀이시죠.
그러면 이 북창수용소에서 탈출하신 거예요?
[인터뷰]
아니에요.
탈출할 수가 없어요.
4m 높이의 철조망이 있고 그다음에 거기에는 3300헤르쯔의 전기가 흐르거든요.
전기소리가 들려요.
가까이 가면 휙 붙어서 타 죽게 만들어가지고 도망은 못 쳐요.
그래서 해제받고 2월 16일에 해제 받았어요.
[앵커]
강 대표님, 해제를 받으셨다고 하는데 지금 강대표님이 계신 데는 요덕이죠.
강 대표님도 한 10살인가 그때부터 계셨죠?
[인터뷰]
제가 77년부터 87년 사이에 한 10년 간 수감생활을 했는데요.
요덕수용소 같은 경우에는 구역이 2개로 분리가 되어 있었어요.
완전 통제구역, 거기는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아예 다 죽이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동안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올 수 있는 그런 지역이었죠.
저는 10년 만에 풀려나왔는데요.
[앵커]
이주구역에 계셨어요, 혁명구역에 계셨어요?
[인터뷰]
수용소마다 조금 명칭이 다르기는 한데요.
우리는 이주구역이라는 말을 안 썼어요.
안 쓰고 완전통제구역.
[앵커]
완전통제구역에 계신 거예요?
[인터뷰]
아니요.
혁명화 구역은 석방이 가능한 지역입니다.
[앵커]
그러면 북창도 역시 혁명화구역이라고, 잠시는 아니지만 있다가 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인터뷰]
그게 혁명화 합숙도 있어요.
독신들이니까 합숙을 지어놓고 울타리 쭉 채워넣고 합숙생들이 있어요.
[앵커]
그리고 김혜숙 씨가 있었던 데는 거기가 아니라.
[인터뷰]
저는 이주구역.
[앵커]
들어가면 못 나오시는데 나오셨잖아요.
[인터뷰]
아니, 북창 거기는 보위부 관리소가 아니라 안전관리소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집 안에 들어가면 김일성 초상화도 다 모시고 살아요.
그러니까 일만 잘하면 해제를 시켜준다 이런 게 있어요.
[인터뷰]
저게 뭐냐하면 정치범들만 있는데는 국가안전보위부가 관리하고 있고 저기는 인민보안부 산하인데요.
약간 정치적으로 연루가 되면서 강도가 센 사람들만 모아놓은 수용소가 또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완전한 정치범 수용소 형태는 아니고 조금 다른 형태죠.
그러니까 요덕수용소가 있는데 북창에도 완전정치범 수용소도 있고 약간 인민보안성산하가 관리하는 정치범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데가 또 있고요.
[앵커]
그런데 13살 때 가셨다면 부모님이 결국 잡혀가셔서 가신 것 아니에요.
부모님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으셨기에?
[인터뷰]
글쎄요, 저도 죄 모르고 잡혀갔어요.
[앵커]
죄도 모르고?
[인터뷰]
그래서 가족은 1970년 10월 28일날 들어갔고, 저는 아기 때부터 외할머니네 집에 가서 자랐어요.
[인터뷰]
그래서 5년 늦게 들어갔어요.
[앵커]
5년 늦게, 13살이니까, 부모님은 7살이나 8살에 잡혀가셨겠네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런데 왜 들어갔는지 아직도 모르세요?
[인터뷰]
들어가면 첫째 조항에 너희는 이유를 묻지 말라,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다죽였어요.
[인터뷰]
일단 수용소에 수감 시킬 때 가족까지 끌고 가는 경우는 일반 범죄하고 다른 경우거든요.
[앵커]
정치범.
[인터뷰]
그래서 이제 아마 내부재판을 하는데 이거 공개하지 않습니다.
살인자나 이런 사람들은 공개재판을 해서 다 알리는데 저런 저런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다 내부적으로 처리하다 보니까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알고자 하게 되면 그게 죄가 되는 것이죠.
[앵커]
그런데 김혜숙 씨 같은 경우에는 그렇다면 이 북창수용소 내부에서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이주구역은 못 나간다면서요.
뭐를 가지고 먹고 사셨어요?
농사 짓고?
[인터뷰]
농사 스스로 못 지어요.
[앵커]
그러면 뭘 먹고 살아요?
[인터뷰]
배급을 줘요.
배급을 주는데 우리가 7식구였었거든요.
7식구에, 아버지는 잡아갔어요.
보위부에서, 제가 죄가 뭔가 물어본다고 해서 잡아가서 아직 생사여부를 모르고 할머니 그다음 어머니, 우리 5형제, 그러니까 일곱 식구에서 한 달에 먹을 식량이 그저 강냉이 어떻게 건조했는지 젖어온 거 있잖아요.
그런 거 7kg 타다가 말리면 4kg 내지 4.5kg 돼요.
이걸로 7식구가 한 달 먹어야 돼요.
[앵커]
4kg 에서 4.5kg 을 7식구가 한 달을 먹는다, 어떻게?
물에 불려서 잡수세요?
[인터뷰]
아니, 물에 불리지 않아요.
우리 할머니가 집에 계시니까 멧돌에다가 갈아가지고 다 깨진 그런 주머니를 30개 만들어서 거기다 봉지에다가 가루를 넣어요.
이만한 봉지 하나가 하루 식량이에요.
그러니까 이거 도토리나무 잎사귀, 뭐 쓰고, 뭐 쓰고 다 뜯어다 제일 많이 제가 먹었다고 기억되는 것은 도토리나무 잎사귀예요.
그걸 쑤지는 않아요, 텁텁하지. 그러니까 끓는 물에다가 몇 번 우려내고 그걸 썰어요.
그것도 하루에 세 끼 다 못 먹어요.
하루에 한 끼 먹으면 잘 먹는 거예요.
[앵커]
지금 제가 또 하나 여쭤볼 것이 그런 것을 먹으면서 41, 42살에 계셨다는 거죠.
[인터뷰]
42살이요.
[앵커]
그렇게 생활하시면서, 일부에서 쥐도 잡아먹고 이렇다고 하는데 그건.
[인터뷰]
우리 남동생이 살았을 때, 제남동생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탄광에 깊숙히 들어가서 탄을 캐니까 그 속 안에 백쥐가, 해를 못 보니까 쥐가 이만한데 하얀색이에요.
그걸 어쩌다 한 번 잡아오면 털을 한번 쓱 그슬리고 그다음 그걸 물을 한가마에 넣고 끓이면 그래도 기름이 둥둥 뜨더라고요.
그걸 동생들 주고 저는 국물만 먹었는데도 달고 맛있었어요.
[앵커]
우리 강철환 대표도 그런 경험 하셨어요?
[인터뷰]
그러니까 수용소에서 쥐는 정말 고급식품이죠.
없어서 못 먹는 거고.
[앵커]
어렸을 때 그런 걸 먹는 거예요?
[인터뷰]
산쥐가 있다 보니까 특히 겨울에는 쥐들이 민간으로 내려오는데 이 쥐 덕분에 정치범들이 많이 살아요.
영양보충을 해야 되는데 쥐밖에 없으니까, 쥐를 잡아먹고 살고 있고, 뱀, 개구리, 도마뱀, 닥치는 대로 먹는 거죠.
그리고 수용소 안에 특별감옥이 있는데 이 감옥 안에 끌려가게 되면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요.
특히 68년도에 잉글랜드월드컵 때 박승진 선수가 요덕수용소로 끌려왔는데 훔쳐먹다가 이번에 감옥으로 또 끌려갔어요.
수용소 안 감독으로.
[앵커]
수용소 안에 감옥이 또 있어요?
[인터뷰]
안에 또 있어요.
가는 감옥이 있는데 거기에는 6개월만 있으면 앉은뱅이가 돼요.
다 썩어서 이분이 거기 끌려가서 3개월 동안 거의 죽다가 살았는데 그때 이분이 너무 배가 고프니까, 감옥에 눅눅한 습지에 사는 벌레들 있잖아요.
지네라든지 이런 쥐며느리 같은 것, 바퀴벌레, 이런 것들 잡아먹고 살아나왔어요.
그래서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제일맛있게 먹었던 벌레가 바퀴벌레였다, 이래 가지고 그분의 별명이 바퀴벌레가 됐거든요.
그러니까 그 정도로 열악한 거고 쥐는 고급식품이죠.
[앵커]
지금 사실 이것이 과장된 것이 아니냐라고 아마 많이 믿을, 우리나라 시청자분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실 거예요.
그런데 그런 생활을 28년을 하신 거죠.
[인터뷰]
그렇죠.
[앵커]
28년을 했는데 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그 안에서 결혼도 시킨다면서요?
어차피 못 나올 사람들을.
[인터뷰]
결혼을 시켜요.
[앵커]
그런데 왜 결혼을 시켜가지고 아이를 낳게 합니까?
이론적으로 따지면 정치범들 같은 경우에는 아예 애를 못 낳게하는 거 아니에요?
이거 왜 그렇죠?
[인터뷰]
탄광에 제가 16살 때 졸업해서 탄광에 배치 받았어요.
배치받으니까 소대에 23명이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사람이 다쳐서 죽고, 굶어 죽고 이렇게 하니까 8명이에요, 마지막에는.
그다음에 그래서가 아니라 남자 나이는 30살, 여자는 28세가 되면 결혼을 승인해 줘요.
그런데 나이가 됐다고 해서 무조건 승인해 주는 건 아니에요.
600명, 800명 되는 승인된 사람들 중에서 한 15명이 자료를 관리소에 올려요.
올려다가 내려온 기간이 6개월 걸리는 거예요.
거기서 또 탈락되는 것도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당선될 때는 5명이 당선됐댔어요, 합격으로.
그런데 10년 동안 지각 한 번 안 하고 정말 말 없이 일 잘하고 이런 모범 청년들로 선출해서 결론시키는데 가만히 생각해서 알고 보니까 탄광노동자들은 자꾸만 죽어나가지 노동자들을 생산할 방법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데서.
[앵커]
그것도 자체조달하는 거예요?
[인터뷰]
그렇죠, 그래서 아기들도 많이 낳으라고 그래요.
그런데 하나 낳아도 건사도 못 하고.
[앵커]
집에서 낳겠네요?
[인터뷰]
다 집이에요.
병원에 갈 생각 못 하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정치범 수용소가 초기에는 죽이는 목적이었는데 갑자기 북한 경제가 안 좋아지니까 수용소 경제가 생겨났어요.
그래서 이 수용소 경제에서 군수품도 나오고 별 거 다 나오거든요.
[앵커]
수용소 경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리고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각 수용소로 분산배치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지금 만탑산수용소, 그런 얘기가 보도가 되고 있는데 이 만탑산이 핵실험 하는 데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정확한 명칭은 길주군 풍계리 만탑산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만탑산 바로 가장 밑에 지하굴이 있는데 바로 이 굴이 핵실험장입니다.
그리고 지하굴 바로 앞에 화성수용소가 있어요.
[앵커]
만탑산수용소가 틀린 용어네요?
화상수용소.
[인터뷰]
만탑산수용소라는 건 없고 화성수용소에서 정치범들을 뽑아서 핵실험장으로 끌고 간 거죠.
그러니까 정치범이 사는 곳은 아니고 핵실험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동원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지 수용소는 아닙니다.
[앵커]
그러니까 결국 여기서 끌려간 사람들은 핵실험장에서 일을 하도록 이용을 당하겠군요.
[인터뷰]
왜냐하면 북한이 3차까지 핵실험을 했는데 북한 외부에서 핵실험장 건설에 동원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핵실험에 대한 정보가 완벽하게 통제가 됐죠.
그러니까 그만한 인력을 동원할 데가 없기 때문에 이 회룡수용소하고 청진수용소, 이 3개 수용소에서 2, 3만명을 뽑아서 핵실험장으로 끌고 간 거죠.
[앵커]
사실은 생체실험 비슷한 거예요.
[인터뷰]
그렇죠, 방사능에 오염돼서 죽는 거니까요.
[앵커]
우리 김혜숙 씨 같은 경우에 책을 내시고 그림 잠깐만 보여주시겠어요?
그림도 나오는 모양인데요.
화면에 그림 나오고 있습니다.
저 그림은 어떤 그림이에요?
[인터뷰]
저건 제가 탄광에서 일하는 그림이에요.
[앵커]
수용소 탄광에서, 저건 쉬는 그림입니까?
[인터뷰]
탄광에서 일하고 나와서 탈의실 같은 데서 저렇게 집에 안 가고 자다가 일하고, 이이 그림은 중앙당에 있던 사람이 탄광에 18호에 들어왔었어요.
[앵커]
좀아까 목매단 건?
[인터뷰]
아니, 교수형이에요.
제가 28년 살면서 교수형 2번 봤는데 하나는 여자, 그 여자는 미신 믿었다고 해서 교수형에 처했고요.
[앵커]
그렇군요.
교수형 2번 보시고, 총살형은?
[인터뷰]
총살형은 많아요.
몇 백번을.
[앵커]
그러면 굉장히 사람 죽는 모습을 많이 보셨겠네요?
공개처형하는거군요?
관리소에서 내일 한다 그러면 몇 월 말 공개공판 했었어요.
공개공판 그렇게 하고 장소는 대동강, 대동강이라는 게 공개총살하는 데니까 대동강 있는 데서 공개총살하는 거 많이 봤어요.
[앵커]
그러면 어쨌든 그 안에서 계속 늙어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어요?
[인터뷰]
많죠, 늙어서 죽고.
[앵커]
아이들도 평생 거기서 자라는 것도 많이 보셨을 거 아닙니까?
[인터뷰]
그렇죠, 다 그렇게 알고 살았어요.
[앵커]
그저 그렇게 알고 산다는 건거기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터뷰]
그저 그렇게 알고 사는데 그다음에 비서랑 군적인 자료를 쓸테니까 일만 잘해가지고는 안 된다라고 해서 가축을 길러서 바치면 고기는 자기네가 먹고 고기를 탄광에 바쳤다고 자료를 내니까 이게 자료가 나가는 게 91년부터 2001년도에해제됐으니까 10년이 걸린 거예요.
그렇게 하고 해제됐어요.
[앵커]
알겠습니다.
이런 문제는 사실 지금 21세기에 이런 곳이 있고, 이런 일이 일어난다라는 것은 아마 많은 분들이 이게 좀 과장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처참한 현실인데요.
이런 얘기를 들어면 사실은 김정은이가 ICC에 회부가 되어야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인터뷰]
그러니까 지금 김정은 정권도 문제지만 과거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 이때부터 반인륜 범죄가 쭉 이어져 왔고 지금 수용소가 생긴 게 거의 50년이 지났습니다.
5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분들을 죽였고, 지금도 죽이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반인도범죄로 회부 안 한다면 안 되는 거죠.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수용소에 대해서 얘기를 들어봤는데요.
앞으로도 계속정말 생생한 이야기 전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최근 북한인권 실태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죠, ICC 회부를 골자로 하는 북한인권결의안 초안이 UN에서 협의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북한의 대표적인 인권사각지대죠.
북한의 수용소, 그 처참한 현실을 현실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우리나라 정보기관이 인정한 최장기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로 18호 관리소에서 13살 때부터 41살까지 무려 28년을 살았던 분이죠.
김혜숙 씨 나와 계시고요.
그리고 제15호 요덕관리소 출신 탈북자 북한전략센터 강철환 대표 두 분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안녕하세요.
그런데 수용소 얘기하기 전에 김정은이 지팡이를 치웠어요.
한동안은 다시 젊어지는 모양이죠?
30 되죠, 지금?
[인터뷰]
이제 30 됐죠.
[앵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나이 먹은 척 하고 다니더니 지팡이를 치웠어요.
[인터뷰]
그러니까 40일 동안 안 보일 때 뭔가 혈관계통에 문제가 있거나 고관절, 여러 가지 설들이 나왔는데 우리나라 국정원이 발표한 대로 발목 수술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발목 수술해서 아마 완치가 되니까 지팡이를 놓고 다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마 아직까지는 발목 외에는 다른 문제는 없는 걸로 저렇게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앵커]
발목에서 혹 떼어냈다.
[인터뷰]
발목이 접질러지면서 거기에 물이 차니까 그걸 좀 빼고 수술했다.
[앵커]
그집 식구들이 혹이 많아요.
김일성도 귀에 혹이 있고. 손주로 내려갈수록 점점 혹의 위치가 발목까지 내려갔나, 그건 모르겠는데,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강 대표한테 여쭤볼게요.
양강도에 있는 군사학교에 누가 인분을 누가 던진 모양이에요.
그런데 군사학교라는 게 일단 뭡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이제 뭐 군단단위로 소위 장교들 배출하는 사관학교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학교에 아마 누군가가 인분, 똥을 투척을 한 모양입니다.
요즘에 군부대가 워낙 식량공급이 안 돼서 민간으로 습격해가지고 돼지 훔쳐가고, 옥수수 훔쳐가고 거의 도적질로 살아가다보니까 이 군대 약탈에 정말 환멸을 느낀 인근 주민들이아마 이 똥이나 먹어라, 이런 식으로 해서 인분을 투척한 것 같아요.
[앵커]
군도 먹고 살기 힘들군요.
[인터뷰]
그러니까 제일 문제가 일반 주민들은 지금 어느 정도 시장화가 되어 있어서 자급이 되는데.
[앵커]
자급자족이군요.
[인터뷰]
인민들로 뺏어내서 분배를 해야 되는데 이게 잘 되지 않으니까, 지금 군대가 굉장히 어려운 상태거든요.
그래서 군량미를 얻으려면 중국이나 한국에서 쌀 같은 것을 받아야 되는데 그것도 안 되죠.
그러다 보니까 북한의 인민군대, 120만으로 보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굉장히 힘든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마 군부대가 있는 지역은 거의 쑥대밭이거든요.
그래서 아마 군부대를 상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총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마 누가 화풀이로 군관학교에서 똥이나 먹어라, 이런 식으로 갖다 확 뿌린 것 같습니다.
[앵커]
제가 할 얘기를 대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수용소 얘기도 좀 해 볼 텐데요.
우리 김혜숙 씨 같은 경우에는 13살부터 41살까지 그러면 탈북은 언제 하셨어요, 몇 년도에?
[인터뷰]
2009년도요.
[앵커]
우리나라에 오신 게 2009년.
[인터뷰]
네.
[앵커]
그러면 중국에도 중간에 계셨을 것 아닙니까?
[인터뷰]
중국에 2005년도에 팔려갔다가 2008년도에 또 체포돼가지고.
[앵커]
2008년도에 또 중국 공안에.
[인터뷰]
연길 식당에 팔려갔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내가 시켰어요, 돼지 사오라고, 그래서 북한에 넘어갔어요.
[앵커]
돼지 사러 넘어가셨구나.
[인터뷰]
넘겨 보내줬어요.
[앵커]
돼지값이 북한이 싼 모양이죠?
그때 중국돈 100위안 한 장에 북한에는 5만원 했어요.
그리고 중국에서 돼지 한 마리는 350원, 그러니까 저를 내보내서 돼지를 사러 갔다가 제가 잡혔어요.
그래서 제가 어디에 거주한 데가 없으니까 다시 18호 수용소로 끌려들어갔어요.
[앵커]
원래 18호 수용소.
제가 이거 잠깐 판넬을 보면서 저도 이걸 사실 잘 몰라요.
그래서 지금 우리 강철환 대표가 계셨던 데는 요덕이 어디 있어요?
[인터뷰]
요덕 수용소가 여기 15호수용소고요.
[인터뷰]
저는 18호.
[앵커]
여기네요.
그런데여기 18호 이 수용소에 계셨다가 13살에 들어가서 41살에 나오신 거죠?
[인터뷰]
42살에.
[앵커]
2002년도에 나와서 3년 동안 뭐하셨어요.
[인터뷰]
3년 동안 왔다갔다 했어요.
[앵커]
2005년에 탈북하셔서 다시 잡혔다, 그래서 다시 이리로 왔다 이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나오셨어요?
[인터뷰]
거기서 안전원들이 2명이 청진으로 왔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저를 회송해서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저를 그래도 중국땅이 아니고 돼지사러 넘어가서 무산에서 붙잡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좀 경계줬어요.
[앵커]
이 안에는 노동단련대도 있나 보죠?
[인터뷰]
노동교양소.
[인터뷰]
김혜숙 씨가 북창관리소에 있었는데 여기가 수용소가 굉장히 많았어요.
이 북창 지역에, 그러니까 약간 인민보위부 이런 일부 수용소가 해체가 되면서 그 지역에 아마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마 거기서 그 지역에 단련대로 갔던 모양인데요.
[앵커]
조금 더 제가 여쭤보는 게 2005년도에 탈북하셨죠?
그런데 2002년까지 여기 북창수용소에 있었단 말씀이시죠.
그러면 이 북창수용소에서 탈출하신 거예요?
[인터뷰]
아니에요.
탈출할 수가 없어요.
4m 높이의 철조망이 있고 그다음에 거기에는 3300헤르쯔의 전기가 흐르거든요.
전기소리가 들려요.
가까이 가면 휙 붙어서 타 죽게 만들어가지고 도망은 못 쳐요.
그래서 해제받고 2월 16일에 해제 받았어요.
[앵커]
강 대표님, 해제를 받으셨다고 하는데 지금 강대표님이 계신 데는 요덕이죠.
강 대표님도 한 10살인가 그때부터 계셨죠?
[인터뷰]
제가 77년부터 87년 사이에 한 10년 간 수감생활을 했는데요.
요덕수용소 같은 경우에는 구역이 2개로 분리가 되어 있었어요.
완전 통제구역, 거기는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아예 다 죽이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동안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올 수 있는 그런 지역이었죠.
저는 10년 만에 풀려나왔는데요.
[앵커]
이주구역에 계셨어요, 혁명구역에 계셨어요?
[인터뷰]
수용소마다 조금 명칭이 다르기는 한데요.
우리는 이주구역이라는 말을 안 썼어요.
안 쓰고 완전통제구역.
[앵커]
완전통제구역에 계신 거예요?
[인터뷰]
아니요.
혁명화 구역은 석방이 가능한 지역입니다.
[앵커]
그러면 북창도 역시 혁명화구역이라고, 잠시는 아니지만 있다가 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인터뷰]
그게 혁명화 합숙도 있어요.
독신들이니까 합숙을 지어놓고 울타리 쭉 채워넣고 합숙생들이 있어요.
[앵커]
그리고 김혜숙 씨가 있었던 데는 거기가 아니라.
[인터뷰]
저는 이주구역.
[앵커]
들어가면 못 나오시는데 나오셨잖아요.
[인터뷰]
아니, 북창 거기는 보위부 관리소가 아니라 안전관리소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집 안에 들어가면 김일성 초상화도 다 모시고 살아요.
그러니까 일만 잘하면 해제를 시켜준다 이런 게 있어요.
[인터뷰]
저게 뭐냐하면 정치범들만 있는데는 국가안전보위부가 관리하고 있고 저기는 인민보안부 산하인데요.
약간 정치적으로 연루가 되면서 강도가 센 사람들만 모아놓은 수용소가 또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완전한 정치범 수용소 형태는 아니고 조금 다른 형태죠.
그러니까 요덕수용소가 있는데 북창에도 완전정치범 수용소도 있고 약간 인민보안성산하가 관리하는 정치범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데가 또 있고요.
[앵커]
그런데 13살 때 가셨다면 부모님이 결국 잡혀가셔서 가신 것 아니에요.
부모님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으셨기에?
[인터뷰]
글쎄요, 저도 죄 모르고 잡혀갔어요.
[앵커]
죄도 모르고?
[인터뷰]
그래서 가족은 1970년 10월 28일날 들어갔고, 저는 아기 때부터 외할머니네 집에 가서 자랐어요.
[인터뷰]
그래서 5년 늦게 들어갔어요.
[앵커]
5년 늦게, 13살이니까, 부모님은 7살이나 8살에 잡혀가셨겠네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런데 왜 들어갔는지 아직도 모르세요?
[인터뷰]
들어가면 첫째 조항에 너희는 이유를 묻지 말라,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다죽였어요.
[인터뷰]
일단 수용소에 수감 시킬 때 가족까지 끌고 가는 경우는 일반 범죄하고 다른 경우거든요.
[앵커]
정치범.
[인터뷰]
그래서 이제 아마 내부재판을 하는데 이거 공개하지 않습니다.
살인자나 이런 사람들은 공개재판을 해서 다 알리는데 저런 저런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다 내부적으로 처리하다 보니까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알고자 하게 되면 그게 죄가 되는 것이죠.
[앵커]
그런데 김혜숙 씨 같은 경우에는 그렇다면 이 북창수용소 내부에서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이주구역은 못 나간다면서요.
뭐를 가지고 먹고 사셨어요?
농사 짓고?
[인터뷰]
농사 스스로 못 지어요.
[앵커]
그러면 뭘 먹고 살아요?
[인터뷰]
배급을 줘요.
배급을 주는데 우리가 7식구였었거든요.
7식구에, 아버지는 잡아갔어요.
보위부에서, 제가 죄가 뭔가 물어본다고 해서 잡아가서 아직 생사여부를 모르고 할머니 그다음 어머니, 우리 5형제, 그러니까 일곱 식구에서 한 달에 먹을 식량이 그저 강냉이 어떻게 건조했는지 젖어온 거 있잖아요.
그런 거 7kg 타다가 말리면 4kg 내지 4.5kg 돼요.
이걸로 7식구가 한 달 먹어야 돼요.
[앵커]
4kg 에서 4.5kg 을 7식구가 한 달을 먹는다, 어떻게?
물에 불려서 잡수세요?
[인터뷰]
아니, 물에 불리지 않아요.
우리 할머니가 집에 계시니까 멧돌에다가 갈아가지고 다 깨진 그런 주머니를 30개 만들어서 거기다 봉지에다가 가루를 넣어요.
이만한 봉지 하나가 하루 식량이에요.
그러니까 이거 도토리나무 잎사귀, 뭐 쓰고, 뭐 쓰고 다 뜯어다 제일 많이 제가 먹었다고 기억되는 것은 도토리나무 잎사귀예요.
그걸 쑤지는 않아요, 텁텁하지. 그러니까 끓는 물에다가 몇 번 우려내고 그걸 썰어요.
그것도 하루에 세 끼 다 못 먹어요.
하루에 한 끼 먹으면 잘 먹는 거예요.
[앵커]
지금 제가 또 하나 여쭤볼 것이 그런 것을 먹으면서 41, 42살에 계셨다는 거죠.
[인터뷰]
42살이요.
[앵커]
그렇게 생활하시면서, 일부에서 쥐도 잡아먹고 이렇다고 하는데 그건.
[인터뷰]
우리 남동생이 살았을 때, 제남동생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탄광에 깊숙히 들어가서 탄을 캐니까 그 속 안에 백쥐가, 해를 못 보니까 쥐가 이만한데 하얀색이에요.
그걸 어쩌다 한 번 잡아오면 털을 한번 쓱 그슬리고 그다음 그걸 물을 한가마에 넣고 끓이면 그래도 기름이 둥둥 뜨더라고요.
그걸 동생들 주고 저는 국물만 먹었는데도 달고 맛있었어요.
[앵커]
우리 강철환 대표도 그런 경험 하셨어요?
[인터뷰]
그러니까 수용소에서 쥐는 정말 고급식품이죠.
없어서 못 먹는 거고.
[앵커]
어렸을 때 그런 걸 먹는 거예요?
[인터뷰]
산쥐가 있다 보니까 특히 겨울에는 쥐들이 민간으로 내려오는데 이 쥐 덕분에 정치범들이 많이 살아요.
영양보충을 해야 되는데 쥐밖에 없으니까, 쥐를 잡아먹고 살고 있고, 뱀, 개구리, 도마뱀, 닥치는 대로 먹는 거죠.
그리고 수용소 안에 특별감옥이 있는데 이 감옥 안에 끌려가게 되면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요.
특히 68년도에 잉글랜드월드컵 때 박승진 선수가 요덕수용소로 끌려왔는데 훔쳐먹다가 이번에 감옥으로 또 끌려갔어요.
수용소 안 감독으로.
[앵커]
수용소 안에 감옥이 또 있어요?
[인터뷰]
안에 또 있어요.
가는 감옥이 있는데 거기에는 6개월만 있으면 앉은뱅이가 돼요.
다 썩어서 이분이 거기 끌려가서 3개월 동안 거의 죽다가 살았는데 그때 이분이 너무 배가 고프니까, 감옥에 눅눅한 습지에 사는 벌레들 있잖아요.
지네라든지 이런 쥐며느리 같은 것, 바퀴벌레, 이런 것들 잡아먹고 살아나왔어요.
그래서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제일맛있게 먹었던 벌레가 바퀴벌레였다, 이래 가지고 그분의 별명이 바퀴벌레가 됐거든요.
그러니까 그 정도로 열악한 거고 쥐는 고급식품이죠.
[앵커]
지금 사실 이것이 과장된 것이 아니냐라고 아마 많이 믿을, 우리나라 시청자분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실 거예요.
그런데 그런 생활을 28년을 하신 거죠.
[인터뷰]
그렇죠.
[앵커]
28년을 했는데 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그 안에서 결혼도 시킨다면서요?
어차피 못 나올 사람들을.
[인터뷰]
결혼을 시켜요.
[앵커]
그런데 왜 결혼을 시켜가지고 아이를 낳게 합니까?
이론적으로 따지면 정치범들 같은 경우에는 아예 애를 못 낳게하는 거 아니에요?
이거 왜 그렇죠?
[인터뷰]
탄광에 제가 16살 때 졸업해서 탄광에 배치 받았어요.
배치받으니까 소대에 23명이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사람이 다쳐서 죽고, 굶어 죽고 이렇게 하니까 8명이에요, 마지막에는.
그다음에 그래서가 아니라 남자 나이는 30살, 여자는 28세가 되면 결혼을 승인해 줘요.
그런데 나이가 됐다고 해서 무조건 승인해 주는 건 아니에요.
600명, 800명 되는 승인된 사람들 중에서 한 15명이 자료를 관리소에 올려요.
올려다가 내려온 기간이 6개월 걸리는 거예요.
거기서 또 탈락되는 것도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당선될 때는 5명이 당선됐댔어요, 합격으로.
그런데 10년 동안 지각 한 번 안 하고 정말 말 없이 일 잘하고 이런 모범 청년들로 선출해서 결론시키는데 가만히 생각해서 알고 보니까 탄광노동자들은 자꾸만 죽어나가지 노동자들을 생산할 방법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데서.
[앵커]
그것도 자체조달하는 거예요?
[인터뷰]
그렇죠, 그래서 아기들도 많이 낳으라고 그래요.
그런데 하나 낳아도 건사도 못 하고.
[앵커]
집에서 낳겠네요?
[인터뷰]
다 집이에요.
병원에 갈 생각 못 하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정치범 수용소가 초기에는 죽이는 목적이었는데 갑자기 북한 경제가 안 좋아지니까 수용소 경제가 생겨났어요.
그래서 이 수용소 경제에서 군수품도 나오고 별 거 다 나오거든요.
[앵커]
수용소 경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리고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각 수용소로 분산배치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지금 만탑산수용소, 그런 얘기가 보도가 되고 있는데 이 만탑산이 핵실험 하는 데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정확한 명칭은 길주군 풍계리 만탑산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만탑산 바로 가장 밑에 지하굴이 있는데 바로 이 굴이 핵실험장입니다.
그리고 지하굴 바로 앞에 화성수용소가 있어요.
[앵커]
만탑산수용소가 틀린 용어네요?
화상수용소.
[인터뷰]
만탑산수용소라는 건 없고 화성수용소에서 정치범들을 뽑아서 핵실험장으로 끌고 간 거죠.
그러니까 정치범이 사는 곳은 아니고 핵실험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동원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지 수용소는 아닙니다.
[앵커]
그러니까 결국 여기서 끌려간 사람들은 핵실험장에서 일을 하도록 이용을 당하겠군요.
[인터뷰]
왜냐하면 북한이 3차까지 핵실험을 했는데 북한 외부에서 핵실험장 건설에 동원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핵실험에 대한 정보가 완벽하게 통제가 됐죠.
그러니까 그만한 인력을 동원할 데가 없기 때문에 이 회룡수용소하고 청진수용소, 이 3개 수용소에서 2, 3만명을 뽑아서 핵실험장으로 끌고 간 거죠.
[앵커]
사실은 생체실험 비슷한 거예요.
[인터뷰]
그렇죠, 방사능에 오염돼서 죽는 거니까요.
[앵커]
우리 김혜숙 씨 같은 경우에 책을 내시고 그림 잠깐만 보여주시겠어요?
그림도 나오는 모양인데요.
화면에 그림 나오고 있습니다.
저 그림은 어떤 그림이에요?
[인터뷰]
저건 제가 탄광에서 일하는 그림이에요.
[앵커]
수용소 탄광에서, 저건 쉬는 그림입니까?
[인터뷰]
탄광에서 일하고 나와서 탈의실 같은 데서 저렇게 집에 안 가고 자다가 일하고, 이이 그림은 중앙당에 있던 사람이 탄광에 18호에 들어왔었어요.
[앵커]
좀아까 목매단 건?
[인터뷰]
아니, 교수형이에요.
제가 28년 살면서 교수형 2번 봤는데 하나는 여자, 그 여자는 미신 믿었다고 해서 교수형에 처했고요.
[앵커]
그렇군요.
교수형 2번 보시고, 총살형은?
[인터뷰]
총살형은 많아요.
몇 백번을.
[앵커]
그러면 굉장히 사람 죽는 모습을 많이 보셨겠네요?
공개처형하는거군요?
관리소에서 내일 한다 그러면 몇 월 말 공개공판 했었어요.
공개공판 그렇게 하고 장소는 대동강, 대동강이라는 게 공개총살하는 데니까 대동강 있는 데서 공개총살하는 거 많이 봤어요.
[앵커]
그러면 어쨌든 그 안에서 계속 늙어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어요?
[인터뷰]
많죠, 늙어서 죽고.
[앵커]
아이들도 평생 거기서 자라는 것도 많이 보셨을 거 아닙니까?
[인터뷰]
그렇죠, 다 그렇게 알고 살았어요.
[앵커]
그저 그렇게 알고 산다는 건거기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터뷰]
그저 그렇게 알고 사는데 그다음에 비서랑 군적인 자료를 쓸테니까 일만 잘해가지고는 안 된다라고 해서 가축을 길러서 바치면 고기는 자기네가 먹고 고기를 탄광에 바쳤다고 자료를 내니까 이게 자료가 나가는 게 91년부터 2001년도에해제됐으니까 10년이 걸린 거예요.
그렇게 하고 해제됐어요.
[앵커]
알겠습니다.
이런 문제는 사실 지금 21세기에 이런 곳이 있고, 이런 일이 일어난다라는 것은 아마 많은 분들이 이게 좀 과장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처참한 현실인데요.
이런 얘기를 들어면 사실은 김정은이가 ICC에 회부가 되어야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인터뷰]
그러니까 지금 김정은 정권도 문제지만 과거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 이때부터 반인륜 범죄가 쭉 이어져 왔고 지금 수용소가 생긴 게 거의 50년이 지났습니다.
5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분들을 죽였고, 지금도 죽이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반인도범죄로 회부 안 한다면 안 되는 거죠.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수용소에 대해서 얘기를 들어봤는데요.
앞으로도 계속정말 생생한 이야기 전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