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모두 버린 '국군 포로' 안학수 하사

남북이 모두 버린 '국군 포로' 안학수 하사

2014.11.11. 오후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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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오늘은 기막힌 사연 하나 전해드려야겠습니다.

베트남 전에 참전했다가 인생이 엉망이 돼버린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기꺼이 총을 들고 베트남까지 날아갔던 이 청년, 안타깝게도 북한에 납치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전쟁영웅 대신 주홍글씨같은 낙인이 찍혔습니다.

남북한이 모두 버린 베트남전 국군포로 1호, 고 안학수 하사에게는 '월북자'라는 낙인이, 가족들은 빨갱이라는 누명이 씌워졌습니다.

베트남 파병 50주년을 맞았습니다.

명암은 극명합니다.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원동력이 됐지만, 참전 용사들은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한 채 멍에를 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 북한이, 베트남 전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납북된 고 안학수 하사의 기막힌 인생이그 가능성을 방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슈대담에서 직접 확인해보시죠.

[앵커]

지금 우리 안보라 앵커가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안학수 하사의 납북 과정 이런 것을 보면 베트남전에 북한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아니라 참전했다는 것이 거의 사실이 될 수 있고요.

오늘 저희가 사진으로 북한이 베트남전에 개입을 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을 여러분에게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방송 사상 최초로 북한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인데요.

오늘 그 사진을 가지고 나오신 분이죠.

고 안학수 하사의 동생분이신 안용수 목사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일단은 지금 편지도 갖고 나오셨죠?

[인터뷰]

네.

[앵커]

이게 안학수 하사의 편지죠.

안학수 하사의 편지인데.

그 편지 내용을 제가 잠깐 읽어볼게요.

안학수 하사의 편지인데.

아버님 전상서.

이제 당당한 대한민국의 국토를 관여한 육군병장입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과 같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1965년 6월 28일, 월남 붕따우에서 학수 올림.

6월 28일날 보낸 거네요, 65년.

그렇죠?

그러면 65년 6월 28일날이 편지를 받고 소식이 완전히 끊겼어요?

[인터뷰]

그 기간은 근무기간이었고 66년까지 2년간 근무를 했죠.

60년 9월 16일날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고요.

66년 9월 16일날.

[앵커]

그런데 실종됐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어요, 베트남전에서?

[인터뷰]

형이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앞으로 16일 전후로 도착한다고 그런 이후에 사람이 오지 않으니까 우리가 계속 아버님을 비롯해서 민원을 제기했죠.

왜 아들이 귀국하지 않느냐.

그러다가 2개월, 3개월 나중에 6개월 지나도 연락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또는 정부이쪽 측면에서는 계속 기다려 봐라 해서 기다렸는데 연락이 없는 데다가 67년 3월 27일경 당시에 문화방송하고 평양방송 채널이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문화방송을 듣던 분이 우리 아버님 포항 동부고등학교 남한방송을 계속 들은 겁니다.

알고 보니 형님이 그때 납북돼서 그때 남북된 사람을 방송에 활용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지금 노동신문 1967년 3월 27일 1면에도 고 안학수 하사의 기사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그걸 한번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여기 67년 3월 27일날을 보면 보면.

지금 나오고 있군요.

박정희 도당은 미제 침략자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있는 더러운 반역자이며 미제의 똑똑한 앞잡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다.

이게 그러니까 안학수 하사가 북한에 잡혀가서 얘기한 거죠.

조국과 김일성 원수님의 따뜻한 품에 안긴 지금 나는 무한히 행복하다, 아주 전형적인 얘기인데.

이거 이렇게 노동신문에 났다는 사실을 아신 적이 있습니까?

[인터뷰]

정부기관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그때 화를 내시고 그거 다 노동당에서 써준 원고대로해야 되는 것 아니냐.

당신이라도 그럴 거 아니냐?

그걸 어떻게 사실로 믿는가.

철저한 반공세대인데.

여기서 반공교육을 받고 간 아이가 왜 그런 소리를 하겠는가?

사실도 아니고 순 상투적인 말이다.

오히려 반론을 하고 그랬습니다.

[앵커]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북한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은 온국민이 모르고.

요새도 몰랐죠, 선언은.

[인터뷰]

지금도 잘 모릅니다.

[앵커]

지금도 모르죠.

그런데 형님이시죠.

형님이 왜 북한에 갔지?

어떤 경로로를 통해서 북한에 간 거지, 생각 안 드셨어요?

[인터뷰]

저희들은 전혀 믿기지가 않았죠, 그 사실 자체가.

[앵커]

믿겨지지는 않았지만.

사진도 나오고 그랬을 텐데.

[인터뷰]

3월 27일날 아버님이 중앙정보국에 신고를 했어요.

하니까 그날 밤에 중앙정보국 요원이 와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게 중앙정보부가 그 긴 6개월 동안의 형님 행적을 너무나 훤히 잘 알고 있더라고요.

[앵커]

뭐라고 그러던가요?

[인터뷰]

와서 형님이 마지막 사인공 출전을 나갔는데 거기서 포로가 된 이후에 북한 군사고문단원이라고 저희들 분명히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넘겨졌고 그들이 중국을 거쳐서 데리고 갔다.

[앵커]

그러니까 베트남에서 포로가 돼서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 군사고문단한테 넘겨져서 북한 군사고문단이데리고 중국을 건너서 북한으로 갔다.

그러면 그때 당시 우리 중앙정보부는 분명히 북한이 베트남전에 관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네요?
[인터뷰]

그뿐만 아니고 형님의 행적에 대해서 아버님이 7시 반에서 8시 사이 오전에 이야기했는데 그날 밤 12시에 와서 밤에 2명이 와서 어떻게 그 긴 기간의 행적을 정확히 다 알고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앵커]

지금 저 사진, 왼쪽에 한번 보시면 저 사진이 지금 북한군과 관련돼 있는 사진이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저게 북한군인가요, 앞에 뭐 들고 있는 사람이?

[인터뷰]

북한군들이 주로 공군비행사들이 많이 왔는데.

[앵커]

베트남에서.

베트남에서 북한군 사진입니다.

[인터뷰]

저들이 지금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앵커]

미사일, 비행기에다.

전투기에다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는 사진.

그리고 이건.

[인터뷰]

북한군 조종사들이 사망을 했을 때.

[앵커]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인터뷰]

베트남땅에 세워둔 묘비입니다.

[앵커]

그러니까 베트남에서 전사한 북한 군 묘비다.

인민군들의 묘비다.

그리고 지금 이 사진도 베트남전에 참전한 북한군들인가요?

[인터뷰]

네, 맞습니다.

군인들을 찍은 사진인데우드 윌슨 센터에서 최초 46명만 기밀문서로 공개를 했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문서입니다.

46년 동안 비밀문서로 분류됐다가.

[앵커]

언제 해제가 됐다고 하셨죠?

[인터뷰]

이게 아마 작년인가, 작년 말인가, 46년 만에.

[앵커]

이 사진은 출동하는 북한 인민군들이군요.

[인터뷰]

공습이 오면 출동을 했듭낮습니다.

미그기인 것 같은데.

[앵커]

미그기죠, 저게?

그러니까 이게 북한 군사.

[인터뷰]

이건 베트나 하노이 근처 숲속에서 공중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앵커]

베트남 밀림에서.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 목사님은 이 사진을 다 미국으로부터 입수하신 겁니까?

[인터뷰]

아닙니다.

제가 베트남에 직접 가서 수입한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 참전용사가 베트남에서 입수를 했는가 봅니다.

가지고 있는데 심리적으로 이분들이 고엽제 환자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따님한테 주었어요.

따님이 마음이 약해서 사진이 매우 예민한 그런 부분이니까 저한테 연락해서 저한테 넘겨줬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입수를 하게 됐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원래 보유하시고 계시던 참전용사분은 이게 다 북한군이 베트남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진을 갖고 계셨던 거군요.

[인터뷰]

네, 그렇습니다.

[앵커]

그러다 따님한테 주시고 따님은 또 이 사진을 어쩔 수 없이 있다가 안 목사님에게 주신 거군요.

저 사진은 굉장히 귀중한 증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베트남전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는.

그런 측면인데요.

그러니까 저렇게 북한군들이 주둔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고 안학수 하사께서 납치가 될 수 있었다는 거죠.

[인터뷰]

형님뿐만 아니라 이 문서를 보면 이 문서는 외무국 기밀문서에 포함되어 있는 문서인데.

미국 정부가 한국군 포로와 실종자들에 대한 명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한국사람들입니다.

[앵커]

이것이 지금.

[인터뷰]

14명입니다.

[앵커]

이게 군번인가요?

[인터뷰]

그냥 일련번호고.

[앵커]

그렇군요, 조, 정, 김.

그러니까 베트남전에서 실종됐다.

[인터뷰]

포로를 포함해서 실종된 사람이 14명입니다.

[앵커]

그러면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실제로 고 안학수 하사처럼 납북됐을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인터뷰]

거의 높죠.

[앵커]

그러니까 여기 계신 분들이 결국은 포로가 됐어요, 북한군 포로가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인터뷰]

그당시 북한이 우리보다 GNP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한 명을 넘겨주면 3000달러라는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앵커]

베트콩에서?

[인터뷰]

그래서 이 사람들이 삼천달러씩 받고 넘겼을 확률이 높고 그 이후에도 이 문제가 상당히 우리나라 정보당국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월남전 전단지를 통해서 이 사람들 데려다가 심리전을 위해서 전단지를 만들어서 베트남전에 많이 뿌렸습니다.

그러니까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뿌린 심리전 전단지를 알고 있습니다.

[앵커]

북한에서 뿌린 전단지, 참전용사들이 다 그걸 봤다?

[인터뷰]

네.

[앵커]

그렇군요.

그런데 결국은 고 안학수 하사께서 북한에서 돌아가신 거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 돌아가신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인터뷰]

우리나라 거물급 공작원 김용규 씨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나라를 7번이나 왔다간 분인데 김일성 주석 집무실에서 직접 공화국 영웅메달까지 받은 분입니다.

그분이 받은 정보는 최고급 정보입니다.

그분이 형님에 관한 소식을 정보시관에다 전해 주었고 기무사 기밀문서에 내용을 기재를 해 놨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보니까 어떤 과정으로 해서 체포가 돼서 처형됐는가가기재가 되어 있고 또 북한에서 넘어온 탈북민들 중에서 나이 드신 분들은 형님을 알고 계시더라고요.

평양에서 없어지니까 간첩 안학수 잡으라는 방송을 전부 다 내보냈답니다, 북한에서.

그래서 형님이 탈북과 처형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물론 납북자로 인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죠.

[인터뷰]

43년 걸렸습니다.

[앵커]

국군포로도 사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납북심의보상위원회에서 제가 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과정은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굉장히 고생 많이 하셨고 힘드셨지만 사실은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 저런 최초 사진 공개라는 것이 베트남전 역사를 바꿀 수 있고요.

또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고 안학수 하사 같은 분의 일생이 저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죠?

지금 그래서 안학수 하사, 납북자로 인정은 분명히 됐고 국군포로가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인터뷰]

국군포로로 인정은 받았는데 문서를 정정할 때는 조사를 철저히 하고 그 근거를 제시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국방부에서는 조사를 하지 않고 그냥 납북업무는 통일부고 국군포로 업무는 국방부 업무인데 통일부가 납북자로 인정해서 그걸 근거로 우리도 국군포로 인정한다.

과거 베트남전 당시에 사령부나 국방부 지휘본부 의 책임자들에 대해서 조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계속 은폐만 해 놓고 있고.

사실 그래서 당시에 그 사람들은 전쟁범죄자와 같은 행위를 했습니다.

전범자들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러니까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은폐를 하고 왜 조작했는지, 왜 보고를 하지 않았는지 이런 것들을 철저히 조사한 다음에 국군포로로 인정을 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들이 없이 그냥 지금 통지서만 보내주고 있는.

그것도 처음에는 국군포로 추정자로 보내줘서 언론기관에서 연락이 온 것이죠, 왜 추정자냐.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상해요.

추정자라는 게 이럴 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거 가지고 한 달 동안 민원을 제기하고 제보자한테 한 달 동안 싸웠습니다.

결국 나중에 국군포로로 용어를 바꿔주었습니다.

[앵커]

제 기억으로는 제가 심사했을 때 들은 얘기인데 국방부하고 통일부 관계자하고 베트남에 가시지 않았나요?

가셨죠?

[인터뷰]

정부합동조사단이라는 것을 구성해서 갔는데 사실은 지금 베트남전에 가봐야 실질적인 조사 결과가 없습니다.

거기가서 무얼 우리가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기밀문서들이 다 있기 때문에 또 당시에 어떤 관련자들이 다 있기 때문에 그들을 철저히 조사만 해도 하다못해 최명신, 사령부 조사만 해도 왜 당신은 그때 포로가 한 명도 없다고 했느냐, 부하들이 참모들이 보고를 했는지, 과정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조사를 안 해요.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내가 볼 때 베트남에 가서 조사하고.

조사는 해야 되니까.

그리고 오히려 국방부가 자기 업무가 아닌 남북이라는, 그 납북에 대해서만 자꾸 업무를 한 것처럼 행세를 한 겁니다.

사실은 국방부하고 납북자하고.

[앵커]

원래 소관이 다르죠.

[인터뷰]

아무 관계 없습니다.

여기도 보면 조사보고서인데.

아예 이렇게 못 박아놨습니다.

형님이 현재 군인신분이라고 여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군인신분이기 때문에 국군포로 업무를 해석하기는 곤란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국군포로는 조사를 안 하겠다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어요.

[앵커]

민간인 신분인 안학수에 대해 군인신분인 국군포로 업무를 담당하는 국방부에서 처리하기는 곤란함.

이게 몇 년도 얘기죠?

[인터뷰]

2013년 정부합동위원회 결과 보고서가 이랬습니다.

[앵커]

그래도 지금 일단 국군포로로 인정된 거죠.

납북자로는 당연히 인정을 받은 거고.

[인터뷰]

통지서로 갔습니다.

[앵커]

그런데 납북자는 통일부에서 하는 거고 국군포로는 국방부니까 이게 사실보상이나 배상에 관한 문제도 상당히 복잡하더라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참 그리고 책을 내셨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베트남전에 참전한 안학수 하사가 어떻게 기구한 운명을 살았는지, 가족들이 어떻게 됐는지.

[인터뷰]

맞습니다.

금년이 참전 50주년인데 단체나 개인이 누가 아무런 기념행사가 없는 것 같아서 제가 기념도서를 하나썼습니다.

자서전 비슷한 책인데 25일날 출판기념회를 하게 되는데 그 책 내용이 거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사실 관계를 기록했고 거기에 대해서 정부가 어떻게 처리를 했는지, 또 가족인 우리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기록된 책입니다.

[앵커]

그렇습니다.

그게 굉장히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오늘 아주 중요한 자료를 갖고 나와주셔서 저희가 최초로 이런 구체적인 증거를 우리 시청자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게 만들어주셔서 정말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요.

[인터뷰]

문제는 이렇습니다.

5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보면 아직도 국방부에 관련된 업무들은 은폐라는 것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어떤 군인 한 명이 뇌출혈로 입원했는데 지금은 깨어났는데 구타를 당했다.

보니까 소대장부터 사단장까지 사고가 나면 책임 문제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사고가 나면 자기들 진급에 지장이 있으니까 은폐부터 시작을 해 놓고 일을 시작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어쨌든 국군포로로 인정됐으니까 앞으로 잘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겠고 저희도 계속 관심 갖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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