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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주옥순 대표 발언...역사공부 30년 넘게 이런 경우 못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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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주옥순 대표 발언...역사공부 30년 넘게 이런 경우 못 봤어"
YTN라디오(FM 94.5) [노영희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19년 8월 7일 (수요일)
□ 출연자 :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노영희 변호사(이하 노영희): 뉴스를 각별한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뉴스 탐구생활, 오늘은 바른 역사 시간이죠.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 뉴스를 좀 똑바로 들여다 보자, 이런 의도로 만든 코너입니다. 역사학자,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노영희: 본격적인 이야기 하기 전에, 그냥 간단하게. 엄마부대라고 하는 단체의 주옥순 대표가 아베 수상에게 ‘사죄’를 했습니다. ‘아베 수상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이런 말까지 했는데요. 이게 우리 일반 시민의 상식으로는 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거든요. 아무리 일부러 그렇게 했을 거라고 짐작은 가더라도.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를 바라보는 기분이 이럴까, 이런 생각 드는데 어떻게 보셨습니까?

◆ 전우용: 안중근 의거 직후에 좀 사욕을 품은 일부 지식인들이 일본에 대신 사죄했다. 사죄의사를 표명한 바 있고요. 또 그중에 일부는 진사사절단 따로 꾸려서 가기도 했고요. 그런 일들이 과거에도 있었죠. 또 이토 죽은 다음에 민족의 은인인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 세우자, 이런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데 이게 그 당시에 그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컨대 안중근 의거는 워낙 큰 사건이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내에서는 메이지의 원훈으로 추앙받는 사람이었으니까 친일파가 그럴 수는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자료들 보면서 좀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기도 하면서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없진 않았거든요.

◇ 노영희: 아, 이해가 되세요?

◆ 전우용: 그런 사람들이 자기가 사욕을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또 위기의식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면 그건 이해가 되는데, 제가 30년 넘게 역사 공부하면서 자료 속에 친일 발언들, 친일파들의 매국적인 행태들 참 많이 봤어요. 많이 봤는데, 이런 경우는 못 봤어요. 지금 우리가 먼저 도발한 사례도 아니고,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무엇을 사죄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데 한국인을 대표해서 사죄한다는 이야기를 일본 방송들이 있는 곳에서 일본어 팻말을 들고 하는 사람을 보고서는 좀 뭐랄까요. 제가 이제껏 본 친일 몰이배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그런 행동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요.

◇ 노영희: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알리는 차원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우리 아버지도 강제징용 근로자였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도 결국 피해자 당사자인데 나는 돈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 전우용: 그게 문제가 아니죠. 개인적인 경험의 문제도 아니고, 그 사람이 그걸로 어떤 이득을 얻는지,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저는 진짜 모르겠어요. 맨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국적을 떠나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이제 그만 하죠. 도저히, 제가 방송 나와서 이렇게 화가 나본 적은 없는데 그 사람 생각만 하면 정말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로 화가 납니다.

◇ 노영희: 맞습니다. 그리고 또 서양호 중구청장이 ‘노 재팬’ 깃발을 곳곳에 내걸었다가 철거하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물론 사과의 뜻을 발표했습니다만, 이런 건 또 어떻게 보십니까?

◆ 전우용: 처음부터 목표가 분명했어요. 일본과 한국 사이를 이간하거나 일본과 한국 사이에 전쟁은 아니다. 이 문제는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를 시도하는 아베 정권과 일본 우파의 혐한의식에 기초한 대한 모욕정책, 이거거든요. 그 정책에 대해서 정확히 반대의사를 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대처하는 것은 아베 정부가 행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 필요한 정도이고, 나머지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전개된다고 하는 것이었거든요. 전개한다고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일제 불매운동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게 어떤 언론이 사주했거나 정부가 뒤에서 부추겼거나, 이런 게 전혀 없이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벌여왔던 운동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거기에서 상징성 때문에 부득이하게 노 재팬이라고 하는 구호를 만들었던 것이지, 그것이 노 재팬 전체로 나아가선 안 된다. 이것이 국가적 입장은 아니다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하는데 지자체장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기 말로는 의병이 나서면 관군도 나서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는데 좀 어이없는 이야기죠. 시민운동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는 욕심이 있었던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이건 전혀 적절치 못한 일이었죠.

◇ 노영희: 사실 제가 그래서 서양호 중구청장하고 인터뷰를 한 번 했습니다, 전화로. 따로 물어봤더니 본인 생각이 짧았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미안하다. 이렇게 사과했습니다.

◆ 전우용: 그걸로 책임질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네.

◇ 노영희: 네,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 하겠습니다. 오늘은 어떤 뉴스를 역사의 시선으로 볼까요? 일본의 2차 경제보복입니까?

◆ 전우용: 2차라고 얘기하긴 어렵겠고요.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니까. 문제는 한일 간에, 특히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 공고히 결합해 있었던 경제적 상호협력 관계 또는 상호의존 관계가 오히려 전쟁의, 또는 대립을 격화하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 관계, 어땠는가. 이 이야기를 좀 해볼까 싶습니다.

◇ 노영희: 사실 한국하고 일본은 그동안 필요에 의해서 약간 위태위태하게 동맹하고 협력한 부분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게 이번에 조금 이런 식으로 나온 거 아닐까요?

◆ 전우용: 필요에 의해서라고 얘기하기가, 누구의 필요냐라고 하는. 양 국가가 주체가 되는 것인지, 양국의 또 어떤 그룹들이 주체가 되는 것인지에 따라서 다른 거겠죠. 그런 게 다른 거라서요. 사실 일단 해방 무렵의 상황도 봐야 할 것 같아요. 해방 당시에 남북한은 통일돼 있었고, 하나였고요. 조선이 일본 경제권에 편입돼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수출이라고 하진 않고요. 이출 이입이라고 불렀어요. 따로 수출 수입이 아니라. 그런데 전체 조사는 무역규모에서 보자면 해방 무렵에 일본과의 무역 규모가 70% 이상,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식민지였으니까. 나머지 30% 채 안 되는 것이 대만주 무역, 대중국 무역, 또 일부 대동남아시아 무역 정도로 구성돼 있었어요. 그러던 상태에서 해방이 되고 일본과의 경제관계가 일단 단절이 되죠. 그러면 우리가 지금에서 만약에 생각을 해보자면 현재 한국 세계수출 11위의 대국이긴 합니다만 지금 한국의 수출 70%가 끊겨버린다. 수입되던 물자의 80% 이상이 끊겨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 상태가 해방이었어요. 우리가 굉장히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해방을 맞았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일본과 교역을 하면서 먹고 살던 사람들 대다수였고요. 그 물건에 의존해 살던 사람들한테는 마음은 해방인데 몸은 지옥에 빠져드는 거죠. 상황 자체가 그런 거였어요. 대일 무역으로 수출하던 것이 다 차단돼버리고 일본에서 수입해 쓰던 것들이 완전히 두절돼 버리니까 그러니까 정말 끔찍한 상황에 놓여졌던 것이고, 이 부족한 부분들을 마카오 홍콩 무역이나 미국의 긴급원조로 근근이 때워나갔는데, 요즘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일본의 경제제재를 통해서 우리가 앞으로 어떤 곤경을 겪을 것인가라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상상을 해도 해방 직후의 현상에는 미칠 수가 없는 거죠.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이건 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계속 밀무역이란 형태로 진행되는데 일본도 전쟁으로 생산기반이 거의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충분한 물자를 둘 수가 없었죠. 그러니까 심지어 대학에서는 공부할 책이 없어서, 일제강점기 한국 대학교재가 한 권도 없었잖아요. 그런데 대학은 문을 열고 가르치니까 군산항에는 일본에서 헌책방에서 흘러나온 대학교재들을 파는 책시장이 열렸고, 그걸 또 사다가 한국 대학생들에게 파는 일이 벌어질 만큼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밀무역이 진행되곤 했었죠. 그런데 이게 극단적으로 이 관계에서 일본의 일방적으로 유리한 관계가 맺어진 것은 다 아시다시피 한국전쟁이었죠.

◇ 노영희: 그렇죠. 얼마 안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결국 일본이 살아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6·25를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다’ 이렇게 말할 정도였는데. 그렇다면 6·25 전쟁이라고 하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로 양국의 경제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 전우용: 양국을 떠나서, 일단 전쟁이 터지면 무기, 그다음에 군인용 피복, 피난민용 이불과 비상의류 등 수많은 물자들이 필요하게 되죠.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에 있었고, 한국 내에는 전쟁터였기 때문에 한국 내 생산시설이 파괴된 채 재건도 안 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어요. 수많은 일본 물자를 통해서, 일본에서 생산해서 한국전에 수입했던 것이죠. 일본은 군수산업이 태평양 전쟁 당시까지도 세계 최고 수준의 군수산업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총알이라든가 총기라든가 이런 것들 생산을 통해서 돈을 벌었고요. 그와 더불어서 한국인들이 극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복, 이불, 양말 이런 것들까지 전부 일본산으로 공급했어요. 그런데 당시 한국인들의 회상, 회고를 보면 미군에 납품하는 물건하고 한국군하고 한국인들에게 주는 물건하고는 품질 차이가 현격했대요, 가격은 같은데. 쉽게 말하면 한국인들을 가지고 속여서 해먹은 거죠. 이런 기반의 위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그 당시에도 일본인들의 혐한 의식과 한국인들은 나쁜 물건을 비싸게 팔아도 된다. 전쟁 중에 급하니까 어쩔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을 이용해서 한국을 딛고 경제 재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거죠.

◇ 노영희: 결국 일본은 우리를 항상 딛고 밟고 일어나고 있군요. 여기까지 말씀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정말 못다한 이야기 많은데 다음 주에 이어서 말씀 듣겠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 전우용: 감사합니다.

◇ 노영희: 지금까지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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