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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한국을 수출 심사 우대국 명단(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거세게 확산되고 있다. 아베 정부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는, 지난해 한국 대법원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손해배상 청구권 인정 판결을 내린 데서 시작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30일 전범기업 신일철주금(일본제철)에 강제동원 피해자 4명에게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 동원 피해자들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일본제철에 강제동원됐던 이춘식 할아버지는 노역에 시달리고도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다.
또 지난해 11월엔 대법원이 양금덕 할머니 등 동원피해자 5명이 미쓰비시중공업에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1인당 1억~1억 5천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선고하는 등 2건의 손배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은 배상 판결 이행을 미루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경제 보복의 일환으로 수출 규제 조치까지 펴자,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이 크게 일고 있다. 유니클로, ABC 마트, DHC 등 일본 자본 기업과 전범기업이 그 대상. 개인 단위에서 시작한 불매 운동이 국회와 지자체로까지 퍼지는 모양새다.
더불어민주당 김정우 의원이 지난 7일 공개한 조달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우리 정부 각 부처 및 공공기관은 일본 전범기업의 물품을 구매하는 데 총 9,089억 원을 사용했다. 건수로는 21만 9,244건이었다. 수의계약만 따지면 943억 원(3,542건)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레이저프린트, 전자복사기, 비디오 프로젝터, 디지털카메라 등이 미쓰비시, 미쓰이, 히타치, 스미토모, 캐논 등 전범기업에서 생산한 것이었다.
이에 김 의원은 지난 9일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있어 우리나라에 사과 및 보상을 하지 않은 일본 전범기업이 투자, 설립한 법인과 수의계약 체결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이뿐 아니라 서울시, 경기도, 부산시, 경북도 등을 비롯한 전국 17개 시도의회도 지자체와 교육청이 전범기업 공공구매를 제한하는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17개 광역 시도의회 의원 20여 명은 14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세금으로 구매하는 공공 물품만큼은 전범기업 제품 사용을 제한해 올바른 역사 의식을 확립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1일 서울시의회 홍성룡 의원이 대표 발의한 '서울특별시교육청 일본 전범기업 제품 공공구매 제한에 관한 조례안'은 서울특별시교육청과 교육감, 각급 학교에서 일본 전범기업 제품을 구매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경기도의회에서는 황대호 의원이 '경기도교육청 전범 기업 기억에 관한 조례안'을 재발의하겠다고 밝혔다. 도내 각급 학교가 보유한 일본 전범기업 제품에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스티커를 붙여 역사를 기억하게 하도록 하는 취지다.
황 의원은 앞서 지난 3월 경기도교육청이 전범기업 생산 제품에 인식표를 부착하도록 지도하고, 전범기업 생산 제품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는 비슷한 조례를 발의한 바 있다. 그러나 외교적 마찰, 기업과의 소송 문제 등을 우려하는 비판 여론에 밀려 한 차례 철회했고, 수정을 거쳐 다시 발의한다는 계획이다.
각 지방의회는 지난 2010년~2015년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립됐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 위원회)에서 조사된 전범기업 목록을 근거로 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 2012년 대일항쟁기 위원회는 일제 강제 동원 기업 1,493개 중 현존하는 287개(당시 기업명 기준 299개) 명단을 발표했다. 당시 이명수 자유한국당 의원도 이 명단을 토대로 정부부처에서 일본 전범기업 입찰을 제안하는 법안을 발의했었다.
당시 대일항쟁기 위원회에서 조사과장을 지냈던 일제 강제동원&평화 연구회 정혜경 박사는 위원회 활동이 끝날 무렵인 2015년 전범기업 명단을 업데이트했다고 밝혔다. 2015년 기준 224개 전범기업이 현존하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해당 명단을 취재진에 전했다.
다만 공공기관에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전범기업 구매를 제한하자는 취지와 달리, 일각에서는 관련 조례안들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각 지방의회에서 발의된 몇몇 조례안의 전범기업 목록을 보면, 전범기업 목록은 284개로 정리되어 있다. 공식적인 자료로 알려진 과거 대일항쟁기 위원회 발표 자료 287개(기업명 기준 299개)와 차이가 난다.
조례안들은 첨부 명단이 대일항쟁기 위원회 조사 결과 나온 전범기업 목록이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지만, 실제 위원회 조사 목록과 달라 전범기업 리스트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작성된 224개 명단으로 업데이트 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기존 대일항쟁기 위원회 발표 자료와도 차이가 나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지방의회 조례안을 작성한 관계자는 "전범기업 목록은 대일항쟁기 위원회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라면서도 위원회 자료의 출처를 묻자 "그 목록은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찾아보면 나온다"라고 밝힐 뿐이었다.
실제 경기도교육청도 지난 3월 경기도의회에 발의된 '경기도교육청 일본 전범기업 제품 표시에 관한 조례안'에 대해 "취지는 동감하나, 전범기업에 대한 조사 등 관리 주체는 중앙정부에 있고 상위법 제정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전범기업 목록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조례안에 제시되지 않았다는 지적이었다.
일각에서는 일본 전범기업 불매가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에 위배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 일본을 비롯한 협정 참여 국가들 사이에서 특정 국가 기업의 구매를 제한하는 것이 '내국민 대우 및 무차별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례안을 발표한 의원들은 "공공구매 금액을 조달협정이 적용되는 금액(3억 1천만 원) 미만으로 제한해 문제의 소지를 없앴다"는 입장이다. 또한 일본 전체 기업이 아닌 전범기업만을 대상으로 하고, 강행 규정이 아니라 '권고 규정'인 만큼 WTO 협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전범 기업 불매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전범 기업에 대한 명확한 정립이 필요하고, 증거 수집 등이 정부 차원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미쓰비시, 일본제철 등과 같이 대법원이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전범기업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전범기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고 소비되는 기업들도 존재한다.
나아가 단순히 전범기업 리스트 조사와 불매를 넘어, 소수만 남은 고령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배상과 사과가 행해지도록 하는 중앙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대법원 판결로 피해자들이 지난해부터 손해배상소송 승소를 거두고 있지만 실제로 배상금을 받은 사례는 없다.
현재까지 민간이 아닌 정부 차원의 강제동원 피해 규모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며,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을 위한 정부 기구는 행정안전부 산하에 TF 형태로 남아있는 게 현실이다.
정혜경 박사는 "피해자들 개인이 가진 기업에 대한 증거자료가 적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조사가 계속되지 않으면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은 피해자들은 정책에서 소외될 우려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위해서는 전범기업과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 피해 규모 파악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과 일본 정부의 사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런 기본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299개, 284개, 혹은 224개. 파악되는 현존 전범기업의 수조차 들쭉날쭉한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적을 제대로 알아야 싸움도 하는 법이다. 피해자들이 배상받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YTN PLUS 문지영 기자(moon@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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