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피아노 공연을 조율하는 사람, 이종열 피아노 조율사' 

'대한민국 피아노 공연을 조율하는 사람, 이종열 피아노 조율사' 

2020.08.10. 오후 4:40.
댓글
글자크기설정
인쇄하기
AD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 방송 : FM 94.5 (17:10~19:00)
■ 방송일 : 2020년 8월 9일 (일요일)
■ 대담 : 이종열 피아노 조율사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피아노 공연을 조율하는 사람, 이종열 피아노 조율사' 

◇이성규 한국장애인재단 이사장(이하 이성규)> 어느 방면이건 조용히 자신의 책무를 다 하는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들의 무대 뒤에는 이 분의 손길이 있더라고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우리나라 피아노 조율 명장 1호 이종열 피아노 조율사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종열 피아노 조율사(이하 이종열)> 네. 반갑습니다.

◇이성규> 많이 바쁘신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취자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이종열> 평생을 피아노와 함께 하여 세상 물정에 어두운 피아노 장인 이종열입니다.

◇이성규> 피아노 조율사라는 직업은 많은 분들은 피상적으로 알기는 알 것 같은데요. 피아노 조율사는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세요?

◆이종열> 일단 저에게는 크게 직업이고요. 아무리 좋은 공연 피아노 연주가 있어도 조율사를 빼놓고는 불가능 합니다. 하루 전 또는 당일 날 아침 일찍부터 그 피아노를 손질을 해서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와서 리허설을 해보고 그 다음에 조명이 들어오고 관객이 들어오고 해서 연주가 이루어지는 준비해주는 사람, 그래서 우리는 조명을 못 받는 껌껌한 데서 작업을 하고 연주자는 밝은 조명을 밝으면서 무대에 나가서 연주가 끝나면 박수는 혼자 받아요. 사실은 연주가 이루어지려면 피아노가 있어야 되고, 조율사가 있어야 되고, 연주자가 있어야 되서 그래서 3분의 1씩 인데 박수는 혼자 받습니다.

◇이성규> 그렇죠. 또 오늘 이종열 선생님께서 한 평생을 피아노 조율이라는 예술에 바치신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는데. 제목이 조율의 시간입니다. 조율의 시간을 귀중한 선물로 가지고 오셨는데. 받고 싶은 분들은 지금 바로 문자 보내 주시면 되겠습니다. 문자번호는 #0945입니다. 보내주시는 분들 중에서 추첨을 통해서 10분께 이종열 선생님의 책 보내드리겠습니다. 우리 이종열 선생님께서 조율하신 햇수는 얼마나 되세요?

◆이종열> 지금 64년째죠. 그동안 다른 일은 일체 생각해 본적이 없고 오로지 건반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성규> 경력이 환갑을 넘으셨군요. 경력만. 시작하실 때는 어느 가정에도 피아노가 있는 경우가 드문 그런 상황이었을 텐데. 어떻게 피아노 조율을 시작하셨어요?

◆이종열> 처음부터 피아노를 만질 수가 없었어요. 사실. 피아노가 있는 집은 엄청나게 부잣집이거나 그런 경우이고 학교 음악실에 풍금가지고 음악시간이 풍금이 이방 저방으로 옮겨 다니면서 음악시간을 했고 교회가면 풍금 반주하는 풍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오르간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풍금이라고 했었어요. 그걸 만났죠. 풍금을 만나가지고 할아버지가 유교사상이 철저한 분이시라서 엄청 무서웠는데 몰래 숨어서 교회를 다니면서 풍금을 독학을 했어요. 요즘처럼 교습소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본사다가 1페이지부터 혼자 독학을 하다가 막히는 거 있으면 음악통론에서 찾아서 공부를 해가지고 다시 연습에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책 한권을 뗐더니 손가락이 제법 돌아가더라고요. 그래서 교회에서 풍금을 자유롭게 만질 수 있으려면 찬송가를 반주를 하면 그 풍금이 제 것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찬송가연습을 해서 반주자를 해버렸죠. 그러면서 화음에 대한 귀가 열려가지고 이 화음은 아름다운데 요쪽 화음은 조금 뭐가 와글거리고 안정감이 없다. 이걸 고칠 수 있을 텐데.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지금 조율 인생으로 살아온 길이 됐어요.

◇이성규> 조율 명장 1호 되신 것도 신의 뜻이었군요.

◆이종열>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치면서 학생 잠깐만 그러더라고요. 그때 관상을 보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학생은 앞으로 소리 나는 일을 하고 살 것 같다고 그때가 중학교 3학년 때인데, 그거에 대해서 소리 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조율사 길로 들어들면서 그게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조율 연습을 하게 해준 것은 하나님이에요. 교회에서 했으니까.

◇이성규> 관상 보신 거는 불교고, 유교집안에서 태어나셨고, 교회에서 반주를 하시다가 인연을 맺으셨고, 참 이게 종합적인 길 안내가, 인생 안내가 있으셨군요.

◆이종열> 저는 미신을 믿지는 않는데요. 참 묘하더라고요. 이걸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어요. 예언이 맞았으니까요.

◇이성규> 다시 조율 얘기로 들어가면, 피아노 조율을 그래도 처음 시작은 가정에서 하셨겠죠?

◆이종열> 아니죠. 공장에서 새로 수도피아노사에 입사를 했어요. 처음에 제대하고 와서는 풍금의 수리하는 가게에 입사를 해서 풍금 이 조율하고 수리하는 일을 도와주었고요. 그 다음에 그게 재미가 없어서 서울로 와서 수도피아노사 공장에 취직을 했어요. 하루에 8대씩 생산이 되는데요. 그걸 조율을 해서 출고 시키는 걸 담당을 했습니다.

◇이성규> 그거는 몇 년 하셨어요?

◆이종열> 2년 반.

◇이성규> 2년 반 하시다가 무대 쪽으로는 언제 가셨어요?

◆이종열> 그 후에 삼익피아노로 옮겨가지고 영업부에서 한 3년 정도 하고, 너무 바빠져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그만 둘 기회가 정말 생겼죠. 세종문화회관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이성규> 그때가 몇 년도 쯤 되죠?

◆이종열> 79년 말 쯤, 70년대 그때는 지방출장을 많이 갔어요. 피아니스트들이 가끔 순회공연을 하거든요. 그러면 동반해서 하루 먼저 가서 피아노를 만져놓고 확인 받은 다음에 다음 도시로 가고. 그걸 많이 했습니다. 공연장 일을. 그래서 세종문화회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그걸 못 했죠.

◇이성규>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종열> 거기를 지켜야 하니까요.

◇이성규> 다 하셨네요. 교회부터 시작을 해서 피아노 공장, 피아노 회사 이쪽을 쭉 섭렵을 하신 뒤에 지금 이제 예술의 전당에서 무대를 장악하고 계신데. 가정집 피아노 조율하고 무대 쪽 조율은 뭐가 달라요?

◆이종열> 가정집은 그 집안에 필요한 사항, 그게 뭐냐면 아파트들이 많잖아요. 이웃집에 방해가 되니까 가급적이면 소리를 작게 그렇게 해달라는 주문이 많고. 그 다음에 요즘은 이제 차음, 방음을 해가지고 피아노 연습실을 만드니까 조금은 덜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고, 이웃집하고 많이 다퉜어요. 시끄럽다고. 그래서 많이 소리를 줄여주는 쪽 일을 많이 하고 그리고 무대는 소리가 너무 작으면 뒷자리에서 관객이 답답해하시거든요. 그리고 홀마다 어쿠스틱이 달라서 그 홀 어쿠스틱하고 피아노 음하고 맞춰야 돼요. 그래서 공명을 잘 시켜놔야 연주가 되기 때문에 그건 전문적인 일은 무대에서 하고 가정집은 그렇게 까지는 안 하죠.

◇이성규> 말씀 들어보니까 조율이 예술이네요.

◆이종열> 감사합니다.

◇이성규> 이 시간도 뭐 천차만별이겠죠.

◆이종열> 천차만별이죠. 모든 부분이 다 정상이면 조율만 딱 하는데. 한 시간에서 한 시간 40분. 근데 보통 조율사가 하는 일을 조율이라는 단어 하나로 말씀들을 하시는데. 실제로는 조율은 음정을 맞추는 것이 조율이고 그 다음에 조정은 건반이 잘 움직여서 피아니스트 손가락의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게 섬세하게 반응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게 조정이고. 음색, 음량을 조절하는 것을 보이싱, 우리말로는 정음이라고, 이 세 가지를 다 하는데 한 마디로 조율사라고 그래요.

◇이성규> 조율, 조정, 정음 이렇게.

◆이종열> 걸리는 시간은 조율만은 1시간 남짓 하면 되는데요. 조정은 꼭 봐야 되겠다 그러면 최저 3시간 그래도 안 되는 피아노가 있어요. 보이싱까지 또 해야 되고. 그러면 5시간, 8시간 아니면 이틀, 삼일까지 해본 적이 있어요. 피아노 하나로. 그래야 제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니까.

◇이성규> 그런 투자하는 시간과 이런 모든 쪽에 선생님의 감각이 이제 예민하게 작용을 할 것 아닙니까? 근데 연주자들이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요구도 다양하게 하겠죠?

◆이종열> 대게 조율하는 분들은 피아니스트만큼 손가락이 예민하지 못 하거든요. 조율은 어지간하면 통과가 되는데요. 연주 때 이 감각은 조율사가 피아니스트만큼 모르니까 서로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조율사 초년생 때는 건반의 깊이는 몇 mm, 해머가 움직이는 거리는 몇 mm가 국제 표준화 되어 있거든요? 조율 초년생 때는 그 표준을 가지고 조정을 하는데 고수가 되면 표준도 참고가 되지만, 감각으로 해야 돼요. 그래서 조율사가 피아노 연주를 할 줄 알면 더 유리하죠.

◇이성규>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 이종열 선생님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평생을 피아노 소리를 다듬는 예술에 바치신 선생님께서 어떤 음악을 하나 추천해 주실 지 궁금합니다.

◆이종열>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짧은 곡을 선택을 했는데요. 리스트-라캄파넬라.

◇이성규> 이유가 있으세요? 이 곡을 좋아하시는.

◆이종열> 리스트 곡은 화려하고 기교가 엄청나잖아요. 그래서 시원시원해서 좋고, 모차르트는 예뻐서 좋고, 바흐는 막 짜여진 조형감 그런 것 때문에 좋고 그래서 모든 장르를 다 좋아하는데요. 이거는 시간 때문에 딱 5분 걸릴 겁니다.

◇이성규> 리스트-라캄파넬라를 듣고 오겠습니다. 리스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6개의 초절기교 연습곡 3번 라캄파넬라를 조르주 치프라의 연주로 들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나라 피아노 조율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되세요?

◆이종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는 경제가 좋아져서 그때 이제 집안의 갖추는 품목이 처음에는 냉장고, TV, 피아노, 자가용 이런 순서로 가더라고요. 그때 엄청 팔렸습니다.

◇이성규> 그때 많이들 조율하시는 분들도 많이 생겼죠.

◆이종열> 피아노 공장에서도 양산이 되고, 학원들도 있고.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전국에 한 2천명 된다고 그랬어요. 정확한 통계는 아닌데요. 그 다음에 피아노 붐이 하향 길을 지금도 걷고 있거든요. 이건 전 세계적인 추세에요. 피아노 인구가 적어지면서 조율사가 필요 없이 되니까 직업도 전환이 되는 분도 있고. 그래서 지금은 600명 정도 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실제로 활동을 활발히 하는 분은 한 300여명 된다고 보면 정확할 것 같아요.

◇이성규> 선생님께서 피아노를 잘 조율, 조정, 정음을 하려면 귀가 좋아야 된다는 아까 하셨어요. 그게 자질의 중요한 요소가 되나요?

◆이종열> 기본이죠. 기본인데 귀가 좋다라는 거는 남의 얘기를 잘 들을 수 있는 좋은 귀. 근데 조율사의 귀는 물리적인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귀를 훈련을 시켜야 돼요. 그리고 아주 미세한 소리를 감지해낼 수 있는 좋은 귀 그거면 기본적으로는 갖추고. 그 다음에 듣기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손으로 공구를 쥐고 이걸 돌려서 내가 원하는 음을 만들어 내야 되는 거니까. 손 감각이 굉장히 예민한 그런 감각을 타고 나야 되고. 그 다음에 조율이 완성된 다음에 연주를 해볼 수 있으면 더 좋은데 되게 조율사들이 남자들이 하는데요. 그렇게 연주를 잘 하는 분은 많지가 않아요. 그래도 최근에는 음대 나온 분들이 조율사에 입문을 하더라고요.

◇이성규> 근데 이제 우리 이종열 선생님께서는 연주도 하시니까.

◆이종열> 풍금부터 배웠어요. 그렇다고 연주를 한다고 리스트나 베토벤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은파 소녀의 기도 이런 정도. 물론 찬송가는 자신 있고요.

◇이성규> 어떤 연주자들은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연주자도 있겠네요?

◆이종열>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그 분이 비행기에다가 자기 피아노를 싣고 여행을 다니고 한국에도 그렇게 하고 왔었어요.

◇이성규> 그때 독일에서부터 피아노 날아 왔다고 한 얘기가 그 얘기군요.

◆이종열>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하기로 되어있고 조율사도 같이 온다고 그랬었는데 조율사가 일본까지만 오고는 급한 일이 있어서 갔대요. 그래서 피아노하고 연주자만 왔더라고요. 근데 좀 색다른 거는 피아노 몸통은 하나고 건반 세트가 2세트에요. 그래서 왜 그런 가 그랬더니 이 분이 너무 예민하고 피아노 기술에 대해서 수준이 높은 기술자에요. 청년 시절에 피아노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대요. 그래서 모든 걸 다 할 줄 아는 거예요.

◇이성규> 그날 2003년이라고 기록이 나와 있던데. 무대에서 지메르만이 선생님을 언급했다 그러더라고요.

◆이종열> 근데 굉장히 까다로움을 피었는데요. 사방에서 볼 수 있는 모니터를 다 끄라는 거예요. 그리고 마이크가 매달려 있으니까 녹음을 할까 염려가 되서 녹음실 전부 철수해라 그렇게 요구를 했고 자기 리허설 시간에 보통은 기자들이 들어가서 보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일체 다 내보냈고 저를 잔뜩 긴장시켰죠. 조율사가 안 왔다니까 본인이 조율을 할 건가? 아니면 나한테 부탁을 할 건가? 그랬는데 결국은 저한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슴이 좀 콩닥콩닥했죠. 그래서 마지막 곡 끝나고 앵콜을 위해서 박수가 안 끊기고 이제 계속 되고 있는데 누가 뛰어왔어요. 조율사를 찾아요. 빨리 오세요 그래서 연주 다 끝났는데 왜 조율사를 왜 찾아? 이제 제 임무는 끝났는데? 그래서 뭐가 잘못 되서 야단치려나? 잔뜩 긴장해가지고 뛰어갔더니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하면서 Thank you very much. 그러고는 객석으로 무대로 나가서 박수를 멈추게 하고 아트센터 튜너 미스터 리가 조율을 잘해줘서 내 피아노를 최상으로 만들어줘서 미스터 리한테 감사한다고 멘트를 했습니다.

◇이성규> 그 분이 기본이 있는 분이네요.

◆이종열> 생각지도 않은 사건이 벌어졌죠.

◇이성규> 앞으로 모든 연주자들이 이 모범을 좀 배워야 될 것 같아요.

◆이종열>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이성규> 그런데 또 조성진씨 피아니스트 이 분하고도 뭔가 오랜 인연을 맺으셨다면서요.

◆이종열> 영재아카데미 거기 학생으로 왔다갔다할 때부터 봤죠. 그러니까 초등학교 학생 때니까 그 때 부터 봤는데, 말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에요. 조금 묵직하고 요즘은 성장을 해서 어른이 돼서 조리 있게 인터뷰 같은 것도 잘 하시더라고요. 어느 방송하고 인터뷰에서 제가 조율하면 음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고.

◇이성규> 그 분도 뭘 좀 아시는 분 같아요.

◆이종열> 그렇게 인터뷰에서 했더라고요.

◇이성규> 2007년이죠. 처음으로 이 분야 피아노 조율 분야의 명장이 되셨는데요. 그 때 명장이라는 게 어떻게 실감이 나셨어요?

◆이종열> 그거를 받는 순간 기분도 좋았지만 앞으로 명장으로서 명장답게 후배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픈 책임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이성규> 그러면서도 후학을 기르시는 것 같고요. 오늘 제자 한 분도 스튜디오에 같이 오셨는데 조율하는 분들 중에 제자 많으시죠?

◆이종열> 제자라고 하기에는 많지는 않고요. 제가 조율사협회 행사 때 기술 강의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후배들한테 영향을 준 거는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제 제자다 이렇게 말은 않겠습니다.

◇이성규> 끝으로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들려주시죠.

◆이종열> 피아노 조율사는 쉽게 피아노 고쳐주는 아저씨로 보는 분도 계시고, 피아노 조율을 하는 사람은 피아노도 잘 칠 거다라는 예상을 하는 분도 계시고 그런데. 사실은 피아노 조율사가 기술자가 아니고 예술자라고 저는 자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아노 소리를 아름답게 조각을 해서 연주자에게 내주잖아요. 그러면 그 아름다운 소리로 연주를 하면 그 소리를 들은 청중이 또 감동을 하고 그래서 제 작품은 조각처럼 그림처럼 벽에 걸리거나 어디 진열되는 게 아니고 공중에 물론 나갈라 버리지만 그 소리 자체가 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규>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부문 명장1호 이종열 선생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와 주셔서.

◆이종열> 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