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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조진혁 앵커
■ 화상연결 :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UP]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우리 입장에서는 조선인 강제 동원의 뼈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죠. 그래서 그동안 우리 정부가 등재에 반대해왔던 일본 사도광산이 협의 끝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최종 등재됐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행 요건을 잘 따를지 끝까지 살피겠다고 한 가운데 한국과 일본 모두 내부에서 기대와 우려가 각각 나오고 있습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모시고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연구원님 나와계십니까?
[최은미]
안녕하세요.
[앵커]
일본 차원에서 추진을 시작해온 지 벌써 8년입니다. 일본 입장에선 오랜 염원이 이뤄진 셈인데, 사도광산이 익숙지 않은 시청자들을 위해 사도광산이 어떤 곳인지 설명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은미]
사도광산은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북쪽으로 2시간 정도 올라가면 니가타라는 곳입니다. 니가타에서 다시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서 나오는 섬인데요. 이 섬이 항구로 발달되어 있기도 하다 보니까 북한이랑도 굉장히 가깝고요.
예전에 북일 납치자 문제로도 굉장히 유명한 곳입니다. 예전에는 지식인들이나 귀족들 이런 사람들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었는데 1601년도에 금맥이 여기서 발생이 되면서 에도 시대부터 굉장히 중요한 재원의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섬 안에 있는 광산이라고 해서 사도광산이라고 부르고요. 일본에서는 사도섬 내 있는 금광, 금산이라고 해서 사도금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앵커]
17세기 세계적인 금 광산이다. 그래서 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면서 일본이 등재를 요청한 건데 사실 그래픽에도 나왔습니다마는 조선인의 강제노역 역사가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이 사도광산이 어떤 자격을 갖췄기에 세계문화유산이 됐다고 볼 수 있을까요?
[최은미]
일본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을 할 때 필수요건으로 내세웠던 보편적 가치라는 게 있습니다. 사도광산에서의 금 생산 기술 그리고 체제가 인정이 된다라는 거고 당시에 굉장히 해외 교류가 제한적이었는데 독자적인 전통 수공업 방식으로 세계 최고 품질의 금을 생산을 했다라는 것이고 실제로 유네스코에서 나왔던 결과도 보면 고도의 수공업에 의해서 이러한 기술을 지속해왔던 것이 아시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광산 기술 자체에 집중해서 그 부분이 인정을 받아서 문화유산으로 인정됐다, 등재됐다라는 말씀이신데 우리 정부는 그동안 과거 태평양전쟁 시절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무임금 강제노역을 한 데다 그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부적절한 대처로 강하게 반발해왔습니다. 지금 정부 들어서도 외교부가 기존 입장을 유지하겠다라는 입장을 여러 번 피력했는데 무엇이 전환점이 됐을까요?
[최은미]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첫 번째는 2015년도에 군함도가 등재됐을 당시에 어떤 우리가 교훈을 얻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당시에 일본에서 등재를 하면서 이렇게 하겠다. 강제동원 관련한 것도 잘 기록을 할 거고 전시를 현장에 하겠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잘 지켜지지 않았죠. 그래서 이제는 약속보다 제대로 하겠다라고 하는 실천이 필요했을 것 같고요. 그러한 부분에 방점을 맞췄다라는 것 하나.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이코모스라고 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서 결과를 냈던 것이 등재 보류라는 결과를 내면서 전체 역사를 기술하라는 것과 현장에 반영하라고 하는 결과를 냈습니다. 이러한 평가들을 보면서 우리 정부도 조금 더 실천이라는 부분에 방점을 맞춰서 결국에는 합의를 해 준 것으로 여겨집니다.
[앵커]
그러니까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분명하게 알리겠다라는 권고를 했고 또 그리고 그 약속을 일본이 했기 때문에 이번 등재에서 한일 간에 합의가 이뤄졌다는 말씀이신데 실제로 사도섬에서 공개된 박물관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가혹한 노동조건을 보여주는 전시관이 마련됐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 그리고 또 우리 정부가 요구해왔던 조치와 부응하는지가 관심인데 어떻게 보십니까?
[최은미]
우선 당시에 조선인 노동자가 굉장히 가혹한 환경에 있었다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보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더 어렵고 힘든 일을 더 많이 했다라는 부분에 대해서 기술이 되어 있고 이러한 부분이 현장에 설치가 되어 있다, 그리고 기술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했던 강제성에 대한 부분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제대로 기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은 아쉽다라고 여겨질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추모하고 기억을 하겠다고 해서 추도식을 매년 개최를 하기로 했는데요. 이러한 부분은 올해 안에 개최가 된다라고 해서 지켜볼 부분인 것 같습니다.
[앵커]
나름대로 평가할 만한 부분은 있다라고 말씀을 해 주셨지만 그런데 이번에 강제동원이라는 표현은 명시돼 있지 않다라는 비판도 있거든요. 그리고 또 전시관이 실제 광산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최은미]
강제성이라고 하는 것은 양측이 합의를 이룬 부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보고요. 이러한 차원에서는 역시나 아쉬운 부분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 노동자가 처했던 현실에 대해서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알린다라는 차원에서 조금 더 향후에 진전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해보고요. 위치 관련해서는 조금 떨어져 있다라고 하는 지적이 있기는 한데 사도광산에 방문을 할 때 항상 많이 사람들이 방문을 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방금 자료화면에서도 지나갔던 것 같은데요. 그곳에서 불과 차량으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크게 그 부분은 많이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마는 역시나 광산 바로 그 장소에다가 조금 더 설치할 부분이 있는 것 같고요. 제가 조금 더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현장에 설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도 사도광산에 대해서 검색했을 때 나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설명하는. 그런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해서는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추후에 이런 부분들도 보완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앵커]
그러면서 함께 주목받고 있는 게 지난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메이지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그때는 무엇이 쟁점이 됐습니까?
[최은미]
그때는 강제성이라고 하는 표현들이 쟁점이 됐었고요. 결국에는 우리는 폴스트 워크라고 해서 강제노역이라고 주장을 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라고 해서 어게인스트 데어라는 표현을 썼죠. 이러한 부분이 사실 표현을 바꿈으로써 강제성을 희석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리고 전체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일정 부분만 기록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할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들이 크게 문제가 됐었습니다.
[앵커]
앞서서 군함도 때와 이번 사도광산 때의 차이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설명을 해 주시기는 했습니다마는 군함도 때보다는 이번이 조금 더 진전된 결과다, 이렇게 평가하십니까?
[최은미]
우선은 말로써 약속을 했던 게 2015년도였다고 하면 지금은 이번 같은 경우에는 그 약속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제부터 전시실이 공개가 되기도 시작을 했고 실천으로써 보여준 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수준까지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여전히 과제는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일본 정부가 어디까지 이행해야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은미]
우선 기록을 남기고 기억하고 추모한다라고 하는 측면에서 봤을 때는 당시 가혹한 환경에 대해서는 기록을 했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이 그 당시에 왜 거기에 왔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이 됐는지, 최소 1500명 이상이 있다고 해요.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명확히 기술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이렇게 이번에 발표될 때는 주목을 받겠지만 앞으로 이런 부분이 점점 잊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성의 있는 노력, 즉 정부 차원에서 관련된 인사를 계속 보낸다든지라는 그런 진정성 있고 성의 있는 모습들이 보여져야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우리 국민도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지켜봐야겠습니다. 여기까지 말씀 나누겠습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과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박희재 (parkhj0221@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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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UP]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우리 입장에서는 조선인 강제 동원의 뼈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죠. 그래서 그동안 우리 정부가 등재에 반대해왔던 일본 사도광산이 협의 끝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최종 등재됐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행 요건을 잘 따를지 끝까지 살피겠다고 한 가운데 한국과 일본 모두 내부에서 기대와 우려가 각각 나오고 있습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모시고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연구원님 나와계십니까?
[최은미]
안녕하세요.
[앵커]
일본 차원에서 추진을 시작해온 지 벌써 8년입니다. 일본 입장에선 오랜 염원이 이뤄진 셈인데, 사도광산이 익숙지 않은 시청자들을 위해 사도광산이 어떤 곳인지 설명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은미]
사도광산은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북쪽으로 2시간 정도 올라가면 니가타라는 곳입니다. 니가타에서 다시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서 나오는 섬인데요. 이 섬이 항구로 발달되어 있기도 하다 보니까 북한이랑도 굉장히 가깝고요.
예전에 북일 납치자 문제로도 굉장히 유명한 곳입니다. 예전에는 지식인들이나 귀족들 이런 사람들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었는데 1601년도에 금맥이 여기서 발생이 되면서 에도 시대부터 굉장히 중요한 재원의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섬 안에 있는 광산이라고 해서 사도광산이라고 부르고요. 일본에서는 사도섬 내 있는 금광, 금산이라고 해서 사도금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앵커]
17세기 세계적인 금 광산이다. 그래서 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면서 일본이 등재를 요청한 건데 사실 그래픽에도 나왔습니다마는 조선인의 강제노역 역사가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이 사도광산이 어떤 자격을 갖췄기에 세계문화유산이 됐다고 볼 수 있을까요?
[최은미]
일본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을 할 때 필수요건으로 내세웠던 보편적 가치라는 게 있습니다. 사도광산에서의 금 생산 기술 그리고 체제가 인정이 된다라는 거고 당시에 굉장히 해외 교류가 제한적이었는데 독자적인 전통 수공업 방식으로 세계 최고 품질의 금을 생산을 했다라는 것이고 실제로 유네스코에서 나왔던 결과도 보면 고도의 수공업에 의해서 이러한 기술을 지속해왔던 것이 아시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광산 기술 자체에 집중해서 그 부분이 인정을 받아서 문화유산으로 인정됐다, 등재됐다라는 말씀이신데 우리 정부는 그동안 과거 태평양전쟁 시절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무임금 강제노역을 한 데다 그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부적절한 대처로 강하게 반발해왔습니다. 지금 정부 들어서도 외교부가 기존 입장을 유지하겠다라는 입장을 여러 번 피력했는데 무엇이 전환점이 됐을까요?
[최은미]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첫 번째는 2015년도에 군함도가 등재됐을 당시에 어떤 우리가 교훈을 얻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당시에 일본에서 등재를 하면서 이렇게 하겠다. 강제동원 관련한 것도 잘 기록을 할 거고 전시를 현장에 하겠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잘 지켜지지 않았죠. 그래서 이제는 약속보다 제대로 하겠다라고 하는 실천이 필요했을 것 같고요. 그러한 부분에 방점을 맞췄다라는 것 하나.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이코모스라고 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서 결과를 냈던 것이 등재 보류라는 결과를 내면서 전체 역사를 기술하라는 것과 현장에 반영하라고 하는 결과를 냈습니다. 이러한 평가들을 보면서 우리 정부도 조금 더 실천이라는 부분에 방점을 맞춰서 결국에는 합의를 해 준 것으로 여겨집니다.
[앵커]
그러니까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분명하게 알리겠다라는 권고를 했고 또 그리고 그 약속을 일본이 했기 때문에 이번 등재에서 한일 간에 합의가 이뤄졌다는 말씀이신데 실제로 사도섬에서 공개된 박물관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가혹한 노동조건을 보여주는 전시관이 마련됐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 그리고 또 우리 정부가 요구해왔던 조치와 부응하는지가 관심인데 어떻게 보십니까?
[최은미]
우선 당시에 조선인 노동자가 굉장히 가혹한 환경에 있었다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보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더 어렵고 힘든 일을 더 많이 했다라는 부분에 대해서 기술이 되어 있고 이러한 부분이 현장에 설치가 되어 있다, 그리고 기술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했던 강제성에 대한 부분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제대로 기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은 아쉽다라고 여겨질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추모하고 기억을 하겠다고 해서 추도식을 매년 개최를 하기로 했는데요. 이러한 부분은 올해 안에 개최가 된다라고 해서 지켜볼 부분인 것 같습니다.
[앵커]
나름대로 평가할 만한 부분은 있다라고 말씀을 해 주셨지만 그런데 이번에 강제동원이라는 표현은 명시돼 있지 않다라는 비판도 있거든요. 그리고 또 전시관이 실제 광산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최은미]
강제성이라고 하는 것은 양측이 합의를 이룬 부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보고요. 이러한 차원에서는 역시나 아쉬운 부분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 노동자가 처했던 현실에 대해서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알린다라는 차원에서 조금 더 향후에 진전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해보고요. 위치 관련해서는 조금 떨어져 있다라고 하는 지적이 있기는 한데 사도광산에 방문을 할 때 항상 많이 사람들이 방문을 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방금 자료화면에서도 지나갔던 것 같은데요. 그곳에서 불과 차량으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크게 그 부분은 많이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마는 역시나 광산 바로 그 장소에다가 조금 더 설치할 부분이 있는 것 같고요. 제가 조금 더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현장에 설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도 사도광산에 대해서 검색했을 때 나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설명하는. 그런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해서는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추후에 이런 부분들도 보완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앵커]
그러면서 함께 주목받고 있는 게 지난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메이지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그때는 무엇이 쟁점이 됐습니까?
[최은미]
그때는 강제성이라고 하는 표현들이 쟁점이 됐었고요. 결국에는 우리는 폴스트 워크라고 해서 강제노역이라고 주장을 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라고 해서 어게인스트 데어라는 표현을 썼죠. 이러한 부분이 사실 표현을 바꿈으로써 강제성을 희석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리고 전체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일정 부분만 기록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할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들이 크게 문제가 됐었습니다.
[앵커]
앞서서 군함도 때와 이번 사도광산 때의 차이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설명을 해 주시기는 했습니다마는 군함도 때보다는 이번이 조금 더 진전된 결과다, 이렇게 평가하십니까?
[최은미]
우선은 말로써 약속을 했던 게 2015년도였다고 하면 지금은 이번 같은 경우에는 그 약속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제부터 전시실이 공개가 되기도 시작을 했고 실천으로써 보여준 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수준까지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여전히 과제는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일본 정부가 어디까지 이행해야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은미]
우선 기록을 남기고 기억하고 추모한다라고 하는 측면에서 봤을 때는 당시 가혹한 환경에 대해서는 기록을 했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이 그 당시에 왜 거기에 왔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이 됐는지, 최소 1500명 이상이 있다고 해요.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명확히 기술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이렇게 이번에 발표될 때는 주목을 받겠지만 앞으로 이런 부분이 점점 잊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성의 있는 노력, 즉 정부 차원에서 관련된 인사를 계속 보낸다든지라는 그런 진정성 있고 성의 있는 모습들이 보여져야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우리 국민도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지켜봐야겠습니다. 여기까지 말씀 나누겠습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과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박희재 (parkhj0221@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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