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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15:10~16:00)
■ 진행 : 김혜민 PD
■ 대담 : 김월용 한국폴리텍 대학 인천캠퍼스 학장
[생생경제] 탄광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폴리텍 학장으로! 인생 3모작 주인공에게 듣는다!
◇ 김혜민 PD(이하 김혜민)> 매주 수요일 이 시간, 변화되는 직업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입니다. ‘배움이 일자리다.’ 오늘은 인생 2모작, 아니 인생 3모작을 직접 하신 분을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조금 간단하게 이분의 인생을 요약하면요. 열여덟 살부터 스물여섯 살까지 가난한 집안 환경으로 탄광에서 일을 하고요. 이후 사업가 및 아주 다양한 직업인으로 변신하셨습니다. 쉰셋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치루고,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전체 수석으로 합격해서 쉰다섯에 석사학위를 딴 분입니다. 한국폴리텍 대학 인천캠퍼스 김월용 학장 나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학장님?
◆ 김월용 한국폴리텍 대학 인천캠퍼스 학장(이하 김월용)>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김혜민> 제가 짧게 학장님의 인생에 대해 브리핑을 청취자분들께 해드렸는데,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현재 폴리텍 대학 학장으로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 김월용> 네, 감사합니다. 서로 모두의 입장이 다를 수 있는데, 학교 소개와 더불어서 또 개인적 신상도 소개하시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송구합니다. 저는 50년 역사의 한국 폴리텍 대학 소속으로 인천·경기 일부를 권역으로 하는 2대 학장으로 있습니다. 우리 대학은 현재 사회 다변화로 인한 새로운 산업들에 의해서 대규모 실직하는 분들을 위한 지원과 청년층 새내기 취업에서부터 인생 2막을 위한 취업과 창업 지원, 또는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과 재교육 등 원활한 취업과 양질의 일자리 제공 등의 역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사실 5천 년 동안 있던 농업 국가에서 산업 기술 국가로 도약했던 길목에 수많은 기술 인재를 배출했던 것이 우리 대학이었습니다. 이제 국가가 제2 도약의 명훈을 걸어야 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요한 시기에 와 있습니다. 우리 대학의 역할은 더 확대될 것입니다. 기술 혁신의 돌파는 우리 대학과 같은 이공계 기술자 양성으로 특화된 기술로 실현될 것이고, 이 또한 국가 발전에 기반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 김혜민> 오늘 학장님 인생 자랑하라고 나오시라고 했는데, 학교 자랑을 이렇게 해주셨어요. 아마 지금 몸담고 있는 학교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아까 5천 년 농업 국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5천 년 농업 국가로 지내다가 사실 급속도로 산업화를 겪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을 겪고 있고, 앞으로 그 파도 가운데 우리 삶이 들어갈 것 같은데, 그래서 이제는 평생직장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학장님 직업을 엄청 많이 바꾸셨더라고요. 직업 몇 개 있으셨어요?
◆ 김월용> 네, 아마 수십 개 정도 될 겁니다. 말씀하셨듯이 정말 과거에는, 우리 아버지 때에는 90%는 농부였지만, 지금은 아니잖습니까? 어제의 꿈이 오늘 사라지는 게 현실입니다. 저 역시 탄광의 광부라든가, 기계공, 또는 인천시의 교육문화특보라든가, 다양한 기업 경영과 교수, 또 이사장 등 많은 이력만큼 수많은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수많은 벽을 넘었죠. 저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러나 돌아보면 그 환경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 김혜민> 가난한 상황, 환경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결국 돌아보니 그 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렇게 고백하셨는데요. 사실 많은 성공한 사람들한테 듣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학장님도 스스로를 석탄 수저라고 부르시더라고요? 흙수저, 금수저도 아니고, 나는 석탄 수저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부르십니까?
◆ 김월용> 사실 저를 아는 분이 그렇게 지어줬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제가 교수 신분으로 권역 대학장의 지위인 자리에 있지만, 원래 정규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습니다. 어릴 때 누구나 꿈이 컸겠지만, 저도 법관이나 교수가 되고 싶었죠. 그러나 가난해서 이룰 수 없음을 아는 순간, 아, 돈을 벌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부자가 되고 싶단 생각으로 전환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 페인트공, 건설 노동자, 수도 없이 많은 직업을 전전하다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그때 돈을 가장 많이 준다는 탄광에 입사했습니다.
◇ 김혜민> 그러면 초등학교 졸업하고 그때부터 생계 전선에 뛰어드신 거예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 김혜민> 세상에. 저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 아이의 심정이 느껴져요. 고생을 말할 것 없이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그러다 열여덟 살 때, 그 당시 돈을 가장 많이 준다고 하는 탄광에 들어가신 거군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태백에 있는 탄광 기계 제작 설치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사실은 20살이라고 한 살 속이고 들어갔죠. 강원도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는데, 시커먼 갱 속에서 일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을 아실 겁니다. 발파 사고나 갱 붕괴 등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 김혜민> 돈을 많이 주는 이유가 있는 거죠.
◆ 김월용> 네, 제 동료들도 사실은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도 광부 월급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갱도를 전환하는 일을 했고요. 해발 700m에서부터 내려간 시커먼 갱 지하 막장 1,000m까지 내려갔습니다. 나오면 사실 얼굴이고, 몸이고, 세상도 꿈도 까맸죠. 천지가 석탄 가루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혜민> 그러다가 26세에 광부를 그만두시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어떤 계기로 그렇게 그만두고, 사업을 하게 되셨습니까?
◆ 김월용> 사실 당시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광부로 있어도 정말 어려서부터 병원에 계신 부모님 약값이나 생활비를 버는 것이 큰 보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꿈은 석탄에 채색되었다가 사라져버린 시절이었죠. 그렇게 8년이 지났는데, 오랜 병석에 계시던 부모님께서 제가 26살 되던 해에 석 달 차로 어린 동생들 셋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 김혜민> 두 분이 동시에요? 26살에?
◆ 김월용> 네.
◇ 김혜민> 정말 청천벽력이셨겠습니다.
◆ 김월용> 그렇습니다. 바로 표현해주셨는데요. 정말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58살, 제 나이보다 더 적은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탄광에서 일하는 아들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돌아가시면서 나를 탄광에서 꺼내줬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김혜민> 그 당시에는 그런데 그렇게 생각 못 하셨을 것 아니에요? 부모님의 죽음이 너무 아프니까요. 어떻게 보면,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이 삶의 동력이었을 텐데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아까 말씀하신 금수저, 흙수저, 그런데, 저는 도시락을 흙수저도 아닌 석탄으로 먹었으니까 저는 석탄 수저 출신이 맞습니다. 그때 어머님이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의 공부를 못 시킨 것이 한이다, 또 광부를 하는 것도 정말로 나는 한스럽다, 내가 혹시 죽거든 그다음에 서울로 가거라, 하는 유언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8년 동안의 탄광 생활을 그만두고 상경했죠. 저는 비로소 저의 꿈 하나하나를 디자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석탄 수재에서 지금의 교육 전문가로 진화한 것은 어머님의 유지가 있었다고 봅니다.
◇ 김혜민> 그러니까 26살 때 어떻게 보면, 제2 인생의 서막이 열린 거였네요. 어머니,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이제 생계를 유지하는 데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꿈을 꾸게 되셨는데, 이야기만 들어도 정말 학장님의 삶이 녹록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젊은 혈기에 자신의 환경에 대해 비관할 수도 있었잖아요? 포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도망갈 수도 있고요. 그런데 계속해서 노력할 수 있었던 비법이 있으시다면요?
◆ 김월용> 밤에는 매일 좌절이었지만, 아침에는 또다시 희망이 있었죠. 사실 요즘 젊은이들이 쉽게 좌절하는 이유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목표를 너무 높게 잡으면 오히려 독이 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또 너무 행복해지려고 하면 불행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높게 잡으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목표부터 잡고, 그 목표를 이뤄나가면서 행복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 김혜민> 그러면 26살 때 새로 잡은 목표가 뭐가 있으셨어요?
◆ 김월용> 그때 교수가 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죠. 그러나 그 꿈 너머를 내다보고, 새로운 목표를 디자인하는 과정 자체가 곧 실력이 되고, 꿈을 이루면서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하기가 너무 괴로운 절망의 시절이 많았습니다. 좌절의 벽은 저한테 오히려 새로운 문이었습니다. 막막하게 막혀버려서 돌파하기 어려웠던 한계도 한 번 더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저는 경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또 어렸을 때부터요. 저는 세상을 치열하게 몸으로 부딪쳐서 살았기 때문에 몸으로 배워야 스스로 기억하고, 작동하고, 자산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혜민 스님께서는 멈추면 보인다고 했지만, 저는 멈추면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멈추면 꿈도 꾸게 되지 않고, 무엇도 하기 싫고, 어떤 모임이나 또 부름에도 가기 싫으면, 이미 퇴화의 시작입니다. 멈추면 생각도 멈추고, 몸도 화석화된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사실 퇴화와 유지와 진화의 부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늘 진화 형 인간을 지향합니다. 진화하지 않으면 제가 버려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죠.
◇ 김혜민> 지금 학장님께서 자신의 삶과 함께 삶을 통해 어떤 것들을 성찰하셨고, 몸으로 정말 부딪치며 깨달았는지를 우리 청취자분들께 말씀해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저부터도 이렇게 고생하면서 사신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영화 같아요. 정말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런 환경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요. 지난주에 저희가 이 시간에 4년제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 훈련을 소개해드렸어요. 청년들 많이 만나실 것 같은데, 이런 청년기를 보낸 분으로서 요즘 청년들한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 김월용> 제가 살아왔던 과거가 요즘 청년들한테는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김혜민> 그렇죠. 저부터도 그런 일이 정말 있나? 이런 생각을 하니까요.
◆ 김월용> 그래도 불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세종대왕께서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오신다면, 아마 공부하는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고 볼 겁니다. 변화에 따라서 저도 기술자가 되기도 했고, 사업가, 교수, 여러 도전을 통해서 꿈과 목표를 재조정했고, 또 수정했습니다. 그 목표를 이룬 후에는 바로 다음 꿈으로 전환하는 꿈 너머 꿈을 기획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산하 캠퍼스를 순회하면서 특강 등을 통해서 학생들과 많이 소통하는 편입니다. 학생부터 사회 경험을 하고 재입학하는 학생, 또는 경력단절로 재취업을 하는 학생과 또는 은퇴 후에 오는 학생, 또 대학 졸업 후에 잘못된 전공 전환을 위해서, 전공 세탁이죠. 그런 학생까지 우리 대학은 학생증이 정말 다양합니다.
◇ 김혜민> 그래서 그런 청년들 대상으로 강의도 많이 하신다고 하는데, 학장님 강의 들으면 반응들이 어떻습니까?
◆ 김월용> 죄송하지만 정말 학생들의 환호가 대단합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진짜 우수하고, 반듯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잘된다는 생각도 하는데요. 피디님께서 혹시 기회가 돼서 우리 학교에 방문해보시면, 진짜 친절하고, 예절 바른 학생 때문에, 또 교수님들의 실력 있는 모습에 놀라실 겁니다. 탄광의 광부였던 제가 소년이 직업 훈련소에서 기술을 배웠던 청년 시절에 수많은 벽을 넘었고, 지금의 학장 자리에 와있듯이 학생들에게 제2, 제3, 제4의 도전을 통해서 이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자리가 될 수 있고, 더 많이 갈 수 있다고 자신감을 넣어줍니다.
◇ 김혜민> 청년들에게도 이런 깨달음을 주시는데, 이제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시는, 우리 방송을 듣고 있는 분들 중에 50대 이상 되시는 분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고 싶으세요?
◆ 김월용> 네, 사실 50이 넘은 분들한테 저는 50 넘어서 인생을 시작했다고, 정말 인생의 답안지를 받아보는 게 50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때 살아왔던 것을 반추해보면서 하나하나 옛날에 배웠던 것이 소중한 자산들입니다.
◇ 김혜민> 그러니까 53세에 검정고시를 도전하셨다고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제가 승승장구하지는 않았죠. 대패도 실제로 많이 했습니다. 운이 좋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대학 졸업장 없이도 사실은 26년간 사업을 해오면서 독학으로 영어, 한문 등을 틈틈이 익혔습니다. 사업과 관련한 공부와 필요한 법률은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배웠지만, 그래서 사업가로 특별한 지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늦기 전에, 이미 늦었지만, 또 도전이었고, 꿈 너머 꾸고 있었던 교수가 되려고 보니 벽이 참 많았습니다.
◇ 김혜민> 교수를 하고 싶다는 꿈을 다시 꾸게 되셨군요.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만 나온 학력이 문제가 됐고, 그래서 검정고시를 보게 되신 거고요.
◆ 김월용> 네, 제가 사실은 사업을 여러 가지를 했는데요. 규모 있게 사업도 성장시켰습니다. 그런데 제 꿈을 실현해서 교육을 하려고 보니, 또 특강을 하려고 보니 벽이 있었습니다. 우리 총장님 추천으로 교수를 하려고도 했는데, 사회는 저에게 실력보다는 공적으로 너를 입증하라는 ‘증’을 끊임없이 요구해왔습니다. 참 벽이었죠. 그런데 그 벽이었다고 생각했던 장애가 오히려 저를 사업가의 꿈 너머에서 잠자고 있던 다른 나의 꿈이 열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주저 없이 아까 말씀하신 50대 중반에 접어든 그때 불을 당겼습니다. 그때 벽이 문이 되었고, 남들이 인생 3막, 4막 하는데요. 저에게는 인생의 10막쯤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 김혜민> 네, 벽이 곧 문이 되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아까 제가 짧게 말씀드렸지만, 쉰셋에 검정고시 도전해서 중학교 과정은 2월에 합격하고, 같은 해 8월에 고등학교 과정도 합격해서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하셨고요. 55세에 정책학 석사 학위를 또 취득했습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계산한다면, 만 4년 만에 정규 13년 과정의 석사 학위를 해내신 거잖아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 김혜민> 정말 대단하십니다. 오늘 왜 저희가 이분을 모셔서 배움이 일자리다, 라는 코너를 진행하고 있는지 청취자 여러분들이 느끼실 것 같습니다. 백 세 시대에 정말 배우는 것, 너무 중요하고요. 그 배움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되기도 합니다. 학장님, 정말 50대 이후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직업을 선택하실 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김월용> 혹시 50 넘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아까 피디님께서 질문하셨던 학력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제 학력은 가족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로 콤플렉스의 아픔을 안고 다녔죠. 50대 중반에 검정고시에 도전해서 중학교 과정을 그해 2월에 합격하고, 같은 해 8월에 고등학교 과정에 합격해서 대학교 입학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젊은 친구들도 합격하는 독학사 시험이 가장 빨랐기 때문에 거기에 도전해서 기술 자격증과 더불어서 155학점, 사실 불가능한 학점이잖아요. 교육부에서는 유례가 없다고 저한테 인터뷰도 했었는데, 저는 그때도 학력 사항을 알리는 것이 부끄러워서 거절했습니다. 그해 바로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전체 수석으로 합격해서 장학금을 받고, 석사를 받았고요. 지금은 사실 박사까지 받았습니다. 공학 박사를 받았으니까 13년 과정까지 다 한 것을 다 4년 만에 했고요. 3년 만에 박사 과정을 받았기 때문에 정말 빨리 달려왔었죠. 제가 공부를 병행하면서 일도 계속하고 있었고요. 공부만 했던 것이 사실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높게 보기보다 오히려 깊게, 넓게 보려고 나이 먹으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김혜민> 우리 50대에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고자 하는 분들이 오늘 학자님의 삶을 통해 높게 보기보다는 깊게 보신다고 하셨는데요. 그 말이 굉장히 도전이 되고,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폴리텍 대학, 저희가 매주 수요일마다 여러분들께 안내해드려요. 고용노동부에서 산하로 함께 있는 폴리텍 대학인데요. 여기서 누구나 공부하고,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교육 과정이 갖추어져 있으니까 관심 많으신 분들, 한 번 알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학장님, 마지막으로요. 2018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 해 동안 나는 뭐 했나, 지금 학장님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도대체 내 인생은 뭐 했나, 이렇게 후회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요. 이런 분들께 짧게 한 말씀 해주실까요?
◆ 김월용> 네,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1, 2, 3차 산업을 경험한 세대로 격변의 세대를 거치면서 경험을 축적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그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폴리텍 대학은 아까 피디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15세 이상 전 국민 누구나 공부하고, 기술을 배우면서 자기 발전 시대의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러 과정이 있고요. 실제로 고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기술 교육도 해서 보내기 때문에 누구나 도전하셔도 좋고요. 특히 올해는 기술과 미래 직업의 가치를 잘 아는 우리 대학의 이석행 이사님이 오셔서 구성원들의 기대가 큽니다. 많은 혁신적인 발전을 하리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 학교 대학로에 이런 문구를 걸어뒀습니다. “인사는 최대의 권력이고, 예절은 최고의 자산이다, 교육의 출발은 인사이며, 예절은 최고의 지성이다, 진화하는 기술, 앞서가는 진화 학교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승부는 실력이지만, 그 정상의 승부로 가기까지는 인사와 예절을 갖추고 인문학을 융합한 기술을 겸비한 인재 형성이 곧 경쟁력”이라고 봅니다.
◇ 김혜민> 우리 매주 수요일마다 자세하게 인생 이모작을 꿈꾸는 분들이 어떤 교육을 받으실 수 있는지 저희가 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기대하고, 이 코너 계속해서 들어주시고요. 지금 8106님께서 “배움이 끝은 없다고 하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많은 깨달음을 주시네요.”하고 문자 보내주셨습니다.
◆ 김월용> 감사합니다.
◇ 김혜민> 오늘 ‘배움이 일자리다,’ 한국 폴리텍 대학 인천 캠퍼스 김월용 학장과 함께했습니다. 학장님, 고맙습니다.
◆ 김월용> 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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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김혜민 PD
■ 대담 : 김월용 한국폴리텍 대학 인천캠퍼스 학장
[생생경제] 탄광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폴리텍 학장으로! 인생 3모작 주인공에게 듣는다!
◇ 김혜민 PD(이하 김혜민)> 매주 수요일 이 시간, 변화되는 직업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입니다. ‘배움이 일자리다.’ 오늘은 인생 2모작, 아니 인생 3모작을 직접 하신 분을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조금 간단하게 이분의 인생을 요약하면요. 열여덟 살부터 스물여섯 살까지 가난한 집안 환경으로 탄광에서 일을 하고요. 이후 사업가 및 아주 다양한 직업인으로 변신하셨습니다. 쉰셋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치루고,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전체 수석으로 합격해서 쉰다섯에 석사학위를 딴 분입니다. 한국폴리텍 대학 인천캠퍼스 김월용 학장 나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학장님?
◆ 김월용 한국폴리텍 대학 인천캠퍼스 학장(이하 김월용)>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김혜민> 제가 짧게 학장님의 인생에 대해 브리핑을 청취자분들께 해드렸는데,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현재 폴리텍 대학 학장으로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 김월용> 네, 감사합니다. 서로 모두의 입장이 다를 수 있는데, 학교 소개와 더불어서 또 개인적 신상도 소개하시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송구합니다. 저는 50년 역사의 한국 폴리텍 대학 소속으로 인천·경기 일부를 권역으로 하는 2대 학장으로 있습니다. 우리 대학은 현재 사회 다변화로 인한 새로운 산업들에 의해서 대규모 실직하는 분들을 위한 지원과 청년층 새내기 취업에서부터 인생 2막을 위한 취업과 창업 지원, 또는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과 재교육 등 원활한 취업과 양질의 일자리 제공 등의 역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사실 5천 년 동안 있던 농업 국가에서 산업 기술 국가로 도약했던 길목에 수많은 기술 인재를 배출했던 것이 우리 대학이었습니다. 이제 국가가 제2 도약의 명훈을 걸어야 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요한 시기에 와 있습니다. 우리 대학의 역할은 더 확대될 것입니다. 기술 혁신의 돌파는 우리 대학과 같은 이공계 기술자 양성으로 특화된 기술로 실현될 것이고, 이 또한 국가 발전에 기반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 김혜민> 오늘 학장님 인생 자랑하라고 나오시라고 했는데, 학교 자랑을 이렇게 해주셨어요. 아마 지금 몸담고 있는 학교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아까 5천 년 농업 국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5천 년 농업 국가로 지내다가 사실 급속도로 산업화를 겪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을 겪고 있고, 앞으로 그 파도 가운데 우리 삶이 들어갈 것 같은데, 그래서 이제는 평생직장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학장님 직업을 엄청 많이 바꾸셨더라고요. 직업 몇 개 있으셨어요?
◆ 김월용> 네, 아마 수십 개 정도 될 겁니다. 말씀하셨듯이 정말 과거에는, 우리 아버지 때에는 90%는 농부였지만, 지금은 아니잖습니까? 어제의 꿈이 오늘 사라지는 게 현실입니다. 저 역시 탄광의 광부라든가, 기계공, 또는 인천시의 교육문화특보라든가, 다양한 기업 경영과 교수, 또 이사장 등 많은 이력만큼 수많은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수많은 벽을 넘었죠. 저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러나 돌아보면 그 환경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 김혜민> 가난한 상황, 환경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결국 돌아보니 그 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렇게 고백하셨는데요. 사실 많은 성공한 사람들한테 듣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학장님도 스스로를 석탄 수저라고 부르시더라고요? 흙수저, 금수저도 아니고, 나는 석탄 수저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부르십니까?
◆ 김월용> 사실 저를 아는 분이 그렇게 지어줬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제가 교수 신분으로 권역 대학장의 지위인 자리에 있지만, 원래 정규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습니다. 어릴 때 누구나 꿈이 컸겠지만, 저도 법관이나 교수가 되고 싶었죠. 그러나 가난해서 이룰 수 없음을 아는 순간, 아, 돈을 벌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부자가 되고 싶단 생각으로 전환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 페인트공, 건설 노동자, 수도 없이 많은 직업을 전전하다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그때 돈을 가장 많이 준다는 탄광에 입사했습니다.
◇ 김혜민> 그러면 초등학교 졸업하고 그때부터 생계 전선에 뛰어드신 거예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 김혜민> 세상에. 저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 아이의 심정이 느껴져요. 고생을 말할 것 없이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그러다 열여덟 살 때, 그 당시 돈을 가장 많이 준다고 하는 탄광에 들어가신 거군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태백에 있는 탄광 기계 제작 설치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사실은 20살이라고 한 살 속이고 들어갔죠. 강원도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는데, 시커먼 갱 속에서 일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을 아실 겁니다. 발파 사고나 갱 붕괴 등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 김혜민> 돈을 많이 주는 이유가 있는 거죠.
◆ 김월용> 네, 제 동료들도 사실은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도 광부 월급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갱도를 전환하는 일을 했고요. 해발 700m에서부터 내려간 시커먼 갱 지하 막장 1,000m까지 내려갔습니다. 나오면 사실 얼굴이고, 몸이고, 세상도 꿈도 까맸죠. 천지가 석탄 가루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혜민> 그러다가 26세에 광부를 그만두시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어떤 계기로 그렇게 그만두고, 사업을 하게 되셨습니까?
◆ 김월용> 사실 당시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광부로 있어도 정말 어려서부터 병원에 계신 부모님 약값이나 생활비를 버는 것이 큰 보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꿈은 석탄에 채색되었다가 사라져버린 시절이었죠. 그렇게 8년이 지났는데, 오랜 병석에 계시던 부모님께서 제가 26살 되던 해에 석 달 차로 어린 동생들 셋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 김혜민> 두 분이 동시에요? 26살에?
◆ 김월용> 네.
◇ 김혜민> 정말 청천벽력이셨겠습니다.
◆ 김월용> 그렇습니다. 바로 표현해주셨는데요. 정말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58살, 제 나이보다 더 적은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탄광에서 일하는 아들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돌아가시면서 나를 탄광에서 꺼내줬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김혜민> 그 당시에는 그런데 그렇게 생각 못 하셨을 것 아니에요? 부모님의 죽음이 너무 아프니까요. 어떻게 보면,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이 삶의 동력이었을 텐데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아까 말씀하신 금수저, 흙수저, 그런데, 저는 도시락을 흙수저도 아닌 석탄으로 먹었으니까 저는 석탄 수저 출신이 맞습니다. 그때 어머님이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의 공부를 못 시킨 것이 한이다, 또 광부를 하는 것도 정말로 나는 한스럽다, 내가 혹시 죽거든 그다음에 서울로 가거라, 하는 유언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8년 동안의 탄광 생활을 그만두고 상경했죠. 저는 비로소 저의 꿈 하나하나를 디자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석탄 수재에서 지금의 교육 전문가로 진화한 것은 어머님의 유지가 있었다고 봅니다.
◇ 김혜민> 그러니까 26살 때 어떻게 보면, 제2 인생의 서막이 열린 거였네요. 어머니,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이제 생계를 유지하는 데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꿈을 꾸게 되셨는데, 이야기만 들어도 정말 학장님의 삶이 녹록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젊은 혈기에 자신의 환경에 대해 비관할 수도 있었잖아요? 포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도망갈 수도 있고요. 그런데 계속해서 노력할 수 있었던 비법이 있으시다면요?
◆ 김월용> 밤에는 매일 좌절이었지만, 아침에는 또다시 희망이 있었죠. 사실 요즘 젊은이들이 쉽게 좌절하는 이유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목표를 너무 높게 잡으면 오히려 독이 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또 너무 행복해지려고 하면 불행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높게 잡으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목표부터 잡고, 그 목표를 이뤄나가면서 행복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 김혜민> 그러면 26살 때 새로 잡은 목표가 뭐가 있으셨어요?
◆ 김월용> 그때 교수가 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죠. 그러나 그 꿈 너머를 내다보고, 새로운 목표를 디자인하는 과정 자체가 곧 실력이 되고, 꿈을 이루면서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하기가 너무 괴로운 절망의 시절이 많았습니다. 좌절의 벽은 저한테 오히려 새로운 문이었습니다. 막막하게 막혀버려서 돌파하기 어려웠던 한계도 한 번 더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저는 경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또 어렸을 때부터요. 저는 세상을 치열하게 몸으로 부딪쳐서 살았기 때문에 몸으로 배워야 스스로 기억하고, 작동하고, 자산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혜민 스님께서는 멈추면 보인다고 했지만, 저는 멈추면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멈추면 꿈도 꾸게 되지 않고, 무엇도 하기 싫고, 어떤 모임이나 또 부름에도 가기 싫으면, 이미 퇴화의 시작입니다. 멈추면 생각도 멈추고, 몸도 화석화된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사실 퇴화와 유지와 진화의 부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늘 진화 형 인간을 지향합니다. 진화하지 않으면 제가 버려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죠.
◇ 김혜민> 지금 학장님께서 자신의 삶과 함께 삶을 통해 어떤 것들을 성찰하셨고, 몸으로 정말 부딪치며 깨달았는지를 우리 청취자분들께 말씀해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저부터도 이렇게 고생하면서 사신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영화 같아요. 정말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런 환경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요. 지난주에 저희가 이 시간에 4년제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 훈련을 소개해드렸어요. 청년들 많이 만나실 것 같은데, 이런 청년기를 보낸 분으로서 요즘 청년들한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 김월용> 제가 살아왔던 과거가 요즘 청년들한테는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김혜민> 그렇죠. 저부터도 그런 일이 정말 있나? 이런 생각을 하니까요.
◆ 김월용> 그래도 불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세종대왕께서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오신다면, 아마 공부하는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고 볼 겁니다. 변화에 따라서 저도 기술자가 되기도 했고, 사업가, 교수, 여러 도전을 통해서 꿈과 목표를 재조정했고, 또 수정했습니다. 그 목표를 이룬 후에는 바로 다음 꿈으로 전환하는 꿈 너머 꿈을 기획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산하 캠퍼스를 순회하면서 특강 등을 통해서 학생들과 많이 소통하는 편입니다. 학생부터 사회 경험을 하고 재입학하는 학생, 또는 경력단절로 재취업을 하는 학생과 또는 은퇴 후에 오는 학생, 또 대학 졸업 후에 잘못된 전공 전환을 위해서, 전공 세탁이죠. 그런 학생까지 우리 대학은 학생증이 정말 다양합니다.
◇ 김혜민> 그래서 그런 청년들 대상으로 강의도 많이 하신다고 하는데, 학장님 강의 들으면 반응들이 어떻습니까?
◆ 김월용> 죄송하지만 정말 학생들의 환호가 대단합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진짜 우수하고, 반듯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잘된다는 생각도 하는데요. 피디님께서 혹시 기회가 돼서 우리 학교에 방문해보시면, 진짜 친절하고, 예절 바른 학생 때문에, 또 교수님들의 실력 있는 모습에 놀라실 겁니다. 탄광의 광부였던 제가 소년이 직업 훈련소에서 기술을 배웠던 청년 시절에 수많은 벽을 넘었고, 지금의 학장 자리에 와있듯이 학생들에게 제2, 제3, 제4의 도전을 통해서 이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자리가 될 수 있고, 더 많이 갈 수 있다고 자신감을 넣어줍니다.
◇ 김혜민> 청년들에게도 이런 깨달음을 주시는데, 이제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시는, 우리 방송을 듣고 있는 분들 중에 50대 이상 되시는 분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고 싶으세요?
◆ 김월용> 네, 사실 50이 넘은 분들한테 저는 50 넘어서 인생을 시작했다고, 정말 인생의 답안지를 받아보는 게 50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때 살아왔던 것을 반추해보면서 하나하나 옛날에 배웠던 것이 소중한 자산들입니다.
◇ 김혜민> 그러니까 53세에 검정고시를 도전하셨다고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제가 승승장구하지는 않았죠. 대패도 실제로 많이 했습니다. 운이 좋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대학 졸업장 없이도 사실은 26년간 사업을 해오면서 독학으로 영어, 한문 등을 틈틈이 익혔습니다. 사업과 관련한 공부와 필요한 법률은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배웠지만, 그래서 사업가로 특별한 지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늦기 전에, 이미 늦었지만, 또 도전이었고, 꿈 너머 꾸고 있었던 교수가 되려고 보니 벽이 참 많았습니다.
◇ 김혜민> 교수를 하고 싶다는 꿈을 다시 꾸게 되셨군요.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만 나온 학력이 문제가 됐고, 그래서 검정고시를 보게 되신 거고요.
◆ 김월용> 네, 제가 사실은 사업을 여러 가지를 했는데요. 규모 있게 사업도 성장시켰습니다. 그런데 제 꿈을 실현해서 교육을 하려고 보니, 또 특강을 하려고 보니 벽이 있었습니다. 우리 총장님 추천으로 교수를 하려고도 했는데, 사회는 저에게 실력보다는 공적으로 너를 입증하라는 ‘증’을 끊임없이 요구해왔습니다. 참 벽이었죠. 그런데 그 벽이었다고 생각했던 장애가 오히려 저를 사업가의 꿈 너머에서 잠자고 있던 다른 나의 꿈이 열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주저 없이 아까 말씀하신 50대 중반에 접어든 그때 불을 당겼습니다. 그때 벽이 문이 되었고, 남들이 인생 3막, 4막 하는데요. 저에게는 인생의 10막쯤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 김혜민> 네, 벽이 곧 문이 되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아까 제가 짧게 말씀드렸지만, 쉰셋에 검정고시 도전해서 중학교 과정은 2월에 합격하고, 같은 해 8월에 고등학교 과정도 합격해서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하셨고요. 55세에 정책학 석사 학위를 또 취득했습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계산한다면, 만 4년 만에 정규 13년 과정의 석사 학위를 해내신 거잖아요?
◆ 김월용> 그렇습니다.
◇ 김혜민> 정말 대단하십니다. 오늘 왜 저희가 이분을 모셔서 배움이 일자리다, 라는 코너를 진행하고 있는지 청취자 여러분들이 느끼실 것 같습니다. 백 세 시대에 정말 배우는 것, 너무 중요하고요. 그 배움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되기도 합니다. 학장님, 정말 50대 이후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직업을 선택하실 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김월용> 혹시 50 넘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아까 피디님께서 질문하셨던 학력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제 학력은 가족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로 콤플렉스의 아픔을 안고 다녔죠. 50대 중반에 검정고시에 도전해서 중학교 과정을 그해 2월에 합격하고, 같은 해 8월에 고등학교 과정에 합격해서 대학교 입학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젊은 친구들도 합격하는 독학사 시험이 가장 빨랐기 때문에 거기에 도전해서 기술 자격증과 더불어서 155학점, 사실 불가능한 학점이잖아요. 교육부에서는 유례가 없다고 저한테 인터뷰도 했었는데, 저는 그때도 학력 사항을 알리는 것이 부끄러워서 거절했습니다. 그해 바로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전체 수석으로 합격해서 장학금을 받고, 석사를 받았고요. 지금은 사실 박사까지 받았습니다. 공학 박사를 받았으니까 13년 과정까지 다 한 것을 다 4년 만에 했고요. 3년 만에 박사 과정을 받았기 때문에 정말 빨리 달려왔었죠. 제가 공부를 병행하면서 일도 계속하고 있었고요. 공부만 했던 것이 사실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높게 보기보다 오히려 깊게, 넓게 보려고 나이 먹으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김혜민> 우리 50대에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고자 하는 분들이 오늘 학자님의 삶을 통해 높게 보기보다는 깊게 보신다고 하셨는데요. 그 말이 굉장히 도전이 되고,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폴리텍 대학, 저희가 매주 수요일마다 여러분들께 안내해드려요. 고용노동부에서 산하로 함께 있는 폴리텍 대학인데요. 여기서 누구나 공부하고,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교육 과정이 갖추어져 있으니까 관심 많으신 분들, 한 번 알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학장님, 마지막으로요. 2018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 해 동안 나는 뭐 했나, 지금 학장님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도대체 내 인생은 뭐 했나, 이렇게 후회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요. 이런 분들께 짧게 한 말씀 해주실까요?
◆ 김월용> 네,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1, 2, 3차 산업을 경험한 세대로 격변의 세대를 거치면서 경험을 축적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그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폴리텍 대학은 아까 피디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15세 이상 전 국민 누구나 공부하고, 기술을 배우면서 자기 발전 시대의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러 과정이 있고요. 실제로 고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기술 교육도 해서 보내기 때문에 누구나 도전하셔도 좋고요. 특히 올해는 기술과 미래 직업의 가치를 잘 아는 우리 대학의 이석행 이사님이 오셔서 구성원들의 기대가 큽니다. 많은 혁신적인 발전을 하리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 학교 대학로에 이런 문구를 걸어뒀습니다. “인사는 최대의 권력이고, 예절은 최고의 자산이다, 교육의 출발은 인사이며, 예절은 최고의 지성이다, 진화하는 기술, 앞서가는 진화 학교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승부는 실력이지만, 그 정상의 승부로 가기까지는 인사와 예절을 갖추고 인문학을 융합한 기술을 겸비한 인재 형성이 곧 경쟁력”이라고 봅니다.
◇ 김혜민> 우리 매주 수요일마다 자세하게 인생 이모작을 꿈꾸는 분들이 어떤 교육을 받으실 수 있는지 저희가 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기대하고, 이 코너 계속해서 들어주시고요. 지금 8106님께서 “배움이 끝은 없다고 하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많은 깨달음을 주시네요.”하고 문자 보내주셨습니다.
◆ 김월용> 감사합니다.
◇ 김혜민> 오늘 ‘배움이 일자리다,’ 한국 폴리텍 대학 인천 캠퍼스 김월용 학장과 함께했습니다. 학장님, 고맙습니다.
◆ 김월용> 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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