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박치기왕', 故 김일 10주기

그리운 '박치기왕', 故 김일 10주기

2016.10.25. 오후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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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던 1960~70년대.

링 위에서 벼락같은 박치기로 상대 선수를 쓰러뜨리며 국민에게 희열을 줬던 흑백 TV 속 영웅, 고 김일 선수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한국 프로레슬러 1세대로 꼽히는 김일 선수는 1929년, 전라남도 고흥의 섬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으로 소년 시절부터 씨름대회를 휩쓸었는데요.

당시 세계챔피언으로 명성을 떨치던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기사를 읽고,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한 일본행을 결심합니다.

27살이던 1956년, 일본으로 밀항했지만 적발돼 1년간 복역하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그는 끊임없이 역도산에게 편지를 썼고, 그 열정에 탄복한 역도산의 보증으로 풀려나 도쿄의 역도산 체육관에 1기 문하생으로 들어갑니다.

고된 훈련을 거친 김일 선수는 1958년, 오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데뷔합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사나이'라는 뜻으로 스승 역도산이 지어준 이름인데요.

1963년, 생애 최초로 세계 레슬링협회(WWA)의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고, 약 3천 번의 국내외 경기를 치르는 동안 20여 차례 세계 타이틀을 따냈습니다.

김일 선수의 호쾌한 경기는 당시 많은 국민에게 큰 기쁨을 안겼습니다.

사마귀처럼 머리를 뒤로 젖혔다 돌진하는 박치기로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등 내로라하는 세계 거인들을 쓰러뜨리면 전국은 환호성으로 들썩였습니다.

특히 호랑이가 그려진 가운을 입은 김일 선수가 일본 선수를 때려눕히는 광경은 민족적 울분을 씻어주기도 했습니다.

1980년 은퇴 후 후배 양성에 매진하던 김일 선수는 레슬링 후유증으로 생긴 뇌혈관 질환 등을 앓으며 오랜 기간 병마와 싸웠고, 2006년 10월 26일 타계했습니다.

후배들은 한국에 프로레슬링을 꽃피웠던 김일 선수를 잊지 않기 위해 그의 고향인 거금도에서 추모 레슬링대회를 마련했습니다.

거금도는 김일 선수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 고향에 전기가 들어가도록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는 곳이기도 한데요.

가슴 따뜻한 박치기왕을 기리는 뜻깊은 무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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