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해보니 시리즈로<기상캐스터의 하루>라는 아이템이 통과되어, 권혜인 기상캐스터가 섭외되는 순간부터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심박 수는 지나치게 높았고 '심장이 고장 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으나, 이것은 분명 설렘이었다.
입사 5개월 차인 권혜인 기상캐스터가 유명해진 계기는 지난 7월 13일. 망원 야외 수영장에서의 날씨 중계 때문이다. 이후 그는 ‘물놀이 전문 기상캐스터’라는 애칭을 시작으로 '날씨의 여신'이 됐다. 팀장의 추진력은 여신과 만남을 빠르게 성사시켰다. 팀장! 사.... 사랑합니다.
아니,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비극의 출발은 나의 '사심'이었던 것 같다. 모 선배의 말처럼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지만,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구를 탓하랴. 취재로 사심을 채우고자 했던 나의 잘못이었다.
기사를 대하소설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꼬박 10시간을 동행하여 초밀착 취재하는 동안 1,093장, 3.25GB의 사진과 11페이지 분량의 취재 메모가 남았다. 기사를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8페이지가 마지노선이었다.
기상캐스터는 분 단위로 움직인다. 시간에 쫓기고 숫자와 싸우는 그들의 하루를 짧지만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으앙~ 이건 진짜 안돼요!" '쌩얼'의 권혜인 캐스터를 처음 만난 것은 9일 오전 9시 20분. 첫 스케줄은 10시 56분이지만 여신께서는 준비성도 철저했다. 만나자마자 카메라 촬영을 시작하니 화장도 안 한 민낯은 새빨간 홍당무가 됐다. 그렇게 나는 청초한 그의 민얼굴을 보았다.
"오늘 의상 마음에 들어요!" 그가 좋다니 나도 좋았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모든 날이 좋았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커피를 사러 간다는 그를 따라 2층 카페로 향했다. 승천하는 광대를 붙잡을 길은 없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여기서 얼마나 쉬어요?" 내심 여유로운 대화를 기대하며 물어봤다.
"네? 주문한 커피 나오면 바로 올라가는데…" 그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주문한 커피와 수박 주스가 영원히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
점심은 어디서 먹을까? 권혜인 캐스터는 무슨 음식을 좋아할까? 역시 파스타를 먹어야 하나? 두근두근하며 질문했지만,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상청 예보통보문이 새벽 5시, 오전 11시, 17시, 23시에 나와요. 보통 13시 30분, 14시, 17시 30분에 생중계가 있는데 오늘은 14시 대신 15시 20분으로 스케줄이 변경됐어요. 통보문 바탕으로 생중계 기사 쓰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리고 호우경보나 특보들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해서 스크롤 뉴스 넘겨야 하고.. 아 참고로 10시 56분, 11시 56분 12시 56분, 16시 56분 라디오 방송이 있고, 새벽 1시랑 3시 방송도 미리 녹화해야 해요! 참고로 기상청 정보는 새벽 4시와 16시, 10일 치 날씨를 알려주는 중기는 오전 6시와 18시에 나와요."
응?
그는 그렇게 랩을 했다. 분명 한국말이었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기? 선배 이름인데.... 하루에 1분 30초 나오는 기상 예보 중계 3번만 하면 일과 끝나는 거 아니에요? 그때부터 이 기획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3층, 4층, 5층, 6층, 8층 회사를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뛰어다니며 동분서주하는 기상캐스터들. 그들에게는 '분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 일상이다. 빡빡한 일정만큼이나 새로운 정보를 기사에 반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기상청의 실시간 정보를 반영하여 즉석에서 원고를 수정한다. 새로 고침과 수정은 기상캐스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방송에 나가는 CG와 '밑그림'이라 불리는 자료화면 등도 직접 고르고 선택해 선배님들께 부탁해야 해요" 기사를 쓰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30분, 방송 직전까지 수정의 수정을 거듭한다.
"선배님들께 혼나기도 하고 많이 배우고 있는데 아직도 기사 쓰는 게 어려워요" 나도 그렇다. 기사 작성은 어렵다. 특히 지금 이 기사는 더욱 어렵다.
취재는 이미 다큐를 넘어 '노잼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먼 강을 건너 버렸다. 아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생중계 장소로 결정된 곳은 시청 앞 분수대. 출발 5분 전, 원고는 아직 미완성. "일단 움직여요! 차에서 마무리해야겠어요!"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전쟁은 이어졌다. 영상편집부에 전화해 '밑그림'을 요청하고, 그래픽도 요청한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감히 말을 붙이거나 질문할 수가 없다. 그의 미모 때문이 아니다.
이쯤 되니 말 붙이기도 민망한 상황이었다. "성현이 계 탔네!"라는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선배가 너무 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다. 조금씩 배도 고팠다. 덥고, 힘들었다.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TV 리포트 시간 이외에는 주로 어떤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꿈꿨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시청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42분. 중계팀 차량이 우리를 반겼다. 권혜인 캐스터는 이제 무아지경이다. 노트북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기세. 기사 수정은 계속됐다. 현장에 함께한 카메라 감독에게 권혜인 캐스터에 관해 물었다.
"많이 챙겨줘야 하는데 다들 힘든 환경이라 신경 못써줘서 안타까워요" 정현구 카메라 감독은 지난 7월 13일 화제의 그 방송을 만든 숨은 주역 가운데 한 명이다. 스타일은 포기한 지 오래. 무겁기도 무겁고 많기도 한 방송 장비를 손수레에 싣고 이리저리 이동해가며 당시 방송을 완성했다.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 이어졌다. "중계 장소가 어디가 될지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는데 항상 웃으면서 방송하잖아요.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죠."
기술국의 기술 감독님도 거들었다. "처음에는 막 떨더니 지금은 진짜 좋아졌지. 습득하는 속도도 빠르고. 잘해! 응~ 그럼~ 잘해!"
"혜인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혜인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스텝들 사이에서도 권혜인 캐스터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15시 방송을 위해 다시 기사를 작성한다. 차량 운전 기사님께서 피곤하셨는지 코를 고시고, 도로 공사를 해도 그는 기사를 쓴다. 그야말로 온종일 기사를 쓴다. 숫자를 고치고 또 고치고. 멘트의 순서를 바꾸고. 단어 하나, 조사 하나를 바꾼다.
어제보다 더웠는지 추웠는지 그래서 건강은 조심해야 하는지 빨래나 세차는 할 만한지. 시청자에게 조금이라도 유익하고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수정의 수정을 거듭했다.
점심을 먹을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날씨는 더워도 너무 더웠다. 가장 더운 날로 잡았다는 팀장이 보고 싶었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내 마음도 타들어 갔다. 눈에서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쏟아졌다. 현장을 촬영하며 물놀이에 심취한 아이들 덕에 나의 양말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권혜인 캐스터와 행복한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헛된 망상이었다. 머릿속에는 배고픔과 퇴근이란 단어만 존재했다.
방송 직후 권혜인 캐스터는 같은 방송만 4번을 돌려 보며, 시무룩한 눈으로 물어봤다. "겨울에 아이폰 꺼지면 어떡하죠? 핸드폰 바꿀까요?" 그는 걱정도 질문도 많았다. 당이 떨어져 점점 말이 없어지는 나와 달리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선배님! 아까 같은 경우는 제가 뭘 했으면 더 좋았을까요?" 눈빛이 반짝였다. 무슨 비타민을 먹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홍삼이나 한약이었을까.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그는 다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17시 생중계용 기사, 56분 라디오 원고 그리고 새벽 1시와 3시 방송 원고까지 챙겨야 한다. 즉 3개의 기사를 동시에 써야 하는 것이다. 몸이 3개라도 부족해 보인다.
일에 빠져 있는 권혜인 캐스터를 두고 그의 선배들에게 물었다. "긍정적이고 밝은 친구죠.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들한테 찰싹 붙어서 물어볼 정도로 친화력 있고 매사에 적극적이에요" 또 다른 날씨 여신 박희원 기상캐스터의 말이다.
정혜윤 기자는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알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권혜인 캐스터의 장점이라고 했다. "열심히 하는 친구예요, 혜인이는"
이 정도면 '극한직업'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것 같다는 나의 앓는 소리에 이들이 웃으며 답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진짜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미리 원고를 써놔도 새롭게 정보가 바뀌면 캐치해서, 다시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하니까요.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나는 떡볶이를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이런 표현이 더 좋지 않을까? 이 부분은 이렇게 써야 해"
"선배 말씀 잘 들어야 해요" 속삭이듯 말하며 그가 슬며시 웃어 보인다.
그래, 역시 선배 말씀은 잘 들어야 한다.
방송 중에도, 기사를 쓰는 중에도 그의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알람이 울린다. "방송을 잘 봤다"는 팬과 지인들의 연락. "연락이 잘 닿지 않는다"고 섭섭해할 분들께 대신 말씀드리자면, 권혜인 캐스터는 일과 중에는 휴대폰을 거의 보지 않았다.
아침에 같이 샀던 커피는 세 모금 반쯤 마신 상태로 쓸쓸히 옆에 놓여 있었다.
마지막 방송을 앞두고 6층 야외무대로 뛰어가며 작성한 원고를 암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폭염에 이어 열대야도 이번 주가 고비입니다."
"고비입니다. 고비, 고비 아아 고비 고비이 고비 고비 고비" 고비다. 나도 고비였다.
체력은 바닥 낮고 넋은 반쯤은 나간 상태였다. 나 어떡하지. 나도 고비다. 고비, 고비, 고비
"처음에는 짧은 시간에 암기해야 해서 정말 울고 싶었어요. 지금은 어느 정도 요령도 생기고 적응한 것 같아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만족한다고 했다. 드디어 마지막 생중계가 끝났다. 이제는 새벽 방송 녹화를 하러 간다.
4층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새벽 1시, 3시 방송 녹화를 끝마친 직후, 권혜인 캐스터가 소리쳤다. 덩달아 기뻤지만, 함께 5층 사무실로 복귀한 그는 자리에 앉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아까 끝났다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스크롤 뉴스 제작해야 해요!" 해맑게 웃는 얼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방송화면 아래 자막으로 나가는 스크롤 뉴스를 제작해야 한다고 했다. 끝났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장르를 완전히 잘못 알고 극장을 찾은 기분이었다.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영화 <달콤한 인생> 속 황정민의 대사가 떠올랐다.
초점 잃은 나의 두 눈은 갈 곳을 잃은 채 수첩만 바라보고 있었다. 뭘 매칭한다는 걸까. "아니, 끝났다면서요. 엉엉" 내 육체와 정신을 매칭하고 싶었다. 지금 내 눈앞에 여신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 6시 32분, 분장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진짜 일과 끝이에요!" 그렇게 웃지 마세요. 인터뷰해야 하는데… 이제 절반도 못한 이 인터뷰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고민이 시작됐다.
권혜인 기상캐스터의 솔직하고 개인적인 이야기, 2부에서 계속됩니다.
YTN PLUS 김성현 기자 (jamkim@ytnplus.co.kr)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