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2019.01.16. 오전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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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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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이승배 기자 sbi@ytn.co.kr

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야만적인 일군경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

그날은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날이었습니다.

"오전 9시,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온 천지가 진동했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열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했다.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합세하여 총검을 휘둘러댔다.“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

유중권(柳重權), 그도 3천 명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야만적인 일군경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했다" "좌 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렸다" 그의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이소제(李少悌). 그녀도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딸과 함께 목이 터지라고 독립 만세를 외쳤지만, 무자비한 총검에 맞아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유우석(柳愚錫). 당시 나이 20살. 이 청년 역시 그날 장터에 있었습니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주동자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들은 한가족입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낯선 세 사람. 하지만 가족 한 사람을 더 얘기하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유.관.순.

맞습니다. 3.1운동을 대표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러니까 유우석은 유관순 열사의 큰 오빠, 그리고 유중권·이소제는 아빠, 엄마입니다.

유관순은 3.1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가족 또한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유관순 열사 오빠의 아내, 새언니도 독립 유공자입니다. 조화벽(趙和璧). 강원도 양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엄마, 아빠에 오빠, 그리고 새언니까지, 그야말로 애국 가족입니다.


가족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 국립묘지일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어머니 묘는 '용두리 산 56-4번지', 오빠는 '산 55-4번지'입니다. 유관순 고향 마을에 있는 야산입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생가와 달리, 묘소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묘소는 생가가 있는 마을 입구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 주소를 알고 있더라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현장에 가보니, 묘소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공적도 적혀 있었습니다. 80년대 초반에 만들어선지 여기저기가 낡아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주 온 흔적은 없었습니다. 후손이 명절 때 남긴 것으로 보이는 바싹 마른 꽃다발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유제돈 마을 이장은 "나이가 있는 사람만 알지, 동네 주민도 위치가 어딘지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국립묘지 밖 3.1유공자 2,445명, 어디에?


유관순 열사 가족처럼 국립묘지 밖에 잠든 국내 3.1 유공자는 한두 명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3천 명이 넘습니다.

정확히 몇 명인지, 또 어디에 안장돼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은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유공자 안장 현황'을 기초 데이터로, 공훈전자사료관에 공개된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공적조서 데이터를 합쳐 분석했습니다.

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훈장을 받은 전체 유공자는 만5천여 명, 이 가운데 국내 3.1운동 유공자는 4,785명입니다. 이 중에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은 1,322명, 28% 정도입니다. 대다수인 72%(3,463명)는 국립묘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국내에서 묘소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619명에 불과했습니다.

화장을 해서 유골을 산에 뿌렸거나 묘지가 없어진 경우, 그리고 안장지가 북한인 사례는 제외했습니다.

나머지는 안장지 주소가 아예 없거나 일부만 적혀 있든지, 전혀 틀린 주소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2,445명이었습니다.

이분들의 묘소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정부 역시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숫자 안에 숨겨진 이야기…잊혀진 유공자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은 위치 추적이 가능한 619명을 다시 지도에 옮겨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지역별로는 충청남도가 110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경기도(105명)와 경상도(경상남도 103명, 경상북도 103명), 전라북도(61명)가 뒤를 이었습니다.

시군구로 범위를 좀 더 좁혀보면 임실군과 화성시, 홍성군, 당진시, 청양군, 함안군 순이었습니다.




위에 있는 인터랙티브 지도에 찍힌 점이 3.1 유공자 한 명 한 명이 안장된 장소입니다.

안을 들춰보면 숨겨져 있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화살표나 지도 위에 아이콘을 누르면 인물들의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 발자취를 따라가 봤습니다.

1919년 4월 1일. 유관순 열사 가족과 함께 아우내 장터에 있었던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소리 높여 대한 독립만세를 함께 외쳤던 숨어있던 유공자들입니다.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같은 날 숨진 분도 있었습니다.


"시위의 선두에 섰던 아들(김구응)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일본군은 쓰러진 김구응의 머리에 다시 총을 쏴 두개골을 무자비하게 부셔버렸다. 비보를 접한 김구응의 어머니 최정철은 달려와 아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다가, 일경의 창과 칼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66살 어머니 최정철 씨,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

충북 청원에 살던 박준규 씨. 천안에서 만세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6km 떨어진 다른 동네까지 와서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때 그도 일본 군경의 발포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출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

얼마나 지독했을까, 박영학 씨는 일본군경의 매를 맞고 순국했습니다.

"일군경에 체포되어 4월 27일 천안헌병대에서 태(笞) 60도를 맞고 빈사상태로 귀가하였으나, 그 장독(杖毒)으로 신음하다가 이듬해 7월 7일 향년 42세로 끝내 순국하였다."(출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



전수조사 4년째, 채워야할 빈칸 '가득'


국립묘지 밖에 안장된 유공자의 묘소는 '산재 묘소'라고 부릅니다. 산재(散在),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3·1 운동 독립 유공자의 경우, 국립묘지 밖의 묘소 위치가 확인된 619명과 추적 불가한 2,445명을 합한 3천64명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국립묘지와 달리 산재 묘소는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자치단체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관리는 후손들의 몫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후손도 나이가 많아서 관리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준승 선생 손자 박기수씨도 올해 일흔 세살입니다. 박 씨는 “20년 전쯤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누구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면서 “2년 전까지는 벌초도 직접 했지만 이제는 힘들어서 못한다”고 했습니다.


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정부가 이런 산재 묘소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을 해서, 유족이 원한다면 국립묘지로 옮기거나 새로 단장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조사를 시작한 건 2015년 3월부터입니다. 생각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가 파악에 나섰다는 건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결과물을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3.1운동의 경우, 정확히 어디에 안장돼 있는지 위치를 알 수 없는 국내 유공자가 2천4백 명이 넘습니다.

전체 독립유공자로 범위를 넓혀보면 8천2백 명으로 늘어납니다. 국립묘지 밖에 안장된 국내 독립유공자 가운데 87%입니다.

수치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정부가 집계한 데이터를 보면, 8천2백 명은 5가지 잣대로 구분돼 있습니다.

'소재불명'과 '확인불능', '국내산재', '외국인' 그리고 아예 안장지 주소가 없는 경우입니다.

'소재불명'은 453명, '확인불능'은 1,213명 그리고 안장지 주소가 없는 경우는 5,529명입니다.

'외국인'은 69명인데, 이 중 15명은 안장지란에 미국, 중국, 대만처럼 외국으로 추정되는 지명이 적혀 있습니다. 정부 자료에서는 '국외소재'라는 기준이 별도로 있지만 이 데이터는 빠져있습니다.

주소가 아예 없으면, 아직 조사가 안 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소가 두루뭉술하게 적힌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국내산재'로 구분된 937명이 이런 경우입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 ○○펜션 주차장 오른편 밭’
'경북 영천시 임고면 효리(효동마을 2km)
'경북 안동시 화성동 (○○테니스장 뒷 산길 500m 이내)’


위 주소만 봐서는 묘소 위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조사는 하긴 했지만, 실제로 가보지 않은 겁니다. 유공자 가족이 말하는 대로 그대로 옮겨 적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안장지 위치를 모른다는 건 국가가 독립운동가 묘역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 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친일파는 국립묘지에 안장까지 하는 판에 정작 독립운동가 묘역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많은 담당자들이 현실적인 한계를 토로했습니다. 조사를 여러 명이 아니라 혼자 하다 보니까 힘들다는 겁니다.

"같이 방문을 해서 실제로 묘소 번지를 알아내고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데, 시간상 방문을 같이 못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국가보훈처 관계자)

시간이 오래 흘러서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후손들이 없는 경우도 있고, 있어도 정확히 주소를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국가의 책무는 분명합니다. 후손이 정확한 주소를 몰라도 조사자는 최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수조사를 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정부가 전수조사를 벌인지 4년이 다 돼 갑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말까지 독립유공자 산재묘소 가운데 5천3백여 명을 조사해 3천3백 명이 넘는 묘소 소재를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직접 현지를 방문해 조사했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서면조사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표 안에 담긴 숫자를 하나씩 곱씹어보면 여전히 채워야 할 빈칸이 가득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후손들은 나이가 듭니다. 기억은 더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는 이런저런 핑계 댈 여유가 없습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때는 늦습니다.

기획, 취재 : 함형건 hkhahm@ytn.co.kr
취재, 기사 : 이승배 sbi@ytn.co.kr
데이터 분석 : 신수민 최혜윤

※위 기사는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이 지난해 11월에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데이터를 기초로 분석한 결과입니다. 추후에 세부적인 내용이 입수될 경우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 YTN 데이터저널리즘팀 관련 방송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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