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평 방에 23명 수감, 고문이 자행된 지하 조사실... 악명높은 서대문형무소의 비밀

3.3평 방에 23명 수감, 고문이 자행된 지하 조사실... 악명높은 서대문형무소의 비밀

2023.03.03. 오후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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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3년 3월 3일 (금요일)
□ 진행 : 이현웅 아나운서
□ 출연: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현웅 아나운서(이하 이현웅): 우리 일상에서 보훈 문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국가보훈처와 함께 하는 특별기획 <슬기로운 보훈생활> 10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3월 1일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전국에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날이었죠. 올해 104주년 삼일절을 맞아 당시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던 역사의 현장, 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볼까 하는데요. 오늘 함께하실 분 인사드리겠습니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이하 박경목):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 이현웅: 3.1절, 오늘 3월 3일이고요, 엊그제였는데. 이 뉴스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세종시 모 아파트에 일장기가 걸린 일이 언론을 통해서도 전해졌는데, 관장님 입장에서 이게 어떻게 다가왔나요?

◆ 박경목: 그분은 본인이 일본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아무리 일본 사람이라고 주장을 하시는 분이라 하더라도, 다른 날도 아니고요. 3월 1일,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전 민족이 항거한 날 그랬다는 것은 아마 상식 이하의, 아마 그분 상식이 없으셨을 것으로 저는 생각이 됩니다.

◇ 이현웅: 혹시 이런 거는 처벌 같은 거는 안 이루어지나요?

◆ 박경목: 글쎄요, 제가 법 전문가는 아닌데 처벌까지 할 수 있는 법 조항이 없는 것 같죠?

◇ 이현웅: 우선 서대문형무소, 이번에 3.1절 날 또 많은 분들이 찾기도 했는데요. 어떤 곳인지 설명을 먼저 부탁드립니다.

◆ 박경목: 네, 이틀 전에 3.1절이었는데 한 1만 6천여 명 이상 방문하셨고요. 저희가 독립문 일대에서도 다양한 체험부스를 했는데. 왜 그런 행사를 했냐, 일제강점기 바로 이곳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돼서 또 모진 옥고를 치르고 또 심지어는 사형까지 당하신 바로 역사의 현장입니다. 또 더군다나 해방 이후에도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돼서 1987년도까지 서울구치소로 운영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고. 얼마나 그런 독립투사들의 아픔이 서렸으면 사형장 앞에 미루나무가 한 그루 있었거든요. 1970년대 교도관들 사이에서 ‘이 나무를 붙잡고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한을 품고 통곡했다’ 그래서 교도관들 사이에서조차 그 나무가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고 전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그 나무가 심어졌는지는 저희가 확실치 않지만 얼마나 아픔이 있었으면, 염원이 있었으면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겠는가. 바로 그러한 곳이 서대문 형무소입니다.

◇ 이현웅: 사형장도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지금 그대로 남아 있나요?

◆ 박경목: 사형장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이현웅: 서대문 형무소 직접 갔다 오신 분들 얘기 들어보면 완전히 다 개방이 돼 있는 건 아니죠?

◆ 박경목: 서대문 형무소는 1987년도에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하면서 약 3분의 2가량의 원형이 철거가 됐고요, 지금 3분의 1가량의 원형이 남아 있는데. 저희가 거의 모든 공간은 개방하는데 보존옥사 몇 개 동은 저희들이 미개방하고 있습니다.

◇ 이현웅: 알겠습니다. 그러면 3.1운동 당시의 모습이 어땠을지도 궁금한데요?

◆ 박경목: 1919년 3.1운동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수감되었죠. 저희들이 자료를 보면 1919년 12월 말 기준으로 서대문역무소에 3,075명이 수감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서대문 형무소는 최대 수용 인원이 500명을 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옥사가 꽉 차고, 옥사에서도 수감을 못하니까 공장에도 사람들을 수감시키고, 교회당에도 수감시켜서 그 당시에 서대문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던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너무 많이 수감되어서 그들이 탈옥을 감행하면 자기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증언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3,075분 다 기억을 해야겠습니다마는 우리가 알 만한 독립운동가분들은 어떤 분들이 수감이 됐었나요?

◆ 박경목: 3.1운동기에 여러분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아실만 한 분은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인 만해 한용훈 선생도 여기에 수감이 되셨고요. 그리고 유관순 열사도 20년에 3.1운동으로 공주감옥에서 이감돼서 이곳에 수감이 되셨고요.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분으로 또 <상록수> 소설을 쓴 심훈 소설가로 알고 계시지만 사실은 독립운동가입니다. 심훈도 학생으로서 3.1운동에 참여했다. 바로 이곳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이 됐습니다.

◇ 이현웅: 유관순 열사 말씀해 주셨는데, 여옥사가 따로 있었던 겁니까?

◆ 박경목: 예. 서대문 형무소는 남자 수감 공간과 여자 수감 공간이 분리가 되어 있었고 유관순 열사는 바로 여성들이 수감됐던 여옥사에 수감이 되었죠.

◇ 이현웅: 여옥사 상황이 좀 심각했다고 들었는데 어땠기에 그럽니까?

◆ 박경목: 여옥사는 공간이 넓지가 않고 옥사가 몇 개 없었기 때문에 남자들보다 더 많이 수감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고요. 특히 여성들은 머리를 기르고 또 아침마다 머리를 정리했기 때문에 굉장히 수감 생활하는 데 고통이 따랐다. 이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현웅: 여기서도 남녀 이런 거를 나눠서 공간을 따로 하고 그럽니까?

◆ 박경목: 네. 감옥 안에서는 철저하게 남녀가 분리된 공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절대 선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 사이에 벽이 놓여 있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요.

◇ 이현웅: 여옥사도 좀 크고 좀 넉넉하게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 박경목: 더 크면 안 되죠.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더 많이 들어가니까요.

◇ 이현웅: 그러네요. 생각이 제가 짧았습니다. 당시에 수감 생활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24시간을 설명을 해주신다면요?

◆ 박경목: 지금 겨울철, 봄으로 들어가는 시기인데 2월쯤에는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기상을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죠. 그리고 정리를 하고 아침을 먹게 됩니다. 만약에 공장에서 노역을 한다면 그 시간에 공장으로 이동해서 아침을 먹고요. 공장에서 일할 수 없는 이른바 사상범, 우리가 보면 독립운동가들은 감옥 안에서 방 안에서 밥을 먹고. 그리고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겠는데 독립운동가 기준으로 설명을 드리면, 공장에 나가서 일할 수 없기 때문에 감방 안에서 계속 있게 되는데. 감방 안에서 검방을 또 하게 됩니다. 방을 검사를 하게 되고 아침 먹고. 매일같이 검방을 합니다. 오전 10시~11시 사이에 검방을 하게 돼 있고요. 그리고 계속 방 안에 있게 되죠. 그리고 방 안에서 가마니 짜기나 봉투 붙이기 이런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또 점심 먹고 저녁 먹고. 또 한 8시~7시 정도에 또 취침에 들어가고요. 이제 공장에 나가서 놓여가는 경우, 물론 일부 독립운동가도 20년대 후반부터는 공장에 갔기 때문에 공장에 옮겨가서 거기서 아침을 먹고 12시까지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은 30분, 물론 공장에서 먹죠. 그리고 또 노역을 5시까지 하게 되고요. 그 다음에 저녁 먹고 다시 옥사로 이동해 와서 정리하고 또 8시 취침.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 이현웅: 가장 삶의 기본이 되는 게 의식주인데, 하나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수감하는 공간이 어느 정도 크기에 몇 명이나 들어가서 생활을 한 겁니까?

◆ 박경목: 옥사가 비좁았는데요. 비좁은 이유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이유고요. 3.1운동기에 민족대표로 수감되신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증언을 하셨는데, 민족 대표들이 있는 방에는 약 17명 정도 있었습니다. 어떤 방이냐, 지금 크기로 하면 3.3평입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학생들이 수감된 방에는 21명에서 23명이 있었더이다.

◇ 이현웅: 누워서 잘 수는 있나요?

◆ 박경목: 간신히 자는 거죠. 평당 수감 밀도가 6명에서 7명이 되는 거죠.

◇ 이현웅: 그렇군요. 수감 생활이 이렇게 열악하다 보면 좀 위생이나 건강 같은 것들도 걱정이 되는데요?

◆ 박경목: 서대문 형무소 옥사는 판옵티콘 구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환기가 굉장히 취약한데요. 그리고 겨울철에 춥고 여름철에 덥기 때문에 굉장히 위생적으로도 안 좋았는데, 장티푸스나 발진티푸스 그다음에 콜레라. 가장 심한 건 피부병, 이런 전염병들이 만연했고. 얼마나 심했으면 당시 신문 보도기사에 서대문 형무소는 ‘옴 감옥’이다. 지금은 모르시겠지만 피부병이죠. 일종의 옴 감옥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고. 사형 당해서 돌아가시는 분 외에도 병사, 병에 걸려서 돌아가시는 분이 그렇게 많습니다. 저희가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고 이런 분들은 자료조차 잘 남기지 않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이 되었습니다.

◇ 이현웅: 듣다 보니까 궁금한데요. 보통 죄가 확정이 돼야 사형을 하든 뭘 하든 이게 나눠질 거 아닙니까? 조사 기간이 있을 텐데, 형이 확정되기 전에 조사 중인 독립운동가들의 옥중 생활은 어땠습니까?

◆ 박경목: 잘 말씀하셨는데, 조사 중에 있는 분을 우리가 미결수라고 하고요. 형이 확정된 분을 기결수라고 하는데 미결수도 같이 수감이 되죠. 미결수들은 대신 조사를 받아야 되죠. 그래서 원래 검찰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되는데 독립운동가들은 이동이 상당히 어렵다는 얘기죠. 이동할 때 얼굴이 노출될 수도 있고 또 혹은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탈출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기록에 의하면 일제 검사가 서대문 형무소로 출장을 옵니다. 물론 보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출장을 와서 보안과 청사 지하실에 조사실이 있습니다. 도면에 보면 ‘조실’이라고 되어 있죠. 이 조사실에서 바로 이 미결수들을 조사를 했던 것입니다.

◇ 이현웅: 조사실이 굉장히 좀 깊고 어두운 데 있을 것 같은 느낌인데, 막 때리고 고문하고 그랬습니까?

◆ 박경목: 네, 그 청사는 교도관들만 근무하는 청사였기 때문에 그 청사 지하에 있었고요. 최근까지, 2000년대 초반까지 생존해 계셨던 독립지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곳에서 조사 과정에서 갖은 고문이 자행이 되었다라는 증언들을 하고 계십니다.

◇ 이현웅: 조사라고 말할 수가 없네요.

◆ 박경목: 취조이죠. 취조 과정에서 예를 들면 손톱 밑에를 날카로운 대나무 꼬챙이로 찌릅니다. 아나운서님 한번 해보시죠.

◇ 이현웅: 제가 최근에 여기에 뭐가 찔려가지고 지금 3일, 4일째 지금 계속 신경이 쓰이거든요.

◆ 박경목: 또 전기 고문도 있었겠고요. 물고문. 또 사지를 뒤로 묶어서 하늘에 매달고 빙빙 돌리면서 때리는 일명 비행기 고문, 이런 고문들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현웅: 정말 끔찍합니다. 그런데 먹을 것도 제대로 안 줬다고 들었어요. 규정상 배식을 9개 등급, 9등급으로 양을 정해서 배분했다고 하는데 무슨 차이입니까?

◆ 박경목: 감옥 규정에 의하면 이른바 ‘죄질’, 죄의 질에 따라서 1에서 9등급으로 나눴는데. 이른바 사상범, 항일 독립운동하는 죄질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제일 안 좋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항일 독립운동가들, 사상범들은 4등급, 5등급 이하를 배식 받았는데 1등급은 400g, 2등급은 380g, 좀 내려가면 이제 260g, 240g 떨어집니다. 영양 공급원이 그것밖에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감옥에서 가장 큰 고통은 배고픔, 굶주림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 이현웅: 그러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배고픔을 계속 참을 수도 없고요.

◆ 박경목: 참아야죠. 참는 방법밖에 없었고요. 그래서 심지어는 1940년대 김광섭 지사가 쓴 ‘옥창일기’라는 기록에 보면 그 시기에 독립운동가들도 공장에서 노역에 동원을 했는데, 아교가 있죠. 우리 예전에 창호지 바를 때 이렇게 죽 써서 하는 거, 그런 풀을 훔쳐 먹습니다.

◇ 이현웅: 그걸 먹어요. 먹어도 되는 겁니까?

◆ 박경목: 먹어도 되죠. 얼마나 배고프면. 그래서 간수한테 걸려서 매타작을 당하고, 심지어는 구두가 뭘로 만들어졌죠. 소가죽으로 만들어졌죠. 가죽을 훔쳐다가 씹어 먹다 걸리기도 하고요. 얼마나 배고팠으면 취사장 인근 하수구에 생선 썩은 눈알을 주워 먹다가 복통을 일으키기도 하고, 이런 상황들이 연출됐던 상황입니다.

◇ 이현웅: 우리 애청자께서도 “서대문 형무소 가봤는데 참혹했던 현장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해주고. 사형으로 순국한 분들도 많다고 하셨잖아요. 어느 정도나 됩니까?

◆ 박경목: 2021년도에 이승윤 박사가 사형 집행의 실체에 대해서 논문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요. 1908년도부터 1945년도까지 집계를 내봤는데 493명이 사형장에서 사형을 당하셨고. 이 가운데 지금 국가보훈처로부터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공훈을 받으신 분은 92분이 계 라고 연구 결과가 나왔고요. 다만 그분 외에도 일제강점기에 사형으로 당한 죄명이 ‘독립운동’ 이런 죄명이 아니에요. ‘살인’, ‘강도’ 이런 죄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그 죄명만으로 독립유공자를 판단해서는 안 되고. 자료를 세세하게 봤더니 그 외에도 약 50여 명의 독립운동으로 활동했던 분이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분들은 자료가 미비하든지 아니면 그 시기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통한 독립운동을 했다든지라는 이유로 미서훈되신 분들이죠. 그렇게 따지면 약 140여 분 정도 독립운동으로 사형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분들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이런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 이현웅: 지금도 추가로 발굴할 수 있는 자료들이 남아 있기는 합니까?

◆ 박경목: 네, 계속 저희들이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는데요. 총독부 기록물이라든지 당시에 범죄인 명부라든지 판결문 또 일본 방위성에 보관돼 있는 자료들 계속 추적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계속 저희들이 발굴할 예정입니다.

◇ 이현웅: 그것들을 일본에 요청을 하면 협조적입니까?

◆ 박경목: 네, 이전에는 저희들이 자유롭게 가서 열람 신청을 하고 했는데요. 최근에는 저희가 자료들을 웬만하면 다 수집했기 때문에 최근 상황은 저희가 판단하기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한 50여 분 정도 더 발굴이 필요한, 자료가 필요한 분들도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렇게 사형당한 독립운동가분들 중에서 어떤 분들이 있는지 좀 사연을 소개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 박경목: 잘 알려진 분들이야 우리 여러분들이 아시는 의병장 이강년이나 허위, 이인영 의병장도 사형당하셨고요. 광복회 활동을 하신 최계중 의사도 사형당하고, 또 ‘금호문 사건’이라고 해서 일본의 총독을 암살하려고 했던 송학선 지사가 사형당했는데 이 분들은 잘 아시는 분들이고. 잘 모르시는 분 가운데 1929년 2월 27일 날 두 분이 사형 순국을 하셨는데요. 이수흥이라는 분과 그다음에 유택수라고 하는 두 분이 동시에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이분들 어떤 일을 했냐, 이수흥라는 분은 만주로 망명했다가 대한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로 국내에 파견됩니다. 그래서 유택수라는 분과 함께 1920년 7월, 동소문파출소를 습격을 합니다. 그래서 일본 순사 토쿠나에게 사상을 입히고요. 그 다음에 안성의 친일 부호 박태병을 사살합니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에요. 같은 해 26년 10월에 경기도 이천 백사면으로 갑니다. 거기서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합니다. 일본 경찰들이 있는. 일본인 순사와 총격전을 벌이고 또 친일 면서기 송천의를 처단을 하고. 그래서 일제 무장 경관이 2천여 명이 동원돼서 체포를 합니다. 그래서 26년에 체포돼서 이 두 분이 29년 2월 27일 안타깝게 사형장에서 운명을 달리하는데, 그분의 나이가 그때 몇 살이냐. 이수흥 의사는 당시 나이가 24살, 유택수 의사는 당시 나이 28살.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이런 기사가 납니다. ‘이수훈과 유택수 어제 사형 집행, 닥쳐오는 봄빛도 등지고 30세 미만 청춘을…….’ 이런 기사가 나갑니다.

◇ 이현웅: 참 이런 사연을 하나하나 들을 때마다 부끄러워지고 또 감사한 마음도 들고 그렇습니다. 우리 청취자님께서 “서대문 형무소 따로 예약 없이도 방문 가능한가요? 얘기 듣다 보니까 주말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 박경목: 평일에는 예약 없이 편하게 관람하시는데요. 주말에 우리 역사의식이 높아져서 관람객들이 굉장히 많이 오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말에는 가급적 예약을 해 주시면 저희들이 원활한 관람이 될 것 같고요. 또 이건 그 밖의 얘기지만 차량은 안 가져오셨으면 합니다. 너무 차들이 많아서요. 주변 일대가 교통량이 엄청납니다.

◇ 이현웅: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죠. 꼭 기억하겠습니다” 하셨고요. “참으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며칠 전에 병천 매봉 감리교회에 방문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고요. “민족의 혼을 불어넣었던 유관순 열사,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오늘날 세계 속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박경목: 감사합니다.

◇ 이현웅: 지금까지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과 함께했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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