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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4년 09월 06일 (금)
□ 진행 : 박귀빈 아나운서
□ 출연자 : 4.19 민주혁명회 오경섭 회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박귀빈 아나운서(이하 박귀빈): 국가보훈부와 슬기로운 라디오생활의 공동 프로젝트 <스틸러브 대한민국> 시간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시작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의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 이렇게 적혀있는데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리의 역사, 민주주의의 첫 승리를 가져온 1960년 4.19혁명, 그 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4.19민주혁명회 오경섭 회장,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4.19 민주혁명회 오경섭 회장(이하 오경섭): 안녕하세요.
◆박귀빈: 인사 한 말씀 해 주실까요?
◇오경섭: 안녕하세요. 4.19 민주혁명회 회장 오경섭입니다.
◆박귀빈: 4.19 민주혁명회에서 오셨는데요.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간략하게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오경섭: 4.19 민주혁명회는 64년 전 자유당 정권에 항거해서 부정선거 나라는 부패였고 거기에 온 국민이 학생이 주축이 돼서 그 정권에 맞서서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19 우리 대상자들입니다. 그 당시에 정부에서 경찰관들이 총을 쏴가지고 그 당시에 돌아가신 분이 180명 부상자가 한 6,500명 됩니다. 그중에서 국가보훈부에서 신체검사를 해서 중상위자로 분류된 국가 보훈 대상자들로 구성된 단체입니다.
◆박귀빈: 네. 그렇습니다. 4.19 민주혁명회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셨고 그 회장님이시죠 오경섭 회장님과 함께하겠습니다. 4.19 혁명이면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압니다. 이 날이 어떤 날이고 이것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지만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많은 분들이 이제 저도 그렇지만 교과서를 통해서 배운 분들도 아주 많이 계시기 때문에 지금 듣고 있는 청취자분들은 오늘 인터뷰를 좀 들으시면서 그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배웠던 내용도 그렇고요. 좀 떠올리는 그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하셨으면 좋겠고 그래서 일단 본격적으로 회장님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조금 더 쉽게 우리 청취자분들이 다가오실 수 있도록 4.19혁명 관련 OX퀴즈를 짧게 먼저 준비를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문제를 짧게 내면 일단 OX 팻말 OX만 먼저 딱 들어주시고 나서 정답에 대해서 풀어가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준비되셨어요? 시작하겠습니다. 1번 4.19 혁명의 시작은 부산이었다.
◇오경섭: 아닙니다.
◆박귀빈: 2번 4.19 혁명 당시 거리 시위에 초등학생들은 참여할 수 없었다
◇오경섭: 아닙니다.
◆박귀빈: 3번 4.19 혁명에서 경찰은 시위대의 실탄을 발포했다.
◇오경섭: 맞습니다.
◆박귀빈: 4번 419혁명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오경섭: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박귀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X 2개 O 2개 이렇게 들어주셨는데요. 일단 그럼 답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해 볼 텐데 여러분 좀 기억을 하시면서 XO 어떤 거였는지 기억을 하시면서 좀 들어봐 주세요.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960년입니다. 회장님 그때 나이가 어떻게 되셨었어요?
◇오경섭: 저는 고등학교 3학년 18살이었습니다.
◆박귀빈: 18살 때 그러면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르시겠어요? 당시 현장이 어땠는지 상황이 어땠습니까?
◇오경섭: 그 당시 그날이 1960년 4월 19일이 화요일이고 날은 아주 무겁게 우중충한 날이었습니다. 그 등교를 해가지고 한교시가 끝나고 이제 우리 3학년들이 주축이 돼서 나가자 구호를 외치고 선생들이 막는데 이제 나와서 저는 그 당시 돈암동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청와대 앞에 가니깐 이미 많은 고등학교 학생들 대학생들이 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12시쯤 됐는데 그 당시에 청와대 입구까지 전차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수도관을 밀고 들어가는데 대학생들은 우리 고등학생들을 앞장세워 가지고 자기들 잘 모르는 이제 고등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청와대 입구 들어가는데 12시쯤 첫 발포가 됐습니다. 첫 발포가 됐었는데 사진에도 다 있습니다만 경찰관들이 저희들을 위해서 정조준해서 총을 쐈어요. 그래서 저희 부상자들을 보더라도 하체보다는 상체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박귀빈: 당시에 18살 때 1990년대 상황을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회장님께서 아까 돈암동 근처 거기서 학교를 다니셨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실제 4.19 혁명의 시작 과정을 짚어보면 마산에서 도화선이 됐다 라고 하거든요.
◇오경섭: 마산에서는 이제 1960년 3월 15일이 총선입니다. 거기서 이제 조직적으로 부정선거가 이루어져 가지고 마산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뒤에도 나오겠습니다만 역시나 거기서도 발포를 했고 또 김주열이라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을 총을 쏴가지고 눈에다가 최루탄을 박아가지고 마산 앞바다에 버리는 그러한 아주 천인공노할 그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박귀빈: 당시 마산에서 부정선거 때문에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정말 그 당시 시민들이 가장 분노했던 사건이 지금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그때부터잖아요. 근데 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한동안 실종 그러니까 김주열 열사가 실종된 상태였다가..
◇오경섭: 눈에 최루탄을 받고 몸에 돌을 매달아서 마산 앞바다에다가 수장을 시켰는데 그게 28일인가 만에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그래서 이제 그걸 기화로 마산 학생들 시민들이 봉기를 한 겁니다.
◆박귀빈: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그 당시 사건에 대해 기사를 통해 봤는데 그 떠오르는 시신을 한 기자분이 사진을 찍어서 그거를 신문에 실으면서 그때부터 이제 시민들이 분노해서 거리로 나왔죠..
◇오경섭: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가관인 것은 그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라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총을 쏘라고 만든 거다 이런 발언을 했기 때문에 아주 그게 더 도화선이 직접 되는 동기도 되었습니다.
◆박귀빈: 그렇습니다. 4.19 혁명의 시작은 그럼 마산부터라고 볼 수 있는 걸까요?
◇오경섭: 아닙니다. 그 시초는 2월 28일이 일요일입니다. 일요일인데 자유당 정권에 이제 자유당 출마한 사람이 거기 유세가 있었어요. 그 유세에 참석하지 못하게 대구의 전 학교를 등교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제 시작된 거가 대구 2.28 사건이라고 4.19 혁명의 시초는 2월 28일 대구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박귀빈: 그렇습니다. 그래서 앞서 1번 퀴즈가 이제 부산이었다 해서 X라고 해 주셨고 그리고 제가 2번 문제를 뭘 드렸냐면 거리 시위에 초등학생들은 참여할 수 없었다라고 질문을 드렸는데 X라고 하셨어요. 초등학생들도 거리에 나왔군요?
◇오경섭: 그렇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저희 부상자 중에는 초등학생 출신도 몇 명이 지금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나왔고 저희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시민들이 양동이에다 물도 떠다가 물도 주고 부상 학생들 병원으로 이송도 하고..
◆박귀빈: 제일 어린 학생이 그럼 몇 살이었는지 아세요?
◇오경섭: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어머니 등에서 온 게 이제 두 살이고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8살 된 사람이 저희 지금 회원으로 있습니다.
◆박귀빈: 그러시군요. 그 당시에 어린 학생들도 거리에 나왔는데 총구가 향했다는 거잖아요. 회장님은 당시에 뭐 다치거나 부상당하거나 그러셨어요? 회장님은 어떠셨어요?
◇오경섭: 저는 그 큰 사건 중에 한데 미아리 발포 사건이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제 주동 중에 한 사람인데 총을 한 발을 맞았어요. 한 발을 맞고 길 옆에 그 하수도가 있었는데 그 길로 빠져서 총을 맞으니까 목이 마르더라고요. 그래서 물 좀 달라고 그랬더니 빨갱이보다 더 못한 놈이라고 또 한 방 쏘더라고요. 그래서 복부에 총을 두 발을 맞았습니다.
◆박귀빈: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셨어요?
◇오경섭: 그러고 경찰관들은 그 상황을 모르고 오다가 이제 앰뷸런스를 만나가 가지고 중앙의료원 지금 메디컬 센터로 가서..
◆박귀빈: 그렇군요. 어떻게 후유증은 없으셨나요? 그 이후에
◇오경섭: 지금도 후유증이 있죠. 그래서 제가 그 후유증으로 국가보훈 대상자입니다.
◆박귀빈: 많은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 덕분에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지켜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민주주의의 첫 승리였다 이런 표현도 나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한 날이 4월 26일이었거든요. 4.19혁명 이후에 그때 심정이 어떠셨어요?
◇오경섭: 그때 저는 중환자실에서 있어서 우리 부상자 중에는 무슨 얘기가 떠돌었는가 하면 경찰관들이 다시 와서 또 죽인다더라 이런 소문이 환자들 사이에 있어서 사실은 불안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는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서 중환자였었는데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소식이 제일 먼저 아이고 살았구나 제일 먼저 그 생각이 들었고, 하야를 안 하고 계속해서 집권을 했으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끔찍한 생각이 드는 거죠.
◆박귀빈: 4.19 민주혁명회 오경섭 회장님이신데요. 앞서 설명을 해 주셨지만 이렇게 4.19 민주혁명회에는 당시에 어떤 경찰의 무차별 발포 폭력으로 부상 입고 이제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분들이 계시는 국가보훈부 공법단체입니다. 146명 회원이 계시고 그 단체에서 어떻게 매년 행사도 하고 하십니까?
◇오경섭: 이제 저희들이 행사가 여러 개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걸 들자면 강북구청하고 저희 단체가 3개가 있습니다. 저희 부상자가 있고 유족회가 있고 공로자하고 상계단체하고 강북구청하고 이제 국민문화제라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제 대표적인 게 열린 음악회라고 그래서 열린 음악회를 4월 18일 날 4.19 전야제 하는데 금년 같은 경우도 수만 명이 참석을 해줬고 그런 행사가 있습니다.
◆박귀빈: 매년 하시는군요.
◇오경섭: 예. 그리고 이제 고려대학에서는 4월 18일날 4.19 국립묘지까지 마라톤 대회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있습니다.
◆박귀빈: 4.19 혁명의 가치 정신은 지금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될 만큼 인정을 받고 있는 건데 앞서 그래서 오라고 팻말을 들어주셨어요. 4.19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그 의미 한 말씀 해주세요.
◇오경섭: 유네스코가 이제 중요한 유형 무용 유네스코 등재를 하는데 저희는 이제 무형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보물로 지정을 한 거죠. 그래서 그 인증서도 금년에 다 받았고 명실상부하게 유네스코에서 4.19 혁명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인정하고 등재를 했습니다.등재가 됐습니다.
◆박귀빈: 그렇습니다. 419혁명의 가치와 정신을 세계유산으로 인정을 한 것이죠. 사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민주주의라고 하면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너무나 당연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보니까 그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에 대해서 이제 요즘 조금씩 잊혀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순고한 4.19 혁명 정신 오늘날 국가와 시민을 위해서 이것이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 또 이 혁명을 우리 국민이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한말씀 부탁드릴게요. 회장님
◇오경섭: 한마디로 요약하자 하자면 너무 큰일이었고 4.19는 그렇습니다. 4.19 정신은 자유, 민주, 정의입니다. 그래서 국민이 자유스럽고 그리고 자유가 있어야 되고 이래야 되는데 지금 작금의 국내 사태는 4.19 정신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고 좀 안타깝습니다. 안타깝고 빨리 좀 정리가 잘 되었으면 하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자유민주의 정의가 우리 국민들 정서에 뿌리 박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들이 강력하게 간절하게 국민들에게 요망하는 것은 4.19 정신이 국민의 밑에 흐르는 정서로 이렇게 바뀌었으면 그런 바람입니다.
◆박귀빈: 우리 회장님의 말씀 잘 새겨서 모두 기억을 하면 좋겠습니다. 4.19혁명 기억하시고 그 순고한 4.19 민주이념 마음속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4.19 민주혁명의 오경석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회장님 이제 저희 이 시간 마무리해보겠습니다. 저희 마무리 인사 함께 할게요. 스틸러브
◇오경섭: 대한민국
◆박귀빈: 우리는 그때도 지금도 내일도 나라를 사랑합니다. 지금까지 국가보훈부와 슬기로운 라디오 생활 공동 프로젝트 스틸러브 대한민국 제5화 4.19 민주혁명회였습니다. 회장님 고맙습니다.
◇오경섭: 네 . 안녕히 계세요.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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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일시 : 2024년 09월 06일 (금)
□ 진행 : 박귀빈 아나운서
□ 출연자 : 4.19 민주혁명회 오경섭 회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박귀빈 아나운서(이하 박귀빈): 국가보훈부와 슬기로운 라디오생활의 공동 프로젝트 <스틸러브 대한민국> 시간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시작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의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 이렇게 적혀있는데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리의 역사, 민주주의의 첫 승리를 가져온 1960년 4.19혁명, 그 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4.19민주혁명회 오경섭 회장,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4.19 민주혁명회 오경섭 회장(이하 오경섭): 안녕하세요.
◆박귀빈: 인사 한 말씀 해 주실까요?
◇오경섭: 안녕하세요. 4.19 민주혁명회 회장 오경섭입니다.
◆박귀빈: 4.19 민주혁명회에서 오셨는데요.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간략하게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오경섭: 4.19 민주혁명회는 64년 전 자유당 정권에 항거해서 부정선거 나라는 부패였고 거기에 온 국민이 학생이 주축이 돼서 그 정권에 맞서서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19 우리 대상자들입니다. 그 당시에 정부에서 경찰관들이 총을 쏴가지고 그 당시에 돌아가신 분이 180명 부상자가 한 6,500명 됩니다. 그중에서 국가보훈부에서 신체검사를 해서 중상위자로 분류된 국가 보훈 대상자들로 구성된 단체입니다.
◆박귀빈: 네. 그렇습니다. 4.19 민주혁명회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셨고 그 회장님이시죠 오경섭 회장님과 함께하겠습니다. 4.19 혁명이면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압니다. 이 날이 어떤 날이고 이것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지만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많은 분들이 이제 저도 그렇지만 교과서를 통해서 배운 분들도 아주 많이 계시기 때문에 지금 듣고 있는 청취자분들은 오늘 인터뷰를 좀 들으시면서 그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배웠던 내용도 그렇고요. 좀 떠올리는 그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하셨으면 좋겠고 그래서 일단 본격적으로 회장님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조금 더 쉽게 우리 청취자분들이 다가오실 수 있도록 4.19혁명 관련 OX퀴즈를 짧게 먼저 준비를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문제를 짧게 내면 일단 OX 팻말 OX만 먼저 딱 들어주시고 나서 정답에 대해서 풀어가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준비되셨어요? 시작하겠습니다. 1번 4.19 혁명의 시작은 부산이었다.
◇오경섭: 아닙니다.
◆박귀빈: 2번 4.19 혁명 당시 거리 시위에 초등학생들은 참여할 수 없었다
◇오경섭: 아닙니다.
◆박귀빈: 3번 4.19 혁명에서 경찰은 시위대의 실탄을 발포했다.
◇오경섭: 맞습니다.
◆박귀빈: 4번 419혁명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오경섭: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박귀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X 2개 O 2개 이렇게 들어주셨는데요. 일단 그럼 답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해 볼 텐데 여러분 좀 기억을 하시면서 XO 어떤 거였는지 기억을 하시면서 좀 들어봐 주세요.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960년입니다. 회장님 그때 나이가 어떻게 되셨었어요?
◇오경섭: 저는 고등학교 3학년 18살이었습니다.
◆박귀빈: 18살 때 그러면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르시겠어요? 당시 현장이 어땠는지 상황이 어땠습니까?
◇오경섭: 그 당시 그날이 1960년 4월 19일이 화요일이고 날은 아주 무겁게 우중충한 날이었습니다. 그 등교를 해가지고 한교시가 끝나고 이제 우리 3학년들이 주축이 돼서 나가자 구호를 외치고 선생들이 막는데 이제 나와서 저는 그 당시 돈암동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청와대 앞에 가니깐 이미 많은 고등학교 학생들 대학생들이 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12시쯤 됐는데 그 당시에 청와대 입구까지 전차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수도관을 밀고 들어가는데 대학생들은 우리 고등학생들을 앞장세워 가지고 자기들 잘 모르는 이제 고등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청와대 입구 들어가는데 12시쯤 첫 발포가 됐습니다. 첫 발포가 됐었는데 사진에도 다 있습니다만 경찰관들이 저희들을 위해서 정조준해서 총을 쐈어요. 그래서 저희 부상자들을 보더라도 하체보다는 상체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박귀빈: 당시에 18살 때 1990년대 상황을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회장님께서 아까 돈암동 근처 거기서 학교를 다니셨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실제 4.19 혁명의 시작 과정을 짚어보면 마산에서 도화선이 됐다 라고 하거든요.
◇오경섭: 마산에서는 이제 1960년 3월 15일이 총선입니다. 거기서 이제 조직적으로 부정선거가 이루어져 가지고 마산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뒤에도 나오겠습니다만 역시나 거기서도 발포를 했고 또 김주열이라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을 총을 쏴가지고 눈에다가 최루탄을 박아가지고 마산 앞바다에 버리는 그러한 아주 천인공노할 그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박귀빈: 당시 마산에서 부정선거 때문에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정말 그 당시 시민들이 가장 분노했던 사건이 지금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그때부터잖아요. 근데 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한동안 실종 그러니까 김주열 열사가 실종된 상태였다가..
◇오경섭: 눈에 최루탄을 받고 몸에 돌을 매달아서 마산 앞바다에다가 수장을 시켰는데 그게 28일인가 만에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그래서 이제 그걸 기화로 마산 학생들 시민들이 봉기를 한 겁니다.
◆박귀빈: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그 당시 사건에 대해 기사를 통해 봤는데 그 떠오르는 시신을 한 기자분이 사진을 찍어서 그거를 신문에 실으면서 그때부터 이제 시민들이 분노해서 거리로 나왔죠..
◇오경섭: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가관인 것은 그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라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총을 쏘라고 만든 거다 이런 발언을 했기 때문에 아주 그게 더 도화선이 직접 되는 동기도 되었습니다.
◆박귀빈: 그렇습니다. 4.19 혁명의 시작은 그럼 마산부터라고 볼 수 있는 걸까요?
◇오경섭: 아닙니다. 그 시초는 2월 28일이 일요일입니다. 일요일인데 자유당 정권에 이제 자유당 출마한 사람이 거기 유세가 있었어요. 그 유세에 참석하지 못하게 대구의 전 학교를 등교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제 시작된 거가 대구 2.28 사건이라고 4.19 혁명의 시초는 2월 28일 대구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박귀빈: 그렇습니다. 그래서 앞서 1번 퀴즈가 이제 부산이었다 해서 X라고 해 주셨고 그리고 제가 2번 문제를 뭘 드렸냐면 거리 시위에 초등학생들은 참여할 수 없었다라고 질문을 드렸는데 X라고 하셨어요. 초등학생들도 거리에 나왔군요?
◇오경섭: 그렇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저희 부상자 중에는 초등학생 출신도 몇 명이 지금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나왔고 저희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시민들이 양동이에다 물도 떠다가 물도 주고 부상 학생들 병원으로 이송도 하고..
◆박귀빈: 제일 어린 학생이 그럼 몇 살이었는지 아세요?
◇오경섭: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어머니 등에서 온 게 이제 두 살이고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8살 된 사람이 저희 지금 회원으로 있습니다.
◆박귀빈: 그러시군요. 그 당시에 어린 학생들도 거리에 나왔는데 총구가 향했다는 거잖아요. 회장님은 당시에 뭐 다치거나 부상당하거나 그러셨어요? 회장님은 어떠셨어요?
◇오경섭: 저는 그 큰 사건 중에 한데 미아리 발포 사건이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제 주동 중에 한 사람인데 총을 한 발을 맞았어요. 한 발을 맞고 길 옆에 그 하수도가 있었는데 그 길로 빠져서 총을 맞으니까 목이 마르더라고요. 그래서 물 좀 달라고 그랬더니 빨갱이보다 더 못한 놈이라고 또 한 방 쏘더라고요. 그래서 복부에 총을 두 발을 맞았습니다.
◆박귀빈: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셨어요?
◇오경섭: 그러고 경찰관들은 그 상황을 모르고 오다가 이제 앰뷸런스를 만나가 가지고 중앙의료원 지금 메디컬 센터로 가서..
◆박귀빈: 그렇군요. 어떻게 후유증은 없으셨나요? 그 이후에
◇오경섭: 지금도 후유증이 있죠. 그래서 제가 그 후유증으로 국가보훈 대상자입니다.
◆박귀빈: 많은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 덕분에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지켜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민주주의의 첫 승리였다 이런 표현도 나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한 날이 4월 26일이었거든요. 4.19혁명 이후에 그때 심정이 어떠셨어요?
◇오경섭: 그때 저는 중환자실에서 있어서 우리 부상자 중에는 무슨 얘기가 떠돌었는가 하면 경찰관들이 다시 와서 또 죽인다더라 이런 소문이 환자들 사이에 있어서 사실은 불안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는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서 중환자였었는데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소식이 제일 먼저 아이고 살았구나 제일 먼저 그 생각이 들었고, 하야를 안 하고 계속해서 집권을 했으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끔찍한 생각이 드는 거죠.
◆박귀빈: 4.19 민주혁명회 오경섭 회장님이신데요. 앞서 설명을 해 주셨지만 이렇게 4.19 민주혁명회에는 당시에 어떤 경찰의 무차별 발포 폭력으로 부상 입고 이제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분들이 계시는 국가보훈부 공법단체입니다. 146명 회원이 계시고 그 단체에서 어떻게 매년 행사도 하고 하십니까?
◇오경섭: 이제 저희들이 행사가 여러 개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걸 들자면 강북구청하고 저희 단체가 3개가 있습니다. 저희 부상자가 있고 유족회가 있고 공로자하고 상계단체하고 강북구청하고 이제 국민문화제라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제 대표적인 게 열린 음악회라고 그래서 열린 음악회를 4월 18일 날 4.19 전야제 하는데 금년 같은 경우도 수만 명이 참석을 해줬고 그런 행사가 있습니다.
◆박귀빈: 매년 하시는군요.
◇오경섭: 예. 그리고 이제 고려대학에서는 4월 18일날 4.19 국립묘지까지 마라톤 대회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있습니다.
◆박귀빈: 4.19 혁명의 가치 정신은 지금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될 만큼 인정을 받고 있는 건데 앞서 그래서 오라고 팻말을 들어주셨어요. 4.19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그 의미 한 말씀 해주세요.
◇오경섭: 유네스코가 이제 중요한 유형 무용 유네스코 등재를 하는데 저희는 이제 무형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보물로 지정을 한 거죠. 그래서 그 인증서도 금년에 다 받았고 명실상부하게 유네스코에서 4.19 혁명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인정하고 등재를 했습니다.등재가 됐습니다.
◆박귀빈: 그렇습니다. 419혁명의 가치와 정신을 세계유산으로 인정을 한 것이죠. 사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민주주의라고 하면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너무나 당연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보니까 그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에 대해서 이제 요즘 조금씩 잊혀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순고한 4.19 혁명 정신 오늘날 국가와 시민을 위해서 이것이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 또 이 혁명을 우리 국민이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한말씀 부탁드릴게요. 회장님
◇오경섭: 한마디로 요약하자 하자면 너무 큰일이었고 4.19는 그렇습니다. 4.19 정신은 자유, 민주, 정의입니다. 그래서 국민이 자유스럽고 그리고 자유가 있어야 되고 이래야 되는데 지금 작금의 국내 사태는 4.19 정신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고 좀 안타깝습니다. 안타깝고 빨리 좀 정리가 잘 되었으면 하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자유민주의 정의가 우리 국민들 정서에 뿌리 박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들이 강력하게 간절하게 국민들에게 요망하는 것은 4.19 정신이 국민의 밑에 흐르는 정서로 이렇게 바뀌었으면 그런 바람입니다.
◆박귀빈: 우리 회장님의 말씀 잘 새겨서 모두 기억을 하면 좋겠습니다. 4.19혁명 기억하시고 그 순고한 4.19 민주이념 마음속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4.19 민주혁명의 오경석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회장님 이제 저희 이 시간 마무리해보겠습니다. 저희 마무리 인사 함께 할게요. 스틸러브
◇오경섭: 대한민국
◆박귀빈: 우리는 그때도 지금도 내일도 나라를 사랑합니다. 지금까지 국가보훈부와 슬기로운 라디오 생활 공동 프로젝트 스틸러브 대한민국 제5화 4.19 민주혁명회였습니다. 회장님 고맙습니다.
◇오경섭: 네 . 안녕히 계세요.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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