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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김선희 앵커
■ 출연 :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와이드]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8일, 96세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우리 시각으로 내일 저녁장례식이 엄수될 예정인데요. 각국 정상급 지도자 100여 명이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의미,그리고 여왕 사후 일어날 영국 안팎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 모시고자세한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왕실의 상징뿐 아니라 영국을 상징하는 그런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죠. 96세 일기로 서거를 했습니다. 여왕의 서거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박지향]
70세 이하의 영국 국민이 전체 인구의 한 84~85% 됩니다. 그들한테 태어나면서부터 여왕은 국왕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국왕이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러니까 국가의 수장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상징 이런 존재가 바로 엘리자베스 2세입니다.
모든 왕을 국민들이 다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왕이 별로 그렇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앵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재위 기간만 벌써 70년이 넘습니다.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로 기록이 됐는데 오랜 기간 여왕이라는 그 자리를 지켜오면서 인상적인 기록도 많이 남겼을 것 같아요.
[박지향]
그렇죠. 70년 동안 재위해 있었고 그다음에 그전에 빅토리아 여왕이 64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300년 전에 엘리자베스 1세, 유명한 처녀 왕 엘리자베스 1세가 한 45년 동안 치세를 했는데 그때 기준으로 보면 요즘에 70년 동안 통치를 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지금 엘리자베스 2세를 말하는 건데 1952년에 여왕으로 등극을 했습니다. 그때 수상이 윈스터 처칠 경이에요. 그리고 그때 영국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해서 그런 대제국을 한 세기 이상 유지를 하고 있었고 또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역할이 굉장히 컸어요.
우리 국민들은 잘 모르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전쟁의 후반부에 가면 미국과 소련의 역할이 굉장히 큽니다. 그런데 전쟁 초기에 거의 모든 유럽의 나라들이 다 히틀러한테 굴복을 하고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관망 상태에 있을 태예요.
그럴 때 영국 혼자서 전쟁을 수행을 해나갑니다. 굉장히 결연한 태도로 고독한 투쟁을 했는데 그때 총리가 윈스턴 처칠 경이었죠. 그래서 그렇게 처칠이 위대한 영웅으로 인정을 받는 것인데 어쨌든 그런 위상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으로 등극했을 때는 영국의 위치가 괜찮았어요.
그래서는데 그 후에 많은 나라들이 대제국이 해체가 되고 독립을 하고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현재 영연방이 56개국으로 구성이 돼 있는데 그 56개국을 영연방으로 모으는 그 힘이 바로 영국 왕실의 힘이었죠. 그래서 아버지인 조지 6세가 서거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공주의 신분으로 해외 순방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영연방국들을 다니면서 그들의 취지를 끌어모으는 이런 역할을 왕실과 여왕이 했던 것이죠.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2011년에 여왕이 에이레공화국을 방문을 합니다.
그것이 거의 100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국왕이 아일랜드를 방문한 거예요. 마지막 국왕의 방문이 1911년이었는데 그때는 아일랜드가 사실 영국의 일부였어요, 신민지였어요.
그러니까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데, 당연히. 그런데 100년 후에 엘리자베스 2세가 2011년이라고 하는 시점에서 더블린을 방문합니다. 그만큼 두 나라의 관계가 험악했다는 소리죠. 마치 우리의 일본과 우리의 관계 같은 이런 관계였어요.
그래서 일본의 동경대학 총장을 지내신 야나이하라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일제시대 때 이런 말을 해요. 제가 인용을 하면 조선은 우리의 아일랜드다.
그럴 정도로 영국와 아일랜드와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그런 관계였는데 그런 별로 친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2011년에 엘리자베스 2세가 아일랜드를 방문하고 지난 세월의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유감을 표현을 하고 이러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상당히 급하게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3년 후인 2014년에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이 또 런던을 방문을 하고 이런 식으로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가 두 나라의 관계, 그리고 영국의 안보를 위해서 대단히 많은 역할을 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앵커]
말씀하신 것처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이전에는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군주가 빅토리아 여왕인데요. 빅토리아 여왕 시대, 잠시 언급도 해 주셨습니다마는 해가 지지 않는 그런 영국을 완성한 그런 나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며 영국을 완성한 시대의 군주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비교했을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어떻게 다르고 관계가 어떨까요?
[박지향]
빅토리아 여왕은 엘리자베스의 고조모세요.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는 여러분들 다 아시다시피 사실은 왕이 될 수가 없는, 태어났을 때는 왕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런 존재죠. 그런데 에드워드 8세라고 하는 그 왕이 1936년에,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인데 1936년에 왕으로 즉위를 합니다.
그런데 1년이 채 못 돼서 그 유명한 심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서 나라가 반대를 하고 정부가 반대를 하고 국민이 반대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기 위해서 왕에서 퇴위를 하죠. 그러는 바람에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차남인데도 불구하고 왕위로 즉위를 한 것이죠. 그러는 바람에 엘리자베스가 미래의 여왕이 되는 것이었고요.
빅토리아 시대는 대단히 영국의 최전성기였어요. 그래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다시 그걸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한다면 전 세계 지표 의 4분의 1이 영국 제국이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빅토리아 여왕의 식민이었어요.
그리고 그때 경제를 완전히 영국이 장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무역의 결제 수단, 모든 사람들이 무역을 하면서 90%가 영국의 파운드화로 결제를 할 정도로 그리고 영국이 전 세계 시장까지도, 경제까지도 장악을 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거에 대비해서 엘리자베스 2세가 통치했던 영국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부터 서서히 침몰하는 그런 과정이었죠. 그러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전성기의 영국을 이끌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엘리자베스 2세는 그런 전성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또 그 많은 고초를 국민과 함께했기 때문에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앵커]
저희가 여기서 잠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어린 나이, 스물다섯입니다. 그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데요. 여왕 즉위식 때 모습을 잠시 화면으로 한 번 만나보실까요?
아주 젊은 시절 엘리자베스 2세 모습을 잠시 만나봤습니다. 25살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말씀하신 것처럼 영국 안팎의 상황이 평탄한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여왕에 주어진 과제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수행을 했다고 보십니까?
[박지향]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일 중요한 게 사실 많은 대제국이 해체되면서 생겨난 신생국가들을 영연방에 모으는 그런 역할이죠. 그게 사실 굉장히 중요했는데 그냥 뿔뿔이 흩어져서 그냥 공화국 이렇게 돼도 되는 것인데. 그런데 56개국이 여전히 영연방에 속해 있고 그리고 그중에 또 상당수가 영국의 국왕을 자신들의 국왕으로 모시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왕실의 역할이 상당히 컸죠.
왕실이 그들을 항상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많은 역할을 했고 끊임없이, 여왕이 아주 끊임없이 순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백몇 회의 나라를 순방을 했다고 그러고, 요새는 나이가 들어서 잘 못했지만 굉장히 열심히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러면 공화국을 만들자, 이러고 주장하던 사람들도 그 앞에서는 여왕을 만나는 순간 그냥 충성을 맹세하고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죠.
[앵커]
70세 생일을 한국에서 맞았을 정도로 우리나라에 대한 각별한 인연도 있는 그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입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그런 역할을 또 정치적으로도 잘했기 때문에 그만큼 또 영국민이나 영연방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않았나 싶은데요.
[박지향]
그런데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 이전에 이미 확립된 원칙이에요. 그래서 영국의 경우에는 1688년에 명예혁명이라고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의로 통치를 하던 왕을 의회에서 쫓아내고 자기들과 대화가 가능한 그런 왕을 모셔오는 거. 일종의 쿠데타죠. 그런 상황에서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라고 하는 그런 여왕의 원칙이 확립이 됐습니다.
여왕도 그걸 잘 지켰죠. 벌써 한 200년 가까이 된 어떤 원칙이니까 잘 지켰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셔야 될 것이 통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속된 말로 하면 놀고 먹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왕이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냐면 매일 아침 박스라는 게 책상에 놓여져 있어요.
그 전날 있었던 모든 정세, 이런 것을 다 왕이 아침에 다 읽고 파악을 합니다. 그리고 매주 한 번씩, 보통 수요일 오전인데 매주 한 번씩 총리하고 알현하고 대담을 하죠. 그리고 또 법안이 통과가 돼서 정식으로 법으로 공포가 되려면 왕이 서명을 해야 돼요.
그리고 군대라든가 교회의 임명권, 이런 걸 왕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립을 유지해야 하지만 정세에는 나몰라라 이게 아니고 면밀히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영국의 정부는 뭐라고 불리냐 하면 국왕폐하의 정부. 이렇게 불려요. 그리고 야당도 국왕폐하의 야당, 이렇게 불립니다. 그러니까 정치의 한가운데에 왕이 있다고 봐야 됩니다.
[앵커]
제가 기억하기에는 처음에 코로나19가 굉장히 영국에 심각하게 확산이 되고 있을 때 2020년 4월인가요?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TV 연설에 나와서 우리가 단결해서 강한 의지를 지속하면 병을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라면서 어떤 위기의 여왕으로서 국민들을 다독이고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의지를 함께 표현한 그 장면이 굉장히 기억이 남습니다. 아마 여왕이 내부적으로 또 대외적으로 자신의 위엄과 함께 국민에 대한 애정 이런 것들을 드러낸 상징적인 장면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렇게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신뢰는 영국 내부에서도 그렇고 외부적으로도 그렇고 높은 데 반해서 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는 대외적인 평가와는 달리 부침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가족과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는데 지금 국왕으로 올라선 찰스 3세 국왕, 당시에는 왕세자 시절에 불륜, 이혼, 그 이후에 다이애나비의 사망까지. 그래서 그런지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왕실 폐지에 대한 그런 목소리가 상당히 높은 것 같더라고요.
[박지향]
그런데 우리가 좀 알아야 될 것이 영국의 왕실은 1066년. 여러분들 역사 시간에 배우셨겠지만 윌리엄 정복왕이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노르망디의 공작인데 해협을 건너와서 잉글랜드를 정복을 하고 왕조를 계창을 하죠. 그때부터 엘리자베스 2세, 지금 찰스 3세까지 꾸준히 유지돼 오는 그런 왕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찰스 3세, 엘리자베스 2세의 DNA에는 윌리엄 정복왕의 피가 섞여있는 거예요. 그럴 정도로 천 년 넘게 계속되는 그런 왕실이기 때문에 이미 굉장히 확고한 제도, 인스티튜션이 된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인 인기의 선호도 이런 것 때문에 제도가 폐지된다든가 이런 거는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엘리자베스 2세 다음으로 찰스 3세가 즉위를 했는데 다이애나비와의 관계 때문에 상당히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그랬죠. 그리고 또 이번에 보니까 카밀라 왕비도 처음에는 인기도가 1%도 안 됐어요, 정말. 그런데 이번에 많은 추모객이나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을 보니까 국민들이 상당히 카밀라 왕비를 받아들인 것 같은. 그래서 처음에는 사실 카밀라 왕비가 왕비로 불릴 수가 없었어요.
2005년에 두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때는 왕비라고 불릴 수 없다. Queen Consort라는 게 왕비인데 그 Queen Consort라는 말로 불리지 못하고 프린세스가 컨설트다, 이렇게 불리기로 사실 합의가 된 상태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가 지난봄에 카밀라를 왕비로 대우를 해달라, 이런 말을 남겼고 국민들이 그걸 받아들인 거죠. 국민의 여론을 깨닫고 여왕도 그렇게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앵커]
아침에 외신 통해서 보니까 찰스 3세 영국 국왕과 윌리엄 왕세자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관 참배하려는 시민들 엄청나게 조문 줄이 길던데 예고 없이 깜짝 방문해서 시민들에게 감사와 함께 같이 위로의 말도 전하고 그런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찰스 3세 국왕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후광을 입어서 영연방을 제대로 존속시키는 것이 가장 큰 업무가 되겠죠?
[박지향] 네, 영연방의 존속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실 영국은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라고 하는 4개의 장소로 구성이 되는 연합왕국이죠. 그 연방왕국을 유지하는 게 사실은 영연방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 찰스 3세가 그곳들을 다 방문을 했어요. 그래서 북아일랜드까지도 갔었고 그다음에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를 받고. 웨일스에서의 행사를 제가 BBC를 통해서 봤는데 웨일스어는 여러분 아시다시피 영어하고 전혀 다른 언어예요.
웨일스어는 따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건 완전히 별개의 그런 언어인데 프린스 오브 웨일스 시대에 찰스가 웨일스어를 배웠죠. 그래서 웨일스의회에서 며칠 전에, 어제인가 행사를 하는데 웨일스어로 연설을 하기도 하고 하면서 국민들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그런 조문객들한테 다가가서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서로 대화를 하고 이러는 것이 전부 다 연합왕국을 유지를 해야 된다.
그러니까 지금 스코틀랜드 같은 데서 다 아시다시피 굉장히 분리운동이 치열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선거도 앞두고 있고. 그래서 그런 연합왕국, 유나이티드킹덤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찰스 3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심각한 그런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앵커]
찰스 3세 국왕이 그런 엄중한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지 저희가 함께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시각으로 내일 저녁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장례식이 엄수될 예정인데요. 여왕 사후 일어난 영국 안팎의 안팎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지금까지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와 함께 얘기해봤습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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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와이드]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8일, 96세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우리 시각으로 내일 저녁장례식이 엄수될 예정인데요. 각국 정상급 지도자 100여 명이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의미,그리고 여왕 사후 일어날 영국 안팎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 모시고자세한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왕실의 상징뿐 아니라 영국을 상징하는 그런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죠. 96세 일기로 서거를 했습니다. 여왕의 서거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박지향]
70세 이하의 영국 국민이 전체 인구의 한 84~85% 됩니다. 그들한테 태어나면서부터 여왕은 국왕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국왕이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러니까 국가의 수장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상징 이런 존재가 바로 엘리자베스 2세입니다.
모든 왕을 국민들이 다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왕이 별로 그렇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앵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재위 기간만 벌써 70년이 넘습니다.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로 기록이 됐는데 오랜 기간 여왕이라는 그 자리를 지켜오면서 인상적인 기록도 많이 남겼을 것 같아요.
[박지향]
그렇죠. 70년 동안 재위해 있었고 그다음에 그전에 빅토리아 여왕이 64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300년 전에 엘리자베스 1세, 유명한 처녀 왕 엘리자베스 1세가 한 45년 동안 치세를 했는데 그때 기준으로 보면 요즘에 70년 동안 통치를 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지금 엘리자베스 2세를 말하는 건데 1952년에 여왕으로 등극을 했습니다. 그때 수상이 윈스터 처칠 경이에요. 그리고 그때 영국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해서 그런 대제국을 한 세기 이상 유지를 하고 있었고 또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역할이 굉장히 컸어요.
우리 국민들은 잘 모르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전쟁의 후반부에 가면 미국과 소련의 역할이 굉장히 큽니다. 그런데 전쟁 초기에 거의 모든 유럽의 나라들이 다 히틀러한테 굴복을 하고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관망 상태에 있을 태예요.
그럴 때 영국 혼자서 전쟁을 수행을 해나갑니다. 굉장히 결연한 태도로 고독한 투쟁을 했는데 그때 총리가 윈스턴 처칠 경이었죠. 그래서 그렇게 처칠이 위대한 영웅으로 인정을 받는 것인데 어쨌든 그런 위상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으로 등극했을 때는 영국의 위치가 괜찮았어요.
그래서는데 그 후에 많은 나라들이 대제국이 해체가 되고 독립을 하고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현재 영연방이 56개국으로 구성이 돼 있는데 그 56개국을 영연방으로 모으는 그 힘이 바로 영국 왕실의 힘이었죠. 그래서 아버지인 조지 6세가 서거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공주의 신분으로 해외 순방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영연방국들을 다니면서 그들의 취지를 끌어모으는 이런 역할을 왕실과 여왕이 했던 것이죠.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2011년에 여왕이 에이레공화국을 방문을 합니다.
그것이 거의 100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국왕이 아일랜드를 방문한 거예요. 마지막 국왕의 방문이 1911년이었는데 그때는 아일랜드가 사실 영국의 일부였어요, 신민지였어요.
그러니까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데, 당연히. 그런데 100년 후에 엘리자베스 2세가 2011년이라고 하는 시점에서 더블린을 방문합니다. 그만큼 두 나라의 관계가 험악했다는 소리죠. 마치 우리의 일본과 우리의 관계 같은 이런 관계였어요.
그래서 일본의 동경대학 총장을 지내신 야나이하라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일제시대 때 이런 말을 해요. 제가 인용을 하면 조선은 우리의 아일랜드다.
그럴 정도로 영국와 아일랜드와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그런 관계였는데 그런 별로 친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2011년에 엘리자베스 2세가 아일랜드를 방문하고 지난 세월의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유감을 표현을 하고 이러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상당히 급하게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3년 후인 2014년에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이 또 런던을 방문을 하고 이런 식으로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가 두 나라의 관계, 그리고 영국의 안보를 위해서 대단히 많은 역할을 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앵커]
말씀하신 것처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이전에는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군주가 빅토리아 여왕인데요. 빅토리아 여왕 시대, 잠시 언급도 해 주셨습니다마는 해가 지지 않는 그런 영국을 완성한 그런 나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며 영국을 완성한 시대의 군주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비교했을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어떻게 다르고 관계가 어떨까요?
[박지향]
빅토리아 여왕은 엘리자베스의 고조모세요.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는 여러분들 다 아시다시피 사실은 왕이 될 수가 없는, 태어났을 때는 왕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런 존재죠. 그런데 에드워드 8세라고 하는 그 왕이 1936년에,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인데 1936년에 왕으로 즉위를 합니다.
그런데 1년이 채 못 돼서 그 유명한 심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서 나라가 반대를 하고 정부가 반대를 하고 국민이 반대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기 위해서 왕에서 퇴위를 하죠. 그러는 바람에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차남인데도 불구하고 왕위로 즉위를 한 것이죠. 그러는 바람에 엘리자베스가 미래의 여왕이 되는 것이었고요.
빅토리아 시대는 대단히 영국의 최전성기였어요. 그래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다시 그걸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한다면 전 세계 지표 의 4분의 1이 영국 제국이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빅토리아 여왕의 식민이었어요.
그리고 그때 경제를 완전히 영국이 장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무역의 결제 수단, 모든 사람들이 무역을 하면서 90%가 영국의 파운드화로 결제를 할 정도로 그리고 영국이 전 세계 시장까지도, 경제까지도 장악을 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거에 대비해서 엘리자베스 2세가 통치했던 영국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부터 서서히 침몰하는 그런 과정이었죠. 그러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전성기의 영국을 이끌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엘리자베스 2세는 그런 전성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또 그 많은 고초를 국민과 함께했기 때문에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앵커]
저희가 여기서 잠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어린 나이, 스물다섯입니다. 그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데요. 여왕 즉위식 때 모습을 잠시 화면으로 한 번 만나보실까요?
아주 젊은 시절 엘리자베스 2세 모습을 잠시 만나봤습니다. 25살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말씀하신 것처럼 영국 안팎의 상황이 평탄한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여왕에 주어진 과제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수행을 했다고 보십니까?
[박지향]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일 중요한 게 사실 많은 대제국이 해체되면서 생겨난 신생국가들을 영연방에 모으는 그런 역할이죠. 그게 사실 굉장히 중요했는데 그냥 뿔뿔이 흩어져서 그냥 공화국 이렇게 돼도 되는 것인데. 그런데 56개국이 여전히 영연방에 속해 있고 그리고 그중에 또 상당수가 영국의 국왕을 자신들의 국왕으로 모시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왕실의 역할이 상당히 컸죠.
왕실이 그들을 항상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많은 역할을 했고 끊임없이, 여왕이 아주 끊임없이 순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백몇 회의 나라를 순방을 했다고 그러고, 요새는 나이가 들어서 잘 못했지만 굉장히 열심히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러면 공화국을 만들자, 이러고 주장하던 사람들도 그 앞에서는 여왕을 만나는 순간 그냥 충성을 맹세하고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죠.
[앵커]
70세 생일을 한국에서 맞았을 정도로 우리나라에 대한 각별한 인연도 있는 그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입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그런 역할을 또 정치적으로도 잘했기 때문에 그만큼 또 영국민이나 영연방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않았나 싶은데요.
[박지향]
그런데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 이전에 이미 확립된 원칙이에요. 그래서 영국의 경우에는 1688년에 명예혁명이라고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의로 통치를 하던 왕을 의회에서 쫓아내고 자기들과 대화가 가능한 그런 왕을 모셔오는 거. 일종의 쿠데타죠. 그런 상황에서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라고 하는 그런 여왕의 원칙이 확립이 됐습니다.
여왕도 그걸 잘 지켰죠. 벌써 한 200년 가까이 된 어떤 원칙이니까 잘 지켰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셔야 될 것이 통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속된 말로 하면 놀고 먹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왕이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냐면 매일 아침 박스라는 게 책상에 놓여져 있어요.
그 전날 있었던 모든 정세, 이런 것을 다 왕이 아침에 다 읽고 파악을 합니다. 그리고 매주 한 번씩, 보통 수요일 오전인데 매주 한 번씩 총리하고 알현하고 대담을 하죠. 그리고 또 법안이 통과가 돼서 정식으로 법으로 공포가 되려면 왕이 서명을 해야 돼요.
그리고 군대라든가 교회의 임명권, 이런 걸 왕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립을 유지해야 하지만 정세에는 나몰라라 이게 아니고 면밀히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영국의 정부는 뭐라고 불리냐 하면 국왕폐하의 정부. 이렇게 불려요. 그리고 야당도 국왕폐하의 야당, 이렇게 불립니다. 그러니까 정치의 한가운데에 왕이 있다고 봐야 됩니다.
[앵커]
제가 기억하기에는 처음에 코로나19가 굉장히 영국에 심각하게 확산이 되고 있을 때 2020년 4월인가요?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TV 연설에 나와서 우리가 단결해서 강한 의지를 지속하면 병을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라면서 어떤 위기의 여왕으로서 국민들을 다독이고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의지를 함께 표현한 그 장면이 굉장히 기억이 남습니다. 아마 여왕이 내부적으로 또 대외적으로 자신의 위엄과 함께 국민에 대한 애정 이런 것들을 드러낸 상징적인 장면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렇게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신뢰는 영국 내부에서도 그렇고 외부적으로도 그렇고 높은 데 반해서 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는 대외적인 평가와는 달리 부침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가족과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는데 지금 국왕으로 올라선 찰스 3세 국왕, 당시에는 왕세자 시절에 불륜, 이혼, 그 이후에 다이애나비의 사망까지. 그래서 그런지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왕실 폐지에 대한 그런 목소리가 상당히 높은 것 같더라고요.
[박지향]
그런데 우리가 좀 알아야 될 것이 영국의 왕실은 1066년. 여러분들 역사 시간에 배우셨겠지만 윌리엄 정복왕이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노르망디의 공작인데 해협을 건너와서 잉글랜드를 정복을 하고 왕조를 계창을 하죠. 그때부터 엘리자베스 2세, 지금 찰스 3세까지 꾸준히 유지돼 오는 그런 왕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찰스 3세, 엘리자베스 2세의 DNA에는 윌리엄 정복왕의 피가 섞여있는 거예요. 그럴 정도로 천 년 넘게 계속되는 그런 왕실이기 때문에 이미 굉장히 확고한 제도, 인스티튜션이 된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인 인기의 선호도 이런 것 때문에 제도가 폐지된다든가 이런 거는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엘리자베스 2세 다음으로 찰스 3세가 즉위를 했는데 다이애나비와의 관계 때문에 상당히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그랬죠. 그리고 또 이번에 보니까 카밀라 왕비도 처음에는 인기도가 1%도 안 됐어요, 정말. 그런데 이번에 많은 추모객이나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을 보니까 국민들이 상당히 카밀라 왕비를 받아들인 것 같은. 그래서 처음에는 사실 카밀라 왕비가 왕비로 불릴 수가 없었어요.
2005년에 두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때는 왕비라고 불릴 수 없다. Queen Consort라는 게 왕비인데 그 Queen Consort라는 말로 불리지 못하고 프린세스가 컨설트다, 이렇게 불리기로 사실 합의가 된 상태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가 지난봄에 카밀라를 왕비로 대우를 해달라, 이런 말을 남겼고 국민들이 그걸 받아들인 거죠. 국민의 여론을 깨닫고 여왕도 그렇게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앵커]
아침에 외신 통해서 보니까 찰스 3세 영국 국왕과 윌리엄 왕세자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관 참배하려는 시민들 엄청나게 조문 줄이 길던데 예고 없이 깜짝 방문해서 시민들에게 감사와 함께 같이 위로의 말도 전하고 그런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찰스 3세 국왕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후광을 입어서 영연방을 제대로 존속시키는 것이 가장 큰 업무가 되겠죠?
[박지향] 네, 영연방의 존속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실 영국은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라고 하는 4개의 장소로 구성이 되는 연합왕국이죠. 그 연방왕국을 유지하는 게 사실은 영연방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 찰스 3세가 그곳들을 다 방문을 했어요. 그래서 북아일랜드까지도 갔었고 그다음에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를 받고. 웨일스에서의 행사를 제가 BBC를 통해서 봤는데 웨일스어는 여러분 아시다시피 영어하고 전혀 다른 언어예요.
웨일스어는 따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건 완전히 별개의 그런 언어인데 프린스 오브 웨일스 시대에 찰스가 웨일스어를 배웠죠. 그래서 웨일스의회에서 며칠 전에, 어제인가 행사를 하는데 웨일스어로 연설을 하기도 하고 하면서 국민들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그런 조문객들한테 다가가서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서로 대화를 하고 이러는 것이 전부 다 연합왕국을 유지를 해야 된다.
그러니까 지금 스코틀랜드 같은 데서 다 아시다시피 굉장히 분리운동이 치열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선거도 앞두고 있고. 그래서 그런 연합왕국, 유나이티드킹덤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찰스 3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심각한 그런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앵커]
찰스 3세 국왕이 그런 엄중한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지 저희가 함께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시각으로 내일 저녁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장례식이 엄수될 예정인데요. 여왕 사후 일어난 영국 안팎의 안팎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지금까지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와 함께 얘기해봤습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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