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일] 한국 특파원들이 평온한 우크라이나 수도에만 있던 이유

[와이파일] 한국 특파원들이 평온한 우크라이나 수도에만 있던 이유

2023.03.06. 오후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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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1주기 현지 취재기
-전쟁은 현재형, 보도는 과거형?
-생각보다 평온한 일상…텅빈 쇼핑몰 그리고 무장 군인들
-보이지 않은 상처..."폭죽 소리만 들어도 놀라"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던 전쟁이 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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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일] 한국 특파원들이 평온한 우크라이나 수도에만 있던 이유
전선 지역과 멀리 떨어진 외교부의 취재 허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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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현재형, 보도는 과거형?

"이 기레기들아, 너흰 CNN, BBC처럼 전쟁터 안 가고 받아쓰기만 하냐"

한국 특파원이 쓴 우크라이나 현지 기사엔 이런 욕이 달리곤 합니다. 외교부는 여행금지 국가인 우크라이나에 최대 2주 취재를 허가해 줍니다. 그것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부가 아닌 서부와 수도 키이우 주변까지만. 외신엔 생생한 전쟁의 현재가 담기지만, 한국 언론엔 1년 전 침공으로 폐허가 된 전쟁의 과거만 나가는 이유입니다.





●생각보다 평온한 일상
키이우 소재 호텔의 지하 대피소

"방탄조끼 입고 갔느냐?"는 친구·지인들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키이우 시민들은 하루 두세 번 울리는 공습경보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매번 대피소에 간다면, 일상생활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공습경보가 울린 뒤 호텔 안 대피소엔 외국인 한 명만 뻘쭘하게 남아 오히려 취재진에게 행동 요령을 묻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한국 취재진이 갈 수 있는 지역은 직접적 피해를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비어 있는 쇼핑몰 그리고 무장한 군인들
YTN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우크라이나 군인

완전한 일상을 되찾았다고 보긴 어려웠습니다. 아직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금이 있었고, 전쟁 1주기로 러시아의 폭격을 걱정해 잠시 피난을 간다는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한때 외국인 손님들로 북적였지만 이젠 주인이 무료하게 앉아있던 전통 음식점. 가게 점원들이 지루해 보일 만큼 개점휴업 상태였던 대형 쇼핑몰. 관공서나 역 앞엔 군 시절에나 봤던 모래주머니가 곳곳에 놓여있었고, 총을 든 군인이 시내를 활보하는 건 익숙한 일상이 됐습니다.

●보이지 않은 상처
배구선수가 되는 게 꿈인 우크라이나 10대 소녀

전쟁터를 화면에 담을 수 없다면, 전쟁 1년을 맞은 사람들 마음을 담아보기로 취재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저마다 생채기가 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군의 폭격에 집을 잃은 10대 소녀는 지금이 비현실적인 '꿈'만 같다고 했습니다.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사춘기 소녀에게 간이 주택에서 수십 명이 함께 생활하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폭죽 소리만 들어도 놀라"
YTN 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마리나 혼다 키이우시 부시장

키이우 부시장은 전쟁 발발 뒤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폭격 소리와 비슷한 불꽃놀이 소리 때문에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고백하며, 시민들의 정신적 트라우마 치료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심리상담사로 일하다 지난해 입대했던 20대 청년은 러시아군의 포로로 잡혔던 동료들이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게 더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는데요. 포로로 지내며 '살아남기'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곪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는데, 그 곪은 마음이 언젠가 터진다는 겁니다.

●"작년 같은 일은 발생 안 할 것"
이번 전쟁에서 눈을 다친 고려인 출신 우크라이나 참전 군인

전직 군인은 고려인이라 기자와 성이 'KIM'으로 같다며 아이 같이 좋아하다가도 전쟁 얘기를 할 땐 살기 어린 눈빛으로 바뀌었고, 우아하게 걸어가던 시민도 인터뷰에서 "작년 같은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눈을 반짝였습니다. 몸 곳곳에 총상, 파편상을 입었는데도 병실 한쪽엔 국기를 걸어두며 전투 의지를 다지던 군인들까지, 말보다 기억에 남는 건 사람들의 눈빛이었습니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던 일이 벌어졌다"
키이우 위성도시 보로댠카에 있는 뱅크시의 작품

러시아가 침공을 공식화한 지난해 2월 24일. 키이우에 사는 마리안나는 늦잠을 자다 "전쟁이 났어"라는 남자친구의 전화에 깼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고 텔레비전을 켰더니,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모두 '출입금지'가 붙었을 폭격 맞은 건물들은 그냥 방치돼 있었습니다. 그 덕에 취재진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무너진 벽돌 사이 널브러져 있던 가족사진, 일기장, 인형, 옷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폭격 당시로 멈춘 시간에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지만, 파괴된 잔해 속에 그려진, 뱅크시의 작품들을 보며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전쟁은 죽은 자에게만 끝난다
키이우 독립광장의 모습

'전쟁은 죽은 자에게만 끝난다'는 플라톤의 유명한 경구처럼,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언젠가 일상을 되찾겠지만, 늘 상처를 가슴 한쪽에 품은 채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 상처의 깊이를 헤아릴 순 없겠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으며 함께 해주고 싶었습니다.

전쟁의 빠른 종식을 기원합니다.

YTN 김승환 (ksh@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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