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 한 그릇…앙드레 김의 '영혼의 음식'

누룽지 한 그릇…앙드레 김의 '영혼의 음식'

2014.08.08. 오전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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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여전히 갈린다. 그러나 뚜렷한 자기 색과 독창성으로 일관되게 한국의 미를 알려온 디자이너는 이 사람뿐이라는데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본명 김봉남). 6년여의 암 투병 끝에 일흔 여섯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년이 됐다. 가족과 지인들은 살아 있었다면 팔순일 그를 위해 지난달 28일 서울 진관사에서 팔순제와 천도재를 올렸다.

그곳에서 그들이 전한 앙드레 김의 숨은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생전에 그가 유난히 아꼈던 소프라노 조수미 씨의 그리움 가득한 편지도….

◆진관사와 40년 인연…아들 합격 빌기도

앙드레 김이 묻힌 곳은 충남 천안공원묘지다. 그러나 그의 가족과 지인들이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곳은 따로 있다.

서울 진관동의 진관사다. 1970년대부터 앙드레 김이 마음의 안식처로 삼고 즐겨 찾은 곳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에 늘 몸을 굽히고, ‘네’라는 대답조차 아껴 말했다는 그이지만 진관사에 들르면 불공을 드린 뒤 절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보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주지 스님은 이렇게 회고한다. “여길 참 좋아하셨어. 워낙 바빠서 자주는 못 오셨지만 그래도 매년 초파일이면 꼭 들러서 등도 켜고 공양도 드리셨어요.”

앙드레 김은 아들이 고3이었을 때 없는 시간을 쪼개 진관사를 좀 더 자주 찾았다고 한다. 하나뿐인 아들의 합격을 열심히 빌던 모습은 여느 엄마들과 똑같았단다.


◆“누룽지는 ‘필수’…환갑·진갑 잔치는 싫어해”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 생존해 있다면 앙드레 김은 오는 24일 생일에 팔순 잔칫상을 받았을 것이다. 문득 그가 살아 있다면 어떤 음식들로 팔순 상을 받고 싶어했을 지 궁금했다.

서울 신사동 앙드레 김 의상실에서 만난 아들 중도 씨는 뜻밖의 얘기를 했다. “제사상에는 못 올렸지만 아버지 생신 때 빼놓지 않았던 음식이 있습니다. 누룽지와 잔치국수입니다. 살아계셨다면 팔순 상에도 올랐을 겁니다.”

앙드레 김은 생일날 아들 내외와 손주들을 데리고 외식도 자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집에서 생일상을 차릴 때면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되는 ‘필수 음식’이 누룽지와 잔치국수였다고 한다.

"갈비찜, 잡채, 누룽지 끓인 것, 국수 이런 게 올라갔는데 누룽지는 타서 색이 노랗잖아요. 그걸 돈이라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이걸 먹어야 잘 산다면서. 그리고 국수는 면이 기니까 오래 살라고. 그런 의미에서 그 두 가지를 생일에 꼭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일에도 꼭 챙겨주셨죠."

그런데 음식은 챙기면서도 앙드레 김은 잔치엔 통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환갑, 진갑 모두 가족끼리 밥 먹는 걸로 대신했다. 각계 인사, 스타들, 지인들과 잔치 한 번 했을 법도 한데 의외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하지 말자고 하셨습니다. 일하고 바쁜 사람인데 잔치까지 하는 건 싫다고 하셨습니다. 칠순 때는 용돈 모은 것으로 잔치를 해드리겠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네 돈 네가 써야 한다며 마다하셨습니다.”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앙드레 김의 생활은 소박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생일상에 올리라고 한 누룽지는 꼭 돈 벌자고 먹은 음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의 입맛에 나름의 의미를 담아 몰래 즐긴 별미가 아니었을까.


◆ 소프라노 조수미의 편지

2010년 앙드레 김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스타와 각계 인사들은 앞다퉈 그의 빈소를 찾았다. 4년이 지난 지금, 그런 일이 있기나 했느냐는 듯 그는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보인다.

그런데 해외에 있는 그의 한 지인이 4주기를 맞아 변함없는 그리움과 추억을 담아 편지 한 통을 YTN에 보내왔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다.

다음은 조수미 씨의 편지 전문이다.

그리운 선생님,
서울에 도착하면 저는 아직도 습관처럼
선생님께 전화드려야지 하다가 멈칫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는 기억들도 많지만
선생님과의 추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립고 따뜻합니다.

패션과 음악, 선생님과 저의 언어는 달랐지만
세계인들에게 한국적인 색과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어서
열정적으로 함께 몇 시간이고 의논하곤 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지독하게 준비하는 저를
선생님은 누구보다 이해해주셨습니다.

그리운 선생님,
지켜보고 계시겠지요?
하얀 옷 입으시고 그 환한 미소 지으시며…

대한민국을 위해
이 땅의 젊은이들과 문화인들을 위해
그 뜨거운 열정으로 응원하고 계시겠지요?

한결같은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평생 예술가의 길을 걸으신 선생님,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라는 자부심과 품격으로
한국 알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던
그리운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조수미

◆ 하반기 열릴 ‘미완’의 패션쇼…김수현도 설까?

앙드레 김은 중환자실에 입원하기 전까지 중국에서 열 패션쇼에 여념이 없었다. 항암 주사를 맞은 날도 쉬지 않고 사무실에 출근해 디자인 구상에 몰두했다.

그렇게 열정을 불태웠던 미완의 패션쇼가 4년 만에 한국에서 더 크게 열릴 전망이다. 메인 연출자 겸 디자이너는 후배 디자이너 정구호 씨. 여기에 28년간 앙드레 김 패션쇼를 공동 진행한 모델센터 도신우 회장이 가세해 ‘추모 패션쇼’를 열 거란 소식이다.

한때 앙드레 김의 패션쇼는 별들의 잔치였다. 새로운 스타와 인기 정상의 스타가 한 무대에 서서 그 자체로 또 다른 화제를 낳곤 했다. 그런 만큼 하반기 열리게 될 패션쇼의 메인 모델은 누가 될지 관심거리다.

만약 앙드레 김이 생존해 있다면 누구를 톱 모델로 세우고 싶어 했을까? 아들 중도 씨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배우 김수현 씨요.”라고 말했다.

앙드레 김이라면 정말 좋아했을 이미지다. 어쩌면 하반기 열릴 패션쇼에서 우리는 앙드레 김만의 감성이 녹아있는 ‘이마 맞대기’ 장면을 김수현을 통해 보게 되는 건 아닐까.

◆ 그리고…못다 한 이야기

국민 디자이너로 불리던 앙드레 김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년. 끊임없이 열정을 쏟고 작품을 만들어 냈던 ‘아뜰리에’ 의상실은 현재 아들 중도 씨가 맡아 옛 명성을 되찾으려 애쓰는 중이다.

속옷, 안경, 그릇, 벽지, 골프웨어 등 라이선스 사업이 순항 중이고 국내 고객들 외에 가끔은 중국 관광객까지 들러 큰돈을 쓰고 가 전망이 나쁘지는 않다고 한다. 아버지의 예전 디자인은 그대로 살리면서 20~50대를 아우르는 편안한 느낌의 세컨드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더불어 고인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고 오래 남아있길 바란다.

이런 이유에서 중도 씨는 지난해 국립민속박물관에 아버지의 작품 126점을 기증했다. 조만간 또 다른 120여 점을 역사박물관에도 기증할 예정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지난해 4월부터 오는 11일까지 앙드레 김 의상전시회가 열리며 역사박물관에서도 같은 형식의 전시가 계획돼 있다.

[YTN 김정회 기자 (junghkim@ytn.co.kr)]
[촬영=YTNPLUS 박정민 PD (ipoint@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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