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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변상욱 앵커, 이세나 앵커
■ 출연 : 김진홍 / 영화감독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우리 국민 수천 명이 그대로 바다에 잠겨 돌아오지 못한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그동안 얼마나 알고 계셨습니까?
[앵커]
수십년간 잊혀졌던 이 사건이 영화로 제작돼서 주목받고 있는데요. 오늘 뉴있저에서 이 영화를 연출한 김진홍 감독을 모시고 우리가 잘 몰랐던 우키시마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앵커]
사실은 몇 명이 죽었는지 파악도 안 되고 있는 거죠? 아마 지금 자료 화면에 나왔던 조선으로 돌아가려면 이게 마지막 기회이니까 다 타. 아니면 배급도 안 해 줄 거야, 이거 안 타면. 이렇게 해갖고 다 탔는데 그냥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린 건데 일단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부터 소개를 간략히 해 주시죠.
[김진홍]
1945년 8월 15일날 일본 패망 후에 아오모리현에 있던 강제징용들 1만여 명을 귀국시켜주겠다는 그런 이유로 전부 다 배에 태웠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이 우키시마호는 귀국선이 아니라 일본은 어차피 출발할 때부터 이 우키시마호를 부산에 도착시키겠다는 그런 의향 자체도 없었습니다.
[앵커]
보내준다고 했지만.
[김진홍]
네. 그래서 8월 19일 날 해방되고 난 후에 8월 19일날 우키시마호를 정착시키고 그 산재해 있던 강제징용자들과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분들 1만여 명을 배에 태우고 거의 3일간 태웠습니다. 20일 오후 5시에 출발하죠. 그렇게 태워서. 그래서 부산으로 향한 게 아니고 일본 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24일 날 오후 5시 20분에 마이즈루 항에 도착하게 되죠.
[앵커]
잠깐만요. 아오모리 쪽이면 홋카이도가 있고 그쪽일 거 아니에요. 동해로 가면 되는데.
[김진홍]
그러니까 아예 갈 생각이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해안으로 내려와서 마이즈루만 그 안으로 육지가 보입니다. 들어가서 정지 상태쯤 갔는데 일본 해군들은 먼저 내렸죠. 그리고 나서 쾅 하고...
[앵커]
그런데 사실 우리 국민들 중에서 이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이 아직도 많을 것 같은데요.
[김진홍]
너무 많습니다.
[앵커]
그렇죠.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신 건가요?
[김진홍]
사실 저도 우키시마호 사건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연한 기회에 지인을 통해서 이 우키시마호 사건을 알게 되었고 이거를 좀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영화도 영화이지만 울분이 토해지는 거예요. 아니, 대한민국에 정책입안자나 역사학자들은 뭐를 했느냐. 이게 우키시마호가 1만여 명이 타서 8000여 명이 수상되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런 큰 단일 사건으로 큰 사건이지 않습니까? 이 사건을 역사책에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이건 문제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걸 우선 좀 알려야 되겠다, 이런 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앵커]
배가 폭파된 원인은 미군이 설치했던 기뢰에 부딪쳐서 터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김진홍]
그게 24일 오후 6시 이후에는 배를 움직이지 말라는 그때는 미국 맥아더가 사령관이었죠. 전문이 내려가서 일본에서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항에서 출발지점과 마이즈루항의 도착 지점이 신기하게 맞아떨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오후 6시 이후에는 움직이는 배라도 가까운 항에 들어가라. 그런데 그 타임을 맞춰가지고 그 배가 거의 온 거죠. 그래서 이거는 일본 입장에서 하나의 어떤 핑계를 대기 위해서 고의 폭침이지만 기뢰 폭침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만들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앵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자료 수집하는 데만 3년이 꼬박 걸렸다고요.
[김진홍]
굉장히 많이 걸렸습니다.
[앵커]
일단 생존자를 찾아야 하네요.
[김진홍]
74년 전 일이다보니까 자료도 없고 정말 찾기 어려웠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제가 아주 중요한 분을 한 분 소개받았어요. 그분은 자칭 21세기 독립군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진상규명의 대표 전재진이라는 분이신데 그분이 1985년부터 그때는 생존자가 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녹화를 해놨더라고요. 그래서 그 자료가 천안 독립기념관에 있었고 그걸 제가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앵커]
그분들 말씀을 들어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영도 / 우키시마호 침몰 생존자 (당시 13세) : 고향이 그리웠던 노무자들이 야 이제 고향으로 갈 수 있다고 들뜨고 하는 사이 우키시마호를 승선하면 부산까지 배삯도 없이 데려다 준다고 그러니까 안 탈 수가 없죠.]
[김옥희 / 우키시마호 침몰 생존자 (당시 7세) : 턱을 괴고 있었는데 소리가 '펑' 나더니 사람이 위에까지 올라갔다가 땅으로 뚝 떨어졌다니까.]
[앵커]
그런데 생존자들 증언을 들어보면 뭔가 계획적인 범행인 것 같은데 그걸 뒷받침할 만한 자료 같은 것들이 나왔나요?
[김진홍]
그 자료는 현재로서는 그 배에 폭침 당시에 타고 있었던 그 증언자들의 증언이 답을 해주고 있고요. 저는 이 자리를 빌려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일본의 군사적 조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19일날 오미나토 항에 우키시마호가 정박중이었지만 8월 9일날 일본 전쟁에 개입을 하지 않습니까? 그 이후에 8월15일에 일본이 항복하고 8월 17일날 소련 사할린에 제가 좀 적어왔습니다. 가미시스카 경찰 사건이 있습니다. 그 경찰사건은 일본인들이 퇴거를 하면서 조선인들을 그 경찰선에 다 몰아넣고 못 나오게 못질을 하고 불을 질렀어요.
그런 사건이 있었고 그중에 한 분이 조선인이 예전에는 화장실이 좀 푸세식이지 않았습니까? 그 속으로 들어가서 탈출한 분이 증언하셨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죠. 그다음에 마이즈루항이라고 그것도 사할린에 있는데 거기는 어촌이다 보니까 또 우리 조선일들을 일본인들이 총, 칼로 협박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어선 배 창고에 집어넣어서 얼려서 죽였습니다.
[앵커]
해방된 다음에 오히려 두려우니까 다 죽이는.
[김진홍]
그리고 소련군이 내려오면 조선징용인들은 모두 다 소련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이 대미지를 많이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군사적 조치로 봅니다. 일본이 패망하니까 강제징용인 자체가 적이 될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앵커]
마지막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아까 감독님께서 우리나라는 뭐 했나,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앞으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정부가 좀 어떻게 나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진홍]
일본과의 관계는 진상규명, 이런 말은 참 듣고도 많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번 영화에서도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의 목소리를 높인 부분이 있지만 개인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해서는 절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자체도 비교를 못할 정도이고 정부가 나서줘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나서서 억울한 부분을 풀어주고 좀 대차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진상도 밝히고. 알겠습니다. 감독님 오늘 고맙습니다.
[김진홍]
감사합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 출연 : 김진홍 / 영화감독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우리 국민 수천 명이 그대로 바다에 잠겨 돌아오지 못한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그동안 얼마나 알고 계셨습니까?
[앵커]
수십년간 잊혀졌던 이 사건이 영화로 제작돼서 주목받고 있는데요. 오늘 뉴있저에서 이 영화를 연출한 김진홍 감독을 모시고 우리가 잘 몰랐던 우키시마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앵커]
사실은 몇 명이 죽었는지 파악도 안 되고 있는 거죠? 아마 지금 자료 화면에 나왔던 조선으로 돌아가려면 이게 마지막 기회이니까 다 타. 아니면 배급도 안 해 줄 거야, 이거 안 타면. 이렇게 해갖고 다 탔는데 그냥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린 건데 일단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부터 소개를 간략히 해 주시죠.
[김진홍]
1945년 8월 15일날 일본 패망 후에 아오모리현에 있던 강제징용들 1만여 명을 귀국시켜주겠다는 그런 이유로 전부 다 배에 태웠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이 우키시마호는 귀국선이 아니라 일본은 어차피 출발할 때부터 이 우키시마호를 부산에 도착시키겠다는 그런 의향 자체도 없었습니다.
[앵커]
보내준다고 했지만.
[김진홍]
네. 그래서 8월 19일 날 해방되고 난 후에 8월 19일날 우키시마호를 정착시키고 그 산재해 있던 강제징용자들과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분들 1만여 명을 배에 태우고 거의 3일간 태웠습니다. 20일 오후 5시에 출발하죠. 그렇게 태워서. 그래서 부산으로 향한 게 아니고 일본 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24일 날 오후 5시 20분에 마이즈루 항에 도착하게 되죠.
[앵커]
잠깐만요. 아오모리 쪽이면 홋카이도가 있고 그쪽일 거 아니에요. 동해로 가면 되는데.
[김진홍]
그러니까 아예 갈 생각이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해안으로 내려와서 마이즈루만 그 안으로 육지가 보입니다. 들어가서 정지 상태쯤 갔는데 일본 해군들은 먼저 내렸죠. 그리고 나서 쾅 하고...
[앵커]
그런데 사실 우리 국민들 중에서 이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이 아직도 많을 것 같은데요.
[김진홍]
너무 많습니다.
[앵커]
그렇죠.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신 건가요?
[김진홍]
사실 저도 우키시마호 사건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연한 기회에 지인을 통해서 이 우키시마호 사건을 알게 되었고 이거를 좀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영화도 영화이지만 울분이 토해지는 거예요. 아니, 대한민국에 정책입안자나 역사학자들은 뭐를 했느냐. 이게 우키시마호가 1만여 명이 타서 8000여 명이 수상되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런 큰 단일 사건으로 큰 사건이지 않습니까? 이 사건을 역사책에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이건 문제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걸 우선 좀 알려야 되겠다, 이런 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앵커]
배가 폭파된 원인은 미군이 설치했던 기뢰에 부딪쳐서 터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김진홍]
그게 24일 오후 6시 이후에는 배를 움직이지 말라는 그때는 미국 맥아더가 사령관이었죠. 전문이 내려가서 일본에서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항에서 출발지점과 마이즈루항의 도착 지점이 신기하게 맞아떨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오후 6시 이후에는 움직이는 배라도 가까운 항에 들어가라. 그런데 그 타임을 맞춰가지고 그 배가 거의 온 거죠. 그래서 이거는 일본 입장에서 하나의 어떤 핑계를 대기 위해서 고의 폭침이지만 기뢰 폭침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만들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앵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자료 수집하는 데만 3년이 꼬박 걸렸다고요.
[김진홍]
굉장히 많이 걸렸습니다.
[앵커]
일단 생존자를 찾아야 하네요.
[김진홍]
74년 전 일이다보니까 자료도 없고 정말 찾기 어려웠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제가 아주 중요한 분을 한 분 소개받았어요. 그분은 자칭 21세기 독립군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진상규명의 대표 전재진이라는 분이신데 그분이 1985년부터 그때는 생존자가 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녹화를 해놨더라고요. 그래서 그 자료가 천안 독립기념관에 있었고 그걸 제가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앵커]
그분들 말씀을 들어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영도 / 우키시마호 침몰 생존자 (당시 13세) : 고향이 그리웠던 노무자들이 야 이제 고향으로 갈 수 있다고 들뜨고 하는 사이 우키시마호를 승선하면 부산까지 배삯도 없이 데려다 준다고 그러니까 안 탈 수가 없죠.]
[김옥희 / 우키시마호 침몰 생존자 (당시 7세) : 턱을 괴고 있었는데 소리가 '펑' 나더니 사람이 위에까지 올라갔다가 땅으로 뚝 떨어졌다니까.]
[앵커]
그런데 생존자들 증언을 들어보면 뭔가 계획적인 범행인 것 같은데 그걸 뒷받침할 만한 자료 같은 것들이 나왔나요?
[김진홍]
그 자료는 현재로서는 그 배에 폭침 당시에 타고 있었던 그 증언자들의 증언이 답을 해주고 있고요. 저는 이 자리를 빌려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일본의 군사적 조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19일날 오미나토 항에 우키시마호가 정박중이었지만 8월 9일날 일본 전쟁에 개입을 하지 않습니까? 그 이후에 8월15일에 일본이 항복하고 8월 17일날 소련 사할린에 제가 좀 적어왔습니다. 가미시스카 경찰 사건이 있습니다. 그 경찰사건은 일본인들이 퇴거를 하면서 조선인들을 그 경찰선에 다 몰아넣고 못 나오게 못질을 하고 불을 질렀어요.
그런 사건이 있었고 그중에 한 분이 조선인이 예전에는 화장실이 좀 푸세식이지 않았습니까? 그 속으로 들어가서 탈출한 분이 증언하셨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죠. 그다음에 마이즈루항이라고 그것도 사할린에 있는데 거기는 어촌이다 보니까 또 우리 조선일들을 일본인들이 총, 칼로 협박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어선 배 창고에 집어넣어서 얼려서 죽였습니다.
[앵커]
해방된 다음에 오히려 두려우니까 다 죽이는.
[김진홍]
그리고 소련군이 내려오면 조선징용인들은 모두 다 소련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이 대미지를 많이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군사적 조치로 봅니다. 일본이 패망하니까 강제징용인 자체가 적이 될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앵커]
마지막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아까 감독님께서 우리나라는 뭐 했나,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앞으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정부가 좀 어떻게 나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진홍]
일본과의 관계는 진상규명, 이런 말은 참 듣고도 많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번 영화에서도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의 목소리를 높인 부분이 있지만 개인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해서는 절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자체도 비교를 못할 정도이고 정부가 나서줘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나서서 억울한 부분을 풀어주고 좀 대차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진상도 밝히고. 알겠습니다. 감독님 오늘 고맙습니다.
[김진홍]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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