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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3년 2월 9일 (목요일)
□ 진행 : 이현웅 아나운서
□ 출연: 조한성 역사작가, 배어진 학생(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 청년대표 )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현웅 아나운서(이하 이현웅): 우리 일상에서 보훈 문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국가보훈처와 함께 하는 특별기획 <슬기로운 보훈생활> 9번째 시간입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영화 <밀정> 그리고 <암살>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바로 ‘의열단’ 소재의 영화라는 점인데요. 오늘은 의열단 단원 중 한 분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대한 최고의 스나이퍼, 일제 경찰과 1 대 1,000의 총격전을 벌였던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전해주실 분 두 분, 스튜디오에 함께 하셨는데요.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실은 조한성 작가, 그리고 지난 연말에 있었던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토크 콘서트에서 청년 대표로 참여한 배어진 학생 두 분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조한성 역사작가(이하 조한성): 안녕하세요.
◐ 배어진 학생((이하 배어진): 안녕하세요.
◇ 이현웅: 우리 청취자분들께 두 분, 정식으로 인사 한 분씩 부탁드립니다.
◆ 조한성: 저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조한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 배어진: 안녕하세요. 저는 국민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배어진입니다.
◇ 이현웅: 그러면 오늘 본격적인 이야기 나눠볼게요, 올해가 김상옥 의사의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입니다. 낯선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사건이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조한성: 이 사건이 바로 영화 <밀정>의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건데요. 김원봉이 의열단 을 동원해가지고 사회주의자들하고 힘을 모아요. 그래서 ‘대규모 암살 파괴계획’이라는 걸 수립을 합니다. 이게 뭐냐면 당시에 일제의 주요 기관, 그다음에 일제의 주요 인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암살하고 파괴해가지고 조선을 완전히 뒤흔들어서 혁명을 일으키겠다라고 하는 아주 대규모 계획이에요.
◇ 이현웅: 세부적으로 보면 어떤 것들이 포함이 돼 있죠?
◆ 조한성: 여기에 폭탄이 일단 필요하잖아요. 폭탄 개발을 하는 데 자금이 많이 드는데, 이때 당시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자금이 들어오는데, 이 자금이 운 좋게도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다 골고루 나눠서 쓰게 돼요. 근데 그중에서 의열단이 가장 한 단체가 가장 많은 돈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4만 루블 정도?
◇ 이현웅: 4만 루블이면 얼마 정도입니까?
◆ 조한성: 지금으로 따지면 한 70억? 그래서 그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기술자를 이제 섭외를 하는데, ‘마쟈르’라고 하는 헝가리 사람을 섭외를 해서 이 사람한테 이제 개발을 해가지고 폭탄이 아주 수준 높은 폭탄이 나왔어요. 그래서 암살용 폭탄하고 파괴용 폭탄, 그다음에 방화용 폭탄, 이렇게 세 가지 종류의 아주 성능 좋은 폭탄이 나왔는데. 이게 이제 나중에 일제가 압수를 한 다음에 실험을 하거든요. 얼마나 위력이 센지. 근데 자기네들이 깜짝 놀라죠. 그러니까 큰 다리 하나를 부서뜨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는 폭탄이다. 그래서 그런 폭탄을 개발을 해서 이제 이거를 국내로 운송을 해야 되겠죠. 그래서 국내로 운송하는 책임자를 따로 선택하고, 그다음에 여러 실행 요원들을 선택을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발송을 하는 책임자로는 김한희라고 하는 독립운동가를 쓰고요. 그다음에 여러 실행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이제 김상옥 의사가 되겠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그러면 여러 가지 계획들이 있었을 텐데, 김상옥 의사는 그중에서 어떤 암살 혹은 폭발을 책임을 졌습니까?
◆ 조한성: 김상옥 의사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에 총독이었던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들어올 때는 총 여러 자루, 한 세 자루 이상 되는 자루를 가지고 왔고, 실탄, 그리고 선전용으로 뿌리는 그런 전단을 만들어 가지고 인쇄를 해갖고 왔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몸속에다 숨기고 입국을 했고요. 그다음에 암살용 폭탄은차후에 받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들어오자마자 정부는 막 찾았는데 총독이 다행히 서울역에, 그러니까 당시로 말하면 남대문 정거장인데요. 일본으로 서울역을 통해서 일본으로 이제 나가는 그런 일정이 잡혀 있었던 거예요. 그거를 알아채고 서울역에서 가까운 지역의 이제 은거를 하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자기 여동생의 집입니다. 그래서 ‘삼판통’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으로 얘기하면 후암동. 후암동 언덕의 맥에 있는 자기 여동생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이제 계속 계획 준비를 하고 있었죠.
◇ 이현웅: 늘 교과서에서는 사건별로 이름을 붙여가지고 알려주다 보니까 그런 기억만 있지, 이렇게 세세한 얘기를 들어본 게 처음이라 굉장히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흥미롭게 들립니다. 경성에 돌아왔을 당시에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고요?
◆ 조한성: 네. 이게 우연히 사건이 일어났는데, 1923년 1월 12일 발생한 거예요. 이게 초저녁에 사람들이 막 경찰서 주변을 큰 도로니까요, 종로 큰 도로변에 있으니까,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큰 파괴음이 들리면서 폭탄이 터졌죠. 위력은 세지 않았어요. 위력은 세지 않았는데 경찰서 창문들이 부서졌고 지나가던 행인들 7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 이현웅: 이건 누가 주도를 해서 된 건가요?
◆ 조한성: 이거를 주도한 걸로 지금 정설로 알려져 있는 것은 김상옥 의사가 했다라고 이제 알려져 있는데, 다른 설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이따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좀 간략하게 좀 들어봤는데,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고자 토크 콘서트도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청년 대표로 참여한 게 오늘 나와주신 어진 학생인데, 토크 콘서트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도 궁금해요.
◐ 배어진: 네, 토크 콘서트에서는 김상옥 의사의 어린 시절부터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김상옥 의사 하면 역사 시간에 그렇게 달달 외웠던 ‘종로경찰서 폭파’라는 이 7글자밖에 기억을 못 하잖아요. 솔직히 저도 토크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김상옥 의사의 삶을 살펴봤거든요. 그런데 놀랐던 건, 김상옥 이사가 무려 8살 때부터 일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국 유학을 가겠다는 꿈을 가지면서 공부까지 정말 열심히 하셨어요. 그러면 이제 딱 드는 생각이 하나가 있죠. ‘나 8살 때 뭐 했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이제 사업가로서의 모습이나 위험에 처한 학생을 구하는 정의로운 모습까지 다양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 이현웅: 그랬군요. 그리고 1 대 1,000. 계속해서 제가 앞서서 3번 정도 얘기를 했는데 이 얘기도 나눠봐야 될 것 같아요. 경성에 돌아온 후에 말씀해 주신 종로경찰서 폭탄 사건이 벌어지면서 대대적인 단속이 실시됐다고요?
◆ 조한성: 네. 그게 종로를 지키는 종로경찰서란 말이죠. 그러니까 명동 지방은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고요. 그다음에 종로는 한국인들,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에요. 그런데 그 조선인들을 경계하고 그다음에 조선인들을 통제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 종로에 있는 종로경찰서란 말이죠. 그런데 거기다가 폭탄을 던졌으니까 이게 굉장히 큰 사건이잖아요.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인 거예요. 그런데 첩보를 하나 입수를 하게 됩니다. 동대문경찰서에서 후암동의 어느 집에 그 유력한 범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숨어 있다라고 하는 첩보를 알게 돼요. 그래서 이 경찰들이 동대문경찰서하고 종로경찰서가 같이 팀을 만들어서 새벽에 체포를 하러 갑니다. 그래서 다 포위를 하고 4명이 돌격조로 해서 4명이 제일 앞장서서 돌격을 하는 거예요. 체포하려고. 그런데 그 4명이 다 쓰러져요. 처음 앞에 나간 사람은 바로 그 현장에서 즉사, 현장에서 즉사하고 그다음에 나머지 2명은 아주 큰 부상을 입게 돼요. 그러니까 김상옥 의사가 지키고 있다가 경찰들이 들어오니까 바로 총을 쏴가지고요. 그래서 그 엄청난 총격전이 그다음부터 벌어지는데, 이 총격전 끝에 김상옥 의사는 남산을 거쳐가지고 탈출을 하게 돼요.
◇ 이현웅: 그래서 ‘동대문 홍길동’ 이런 별명도 붙은 건가요?
◆ 조한성: 네, 맞습니다.
◇ 이현웅: 근데 절대적인 숫자가 혼자 상대하기 좀 어려운 숫자 아니었을까요?
◆ 조한성: 그런데 이제 가장 유명한 게, 김상옥 의사는 쌍권총이 유명하거든요. 총을 막 두 대를 쏘면서, 그냥 몸이 굉장히 날랐던 것 같습니다. 총을 쏘면서 남산 쪽으로 도망을 갔고. 경찰들이 바로 추격을 했거든요. 그래서 왕십리까지 추격을 해가는데 왕십리에서 눈 위에 있는 발자국을 놓치게 돼요. 그래서 더 이상 찾지 못하고, 이 김상옥 의사는 절에 잠깐 숨어 있다가 그다음에 자기 동지가 있는 그 곳으로 도망을 가게 되죠.
◇ 이현웅: 앞서서 총 감사를 책임을 졌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성공했나요?
◆ 조한성: 이거는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실행해보지도 못하고 안타깝게도 실패를 하게 됩니다.
◇ 이현웅: 실패였군요. 근데 앞서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김상옥 의사가 했다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말씀도 해 주셨잖아요. 잠시 후에 말씀해 주시겠다고 했던 내용들 지금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 조한성: 이게 정설론은 김상옥 의사가 한 걸로 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이게 김상호 의사가 했을까라고 하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어요. 왜냐하면 당시에 ‘대암살 파괴 계획’이라고 하는 아주 큰 계획을 갖고 있었잖아요. 이런 계획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주 조심을 해야 되는 거잖아요. 조심하고 있다가 계획대로 여러 가지 실행을 해야 되는데, 아직 폭탄이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좋은 폭탄을 개발을 해놨는데. 그게 아직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고 그걸 받아서 파괴 계획을 하려고 했던 거거든요. 그런데 들어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지금 종로경찰서에서 터졌단 말이에요, 폭탄이. 그러니까 이거는 김상옥 의사가 하지 않은 게 아니 라고 하는 얘기가 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설이 있다는 거. 그리고 당시에 일본 경찰 쪽에서도 이게 범인이 사실 김상옥 의사라고 딱 찍고 수사를 했잖아요. 그리고 했는데 이분이 순국을 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런 증언을 못 들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 경찰 쪽에서도 계속 의심을 했어요. 범인이 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수사를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실제 범인을 찾으려고 그런 모습도 보이기 때문에 이런 설이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 이현웅: 영화 <밀정>의 배경이 되기도 했고요, 그다음에 앞서서 이제 1 대 1,000 얘기도 했는데, 그 긴박했던 순간들도 짧게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 조한성: 김상옥 의사가 도망을 갔다고 그랬잖아요. 남산을 거쳐서 도망을 갔는데. 겨울이었고 눈밭이었고 그다음에 신발도 제대로 없어서 동상을 입은 채로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총도 하나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총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나중에 그게 눈이 녹은 다음에 발견이 됐어요.
◇ 이현웅: 그 영화에서 나오는 동상 걸린 발가락 장면도 그때네요?
◆ 조한성: 네, 맞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상태로 도망을 가다가 어디로 갔냐면 효제동으로 도망갔습니다.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효제동 73번지에 있던 자기 동지한테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 댁에 숨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같이 독립운동 했던 다른 분, 전우진이라는 분이 경찰에 붙잡혀가지고 갖은 고문 끝에 그 은신처를 얘기를 해버려요. 그래가지고 그 은신처가 들통이 나고, 그래서 1924년 1월 22일 새벽 3시에 경기도 경찰부의 ‘우마노’라고 하는 경찰부장이 있어요. 그 사람이 주도가 돼가지고 서울에 있는 경찰들을 다 모아가지고 효제동으로 출동을 합니다. 그래서 다 완전 장악을 하고요, 그다음에 포위를 하고, 지붕 위에다가는 저격수까지 배치를 하고. 그리고는 4시간 있다가 새벽 7시에 작전을 개시를 합니다. 그래가지고 돌진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73번지 집으로 돌진을 하니까 김상옥 의사가 총을 쏘면서 저항을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옆집으로, 대각선에 있는 집으로 도망을 가요. 그래서 거기서 막 쏘는데. 그 대각선의 집에 또 안타깝게도 그 집 주인이 김상옥 의사가 들어오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자기도 연루될까 봐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바람에 소리가 커진 거예요. 그래서 들통이 나가서 또 경찰이 그쪽으로 오고. 그래서 그 번지에서 다시 옆집으로 또 도망을 가고. 그리고 그 옆집에서 또 화장 변소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변소에 숨어서 총을 쏘고. 그다음에 변소에서 안 되니까 다시 탈출해서 그 옆집으로 해서 72번지 집으로 마지막에 가게 되거든요. 거기서 격렬하게 싸우다가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순국하신 걸로 돼 있습니다.
◇ 이현웅: 듣기만 해도 영화 같은 그런 장면인데 이 긴박한 순간을 또 보고 들었을 거 아니에요. 우리 어진 학생은 어떤 생각하셨어요?
◐ 배어진: 저는 솔직히 진짜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 나오기 어렵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만약에 제가 거기 상황에 있었으면 전 그냥 먼저 도망갔을 것 같아요. 먼저 도망갔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저는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결국 아까 변소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셨는데, 이제 최후도 결국 변소에서 맞이하게 되시니까요.
◇ 이현웅: 그 장면인데요. 영화 <밀정> 속의 한 장면 잠깐 짧게 준비를 했습니다. 짧게 한번 듣고 와볼게요.
- 장옥이, 나 이정철이야. 우리 얘기 좀 하자. 지금 문 열 테니까 쏘지 마라 .
- 왜놈들은 나라 팔아먹고 너같은 놈은 동포 팔아먹고. 그래서 먹고 살 만하냐. 더러운 매국노들.
- 넌 이 나라가 독립이 될 것 같냐. 어차피 기울어진 배야.
- 그렇지. 기울어진 배에 쥐새끼들이 먼저 빠져나가지.
- 나가자. 나가면 살 수 있어. 목숨은 건사해야지.
- 사람이 쥐새끼와 함께할 순 없지. 대한독립만세.
◇ 이현웅: 영화 <밀정>의 한 장면 보고 왔고요. 지금 YTN 라디오 애청자분들은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에서도 김상옥 편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잘 알고 계십니다. 여기에 나온 이야기 후손의 증언 들어보면요, 돌아가신 후에도 눈을 번쩍 뜨고 손가락이 움직였다 시신이 벌집 같았다. 이런 얘기하시더라고요?
◆ 조한성: 실제 그 당시 자료에도요, 당시 신문 보도에도 끝까지 총을 쏘다가 돌아가신 걸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떤 책이나 그동안 계속 기정사실로는 자결하신 걸로 나오거든요. 이거는 당시에 독립운동가들의 최후가 자결한 것이 더 멋있어 보인다는 그런 어떤 것들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증언이 된 거고, 자료상으로는 이렇게 끝까지 총을 쏘시면서 순국하신 것으로 돼 있습니다.
◇ 이현웅: 독립운동가들 보통 기록을 남기지 않는데, 김상옥 의사의 사진은 한 장이 남아 있습니다. 보면 경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양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는데 뒷짐을 지고 있단 말이죠. 이 내용도 <100년의 소리> 관련해서 들어보신 분들 아시겠지만, “조국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부끄럽다”라고 하면서 두 손을 뒤로 숨긴 겁니다. 우리 어진 학생은 이런 청년 세대로서 정신이라고 할까요, 어떻게 바라보세요?
◐ 배어진: 김상옥 이사가 되게 많은 일을 하셨잖아요, 조국을 위해서.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셨던 걸 보면 그만큼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랑 사명감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지는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저도 사회에 대한 관심이 되게 많거든요. 또 저는 정치외교학과이기도 하고, 제가 또 생일이 6월 6일 현충일이라서 애국심도 꽤 높은 편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김상옥 의사 같은 불굴의 정신을 갖는 게 저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더 어려웠겠죠. 저도 나름 이제 여기저기 도전한다고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어떨 때는 이런 독립운동가분들의 정신을 본받고 싶다, 그런 용기를 좀 배우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끔 하는 것 같습니다.
◇ 이현웅: 늘 이렇게 얘기 듣다 보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많이 배울 점이 있는데. 결국 김상옥 의사가 승복을 하고 나서 남은 가족들의 삶을 걱정하는 그런 시선들도 있을 것 같아요. 남은 가족들의 삶은 어땠나요?
◆ 조한성: 가족들이 제대로 살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사건 직후에는 계속 수사에 불려다니고 고문당하고 이런 고생을 했고요. 그다음에 생계가 그러면 힘들어지잖아요. 그래서 영덕 철물점이라고 운영했던 김상옥 의사가 굉장히 잘 운영했던 곳이 4년 만에 폐업을 해야 할 정도로, 남의 손에 넘어갈 정도로 굉장히 곤란해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현웅: 저희가 준비된 시간이 이제 다 끝났는데요. 두 분께 10초 정도씩 오늘 이 코너에서 못 다했던 이야기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연구원님부터 부탁드릴까요?
◆ 조한성: 김상옥 의사는 자기가 이렇게 체포될 위기에, 사실은 체포돼도 되거든요. 체포돼도 되지만, 그 다음을 기약해도 되지만 아마 그 순간에 판단을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여기서 잡히나 아니면 지금 잡히지 않고 내가 저항을 하나, 이걸 선택해야 되는데 잡히지 않고 내가 여기서 저항해버림으로써 더 큰, 일제를 좀 뒤흔들겠다라고 하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요. 그런 선택이 아마도 지금까지 김상옥 의사를 역사적으로 이름이 남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 배어진: 우리가 김상옥 의사의 삶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김상옥 의사가 그의 삶을 통해서 현재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제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은 각박하지만 베어진 같은 사람이 있어서 좀 살 만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제 꿈인데요. 좀 이상적이긴 하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안 좋은 일들을 겪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 것들이 저를 각성하게 만들었던 게 좀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고정관념들이 있잖아요. 그런 고정관념들을 제가 해결하기 위해서 좀 노력을 많이 했는데, 김상옥 의사는 그런 어린 시절의 고난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보이셨던 것처럼 제가 김상옥 의사의 삶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여기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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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일시 : 2023년 2월 9일 (목요일)
□ 진행 : 이현웅 아나운서
□ 출연: 조한성 역사작가, 배어진 학생(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 청년대표 )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현웅 아나운서(이하 이현웅): 우리 일상에서 보훈 문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국가보훈처와 함께 하는 특별기획 <슬기로운 보훈생활> 9번째 시간입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영화 <밀정> 그리고 <암살>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바로 ‘의열단’ 소재의 영화라는 점인데요. 오늘은 의열단 단원 중 한 분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대한 최고의 스나이퍼, 일제 경찰과 1 대 1,000의 총격전을 벌였던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전해주실 분 두 분, 스튜디오에 함께 하셨는데요.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실은 조한성 작가, 그리고 지난 연말에 있었던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토크 콘서트에서 청년 대표로 참여한 배어진 학생 두 분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조한성 역사작가(이하 조한성): 안녕하세요.
◐ 배어진 학생((이하 배어진): 안녕하세요.
◇ 이현웅: 우리 청취자분들께 두 분, 정식으로 인사 한 분씩 부탁드립니다.
◆ 조한성: 저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조한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 배어진: 안녕하세요. 저는 국민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배어진입니다.
◇ 이현웅: 그러면 오늘 본격적인 이야기 나눠볼게요, 올해가 김상옥 의사의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입니다. 낯선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사건이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조한성: 이 사건이 바로 영화 <밀정>의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건데요. 김원봉이 의열단 을 동원해가지고 사회주의자들하고 힘을 모아요. 그래서 ‘대규모 암살 파괴계획’이라는 걸 수립을 합니다. 이게 뭐냐면 당시에 일제의 주요 기관, 그다음에 일제의 주요 인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암살하고 파괴해가지고 조선을 완전히 뒤흔들어서 혁명을 일으키겠다라고 하는 아주 대규모 계획이에요.
◇ 이현웅: 세부적으로 보면 어떤 것들이 포함이 돼 있죠?
◆ 조한성: 여기에 폭탄이 일단 필요하잖아요. 폭탄 개발을 하는 데 자금이 많이 드는데, 이때 당시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자금이 들어오는데, 이 자금이 운 좋게도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다 골고루 나눠서 쓰게 돼요. 근데 그중에서 의열단이 가장 한 단체가 가장 많은 돈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4만 루블 정도?
◇ 이현웅: 4만 루블이면 얼마 정도입니까?
◆ 조한성: 지금으로 따지면 한 70억? 그래서 그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기술자를 이제 섭외를 하는데, ‘마쟈르’라고 하는 헝가리 사람을 섭외를 해서 이 사람한테 이제 개발을 해가지고 폭탄이 아주 수준 높은 폭탄이 나왔어요. 그래서 암살용 폭탄하고 파괴용 폭탄, 그다음에 방화용 폭탄, 이렇게 세 가지 종류의 아주 성능 좋은 폭탄이 나왔는데. 이게 이제 나중에 일제가 압수를 한 다음에 실험을 하거든요. 얼마나 위력이 센지. 근데 자기네들이 깜짝 놀라죠. 그러니까 큰 다리 하나를 부서뜨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는 폭탄이다. 그래서 그런 폭탄을 개발을 해서 이제 이거를 국내로 운송을 해야 되겠죠. 그래서 국내로 운송하는 책임자를 따로 선택하고, 그다음에 여러 실행 요원들을 선택을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발송을 하는 책임자로는 김한희라고 하는 독립운동가를 쓰고요. 그다음에 여러 실행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이제 김상옥 의사가 되겠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그러면 여러 가지 계획들이 있었을 텐데, 김상옥 의사는 그중에서 어떤 암살 혹은 폭발을 책임을 졌습니까?
◆ 조한성: 김상옥 의사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에 총독이었던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들어올 때는 총 여러 자루, 한 세 자루 이상 되는 자루를 가지고 왔고, 실탄, 그리고 선전용으로 뿌리는 그런 전단을 만들어 가지고 인쇄를 해갖고 왔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몸속에다 숨기고 입국을 했고요. 그다음에 암살용 폭탄은차후에 받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들어오자마자 정부는 막 찾았는데 총독이 다행히 서울역에, 그러니까 당시로 말하면 남대문 정거장인데요. 일본으로 서울역을 통해서 일본으로 이제 나가는 그런 일정이 잡혀 있었던 거예요. 그거를 알아채고 서울역에서 가까운 지역의 이제 은거를 하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자기 여동생의 집입니다. 그래서 ‘삼판통’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으로 얘기하면 후암동. 후암동 언덕의 맥에 있는 자기 여동생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이제 계속 계획 준비를 하고 있었죠.
◇ 이현웅: 늘 교과서에서는 사건별로 이름을 붙여가지고 알려주다 보니까 그런 기억만 있지, 이렇게 세세한 얘기를 들어본 게 처음이라 굉장히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흥미롭게 들립니다. 경성에 돌아왔을 당시에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고요?
◆ 조한성: 네. 이게 우연히 사건이 일어났는데, 1923년 1월 12일 발생한 거예요. 이게 초저녁에 사람들이 막 경찰서 주변을 큰 도로니까요, 종로 큰 도로변에 있으니까,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큰 파괴음이 들리면서 폭탄이 터졌죠. 위력은 세지 않았어요. 위력은 세지 않았는데 경찰서 창문들이 부서졌고 지나가던 행인들 7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 이현웅: 이건 누가 주도를 해서 된 건가요?
◆ 조한성: 이거를 주도한 걸로 지금 정설로 알려져 있는 것은 김상옥 의사가 했다라고 이제 알려져 있는데, 다른 설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이따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좀 간략하게 좀 들어봤는데,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고자 토크 콘서트도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청년 대표로 참여한 게 오늘 나와주신 어진 학생인데, 토크 콘서트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도 궁금해요.
◐ 배어진: 네, 토크 콘서트에서는 김상옥 의사의 어린 시절부터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김상옥 의사 하면 역사 시간에 그렇게 달달 외웠던 ‘종로경찰서 폭파’라는 이 7글자밖에 기억을 못 하잖아요. 솔직히 저도 토크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김상옥 의사의 삶을 살펴봤거든요. 그런데 놀랐던 건, 김상옥 이사가 무려 8살 때부터 일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국 유학을 가겠다는 꿈을 가지면서 공부까지 정말 열심히 하셨어요. 그러면 이제 딱 드는 생각이 하나가 있죠. ‘나 8살 때 뭐 했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이제 사업가로서의 모습이나 위험에 처한 학생을 구하는 정의로운 모습까지 다양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 이현웅: 그랬군요. 그리고 1 대 1,000. 계속해서 제가 앞서서 3번 정도 얘기를 했는데 이 얘기도 나눠봐야 될 것 같아요. 경성에 돌아온 후에 말씀해 주신 종로경찰서 폭탄 사건이 벌어지면서 대대적인 단속이 실시됐다고요?
◆ 조한성: 네. 그게 종로를 지키는 종로경찰서란 말이죠. 그러니까 명동 지방은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고요. 그다음에 종로는 한국인들,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에요. 그런데 그 조선인들을 경계하고 그다음에 조선인들을 통제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 종로에 있는 종로경찰서란 말이죠. 그런데 거기다가 폭탄을 던졌으니까 이게 굉장히 큰 사건이잖아요.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인 거예요. 그런데 첩보를 하나 입수를 하게 됩니다. 동대문경찰서에서 후암동의 어느 집에 그 유력한 범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숨어 있다라고 하는 첩보를 알게 돼요. 그래서 이 경찰들이 동대문경찰서하고 종로경찰서가 같이 팀을 만들어서 새벽에 체포를 하러 갑니다. 그래서 다 포위를 하고 4명이 돌격조로 해서 4명이 제일 앞장서서 돌격을 하는 거예요. 체포하려고. 그런데 그 4명이 다 쓰러져요. 처음 앞에 나간 사람은 바로 그 현장에서 즉사, 현장에서 즉사하고 그다음에 나머지 2명은 아주 큰 부상을 입게 돼요. 그러니까 김상옥 의사가 지키고 있다가 경찰들이 들어오니까 바로 총을 쏴가지고요. 그래서 그 엄청난 총격전이 그다음부터 벌어지는데, 이 총격전 끝에 김상옥 의사는 남산을 거쳐가지고 탈출을 하게 돼요.
◇ 이현웅: 그래서 ‘동대문 홍길동’ 이런 별명도 붙은 건가요?
◆ 조한성: 네, 맞습니다.
◇ 이현웅: 근데 절대적인 숫자가 혼자 상대하기 좀 어려운 숫자 아니었을까요?
◆ 조한성: 그런데 이제 가장 유명한 게, 김상옥 의사는 쌍권총이 유명하거든요. 총을 막 두 대를 쏘면서, 그냥 몸이 굉장히 날랐던 것 같습니다. 총을 쏘면서 남산 쪽으로 도망을 갔고. 경찰들이 바로 추격을 했거든요. 그래서 왕십리까지 추격을 해가는데 왕십리에서 눈 위에 있는 발자국을 놓치게 돼요. 그래서 더 이상 찾지 못하고, 이 김상옥 의사는 절에 잠깐 숨어 있다가 그다음에 자기 동지가 있는 그 곳으로 도망을 가게 되죠.
◇ 이현웅: 앞서서 총 감사를 책임을 졌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성공했나요?
◆ 조한성: 이거는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실행해보지도 못하고 안타깝게도 실패를 하게 됩니다.
◇ 이현웅: 실패였군요. 근데 앞서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김상옥 의사가 했다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말씀도 해 주셨잖아요. 잠시 후에 말씀해 주시겠다고 했던 내용들 지금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 조한성: 이게 정설론은 김상옥 의사가 한 걸로 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이게 김상호 의사가 했을까라고 하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어요. 왜냐하면 당시에 ‘대암살 파괴 계획’이라고 하는 아주 큰 계획을 갖고 있었잖아요. 이런 계획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주 조심을 해야 되는 거잖아요. 조심하고 있다가 계획대로 여러 가지 실행을 해야 되는데, 아직 폭탄이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좋은 폭탄을 개발을 해놨는데. 그게 아직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고 그걸 받아서 파괴 계획을 하려고 했던 거거든요. 그런데 들어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지금 종로경찰서에서 터졌단 말이에요, 폭탄이. 그러니까 이거는 김상옥 의사가 하지 않은 게 아니 라고 하는 얘기가 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설이 있다는 거. 그리고 당시에 일본 경찰 쪽에서도 이게 범인이 사실 김상옥 의사라고 딱 찍고 수사를 했잖아요. 그리고 했는데 이분이 순국을 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런 증언을 못 들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 경찰 쪽에서도 계속 의심을 했어요. 범인이 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수사를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실제 범인을 찾으려고 그런 모습도 보이기 때문에 이런 설이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 이현웅: 영화 <밀정>의 배경이 되기도 했고요, 그다음에 앞서서 이제 1 대 1,000 얘기도 했는데, 그 긴박했던 순간들도 짧게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 조한성: 김상옥 의사가 도망을 갔다고 그랬잖아요. 남산을 거쳐서 도망을 갔는데. 겨울이었고 눈밭이었고 그다음에 신발도 제대로 없어서 동상을 입은 채로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총도 하나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총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나중에 그게 눈이 녹은 다음에 발견이 됐어요.
◇ 이현웅: 그 영화에서 나오는 동상 걸린 발가락 장면도 그때네요?
◆ 조한성: 네, 맞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상태로 도망을 가다가 어디로 갔냐면 효제동으로 도망갔습니다.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효제동 73번지에 있던 자기 동지한테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 댁에 숨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같이 독립운동 했던 다른 분, 전우진이라는 분이 경찰에 붙잡혀가지고 갖은 고문 끝에 그 은신처를 얘기를 해버려요. 그래가지고 그 은신처가 들통이 나고, 그래서 1924년 1월 22일 새벽 3시에 경기도 경찰부의 ‘우마노’라고 하는 경찰부장이 있어요. 그 사람이 주도가 돼가지고 서울에 있는 경찰들을 다 모아가지고 효제동으로 출동을 합니다. 그래서 다 완전 장악을 하고요, 그다음에 포위를 하고, 지붕 위에다가는 저격수까지 배치를 하고. 그리고는 4시간 있다가 새벽 7시에 작전을 개시를 합니다. 그래가지고 돌진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73번지 집으로 돌진을 하니까 김상옥 의사가 총을 쏘면서 저항을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옆집으로, 대각선에 있는 집으로 도망을 가요. 그래서 거기서 막 쏘는데. 그 대각선의 집에 또 안타깝게도 그 집 주인이 김상옥 의사가 들어오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자기도 연루될까 봐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바람에 소리가 커진 거예요. 그래서 들통이 나가서 또 경찰이 그쪽으로 오고. 그래서 그 번지에서 다시 옆집으로 또 도망을 가고. 그리고 그 옆집에서 또 화장 변소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변소에 숨어서 총을 쏘고. 그다음에 변소에서 안 되니까 다시 탈출해서 그 옆집으로 해서 72번지 집으로 마지막에 가게 되거든요. 거기서 격렬하게 싸우다가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순국하신 걸로 돼 있습니다.
◇ 이현웅: 듣기만 해도 영화 같은 그런 장면인데 이 긴박한 순간을 또 보고 들었을 거 아니에요. 우리 어진 학생은 어떤 생각하셨어요?
◐ 배어진: 저는 솔직히 진짜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 나오기 어렵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만약에 제가 거기 상황에 있었으면 전 그냥 먼저 도망갔을 것 같아요. 먼저 도망갔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저는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결국 아까 변소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셨는데, 이제 최후도 결국 변소에서 맞이하게 되시니까요.
◇ 이현웅: 그 장면인데요. 영화 <밀정> 속의 한 장면 잠깐 짧게 준비를 했습니다. 짧게 한번 듣고 와볼게요.
- 장옥이, 나 이정철이야. 우리 얘기 좀 하자. 지금 문 열 테니까 쏘지 마라 .
- 왜놈들은 나라 팔아먹고 너같은 놈은 동포 팔아먹고. 그래서 먹고 살 만하냐. 더러운 매국노들.
- 넌 이 나라가 독립이 될 것 같냐. 어차피 기울어진 배야.
- 그렇지. 기울어진 배에 쥐새끼들이 먼저 빠져나가지.
- 나가자. 나가면 살 수 있어. 목숨은 건사해야지.
- 사람이 쥐새끼와 함께할 순 없지. 대한독립만세.
◇ 이현웅: 영화 <밀정>의 한 장면 보고 왔고요. 지금 YTN 라디오 애청자분들은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에서도 김상옥 편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잘 알고 계십니다. 여기에 나온 이야기 후손의 증언 들어보면요, 돌아가신 후에도 눈을 번쩍 뜨고 손가락이 움직였다 시신이 벌집 같았다. 이런 얘기하시더라고요?
◆ 조한성: 실제 그 당시 자료에도요, 당시 신문 보도에도 끝까지 총을 쏘다가 돌아가신 걸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떤 책이나 그동안 계속 기정사실로는 자결하신 걸로 나오거든요. 이거는 당시에 독립운동가들의 최후가 자결한 것이 더 멋있어 보인다는 그런 어떤 것들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증언이 된 거고, 자료상으로는 이렇게 끝까지 총을 쏘시면서 순국하신 것으로 돼 있습니다.
◇ 이현웅: 독립운동가들 보통 기록을 남기지 않는데, 김상옥 의사의 사진은 한 장이 남아 있습니다. 보면 경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양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는데 뒷짐을 지고 있단 말이죠. 이 내용도 <100년의 소리> 관련해서 들어보신 분들 아시겠지만, “조국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부끄럽다”라고 하면서 두 손을 뒤로 숨긴 겁니다. 우리 어진 학생은 이런 청년 세대로서 정신이라고 할까요, 어떻게 바라보세요?
◐ 배어진: 김상옥 이사가 되게 많은 일을 하셨잖아요, 조국을 위해서.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셨던 걸 보면 그만큼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랑 사명감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지는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저도 사회에 대한 관심이 되게 많거든요. 또 저는 정치외교학과이기도 하고, 제가 또 생일이 6월 6일 현충일이라서 애국심도 꽤 높은 편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김상옥 의사 같은 불굴의 정신을 갖는 게 저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더 어려웠겠죠. 저도 나름 이제 여기저기 도전한다고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어떨 때는 이런 독립운동가분들의 정신을 본받고 싶다, 그런 용기를 좀 배우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끔 하는 것 같습니다.
◇ 이현웅: 늘 이렇게 얘기 듣다 보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많이 배울 점이 있는데. 결국 김상옥 의사가 승복을 하고 나서 남은 가족들의 삶을 걱정하는 그런 시선들도 있을 것 같아요. 남은 가족들의 삶은 어땠나요?
◆ 조한성: 가족들이 제대로 살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사건 직후에는 계속 수사에 불려다니고 고문당하고 이런 고생을 했고요. 그다음에 생계가 그러면 힘들어지잖아요. 그래서 영덕 철물점이라고 운영했던 김상옥 의사가 굉장히 잘 운영했던 곳이 4년 만에 폐업을 해야 할 정도로, 남의 손에 넘어갈 정도로 굉장히 곤란해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현웅: 저희가 준비된 시간이 이제 다 끝났는데요. 두 분께 10초 정도씩 오늘 이 코너에서 못 다했던 이야기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연구원님부터 부탁드릴까요?
◆ 조한성: 김상옥 의사는 자기가 이렇게 체포될 위기에, 사실은 체포돼도 되거든요. 체포돼도 되지만, 그 다음을 기약해도 되지만 아마 그 순간에 판단을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여기서 잡히나 아니면 지금 잡히지 않고 내가 저항을 하나, 이걸 선택해야 되는데 잡히지 않고 내가 여기서 저항해버림으로써 더 큰, 일제를 좀 뒤흔들겠다라고 하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요. 그런 선택이 아마도 지금까지 김상옥 의사를 역사적으로 이름이 남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 배어진: 우리가 김상옥 의사의 삶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김상옥 의사가 그의 삶을 통해서 현재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제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은 각박하지만 베어진 같은 사람이 있어서 좀 살 만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제 꿈인데요. 좀 이상적이긴 하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안 좋은 일들을 겪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 것들이 저를 각성하게 만들었던 게 좀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고정관념들이 있잖아요. 그런 고정관념들을 제가 해결하기 위해서 좀 노력을 많이 했는데, 김상옥 의사는 그런 어린 시절의 고난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보이셨던 것처럼 제가 김상옥 의사의 삶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여기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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