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고 해뜰날" 서민에게 희망 주고 고 송대관 영면

"쨍하고 해뜰날" 서민에게 희망 주고 고 송대관 영면

2025.02.09. 오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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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박석원 앵커
■ 출연 : 이종수 해설위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24]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트로트 4대 천왕, 고 송대관 씨가 오늘 오전에 발인하고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쨍하고 해뜰날이 돌아온다며 서민, 대중에게 희망을 주었던 고인의 별세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역경을 헤치고 희망을 선사하는 제 2의 해뜰날을 기대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이종수 해설위원과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팬들뿐 아니라 고인을 애도하는 국민이 많으실 것 같아요.

[기자]
그렇습니다. 그제였죠. 지난 7일 심장마비로 79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인을 기리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고요. 오전에는 가수협회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졌습니다. 고인은 1946년 '판소리의 고장' 전북 정읍에서 출생했고요. 1967년 21살에 가수로 데뷔했지만 8년 동안 무명가수 생활 끝에 1975년 해뜰날로 그야말로 쨍하고 스타가 됐고요.

그해 가수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후반에 귀국을 해서 1990년대 '네 박자'. '차표 한 장', 등등 해서 히트곡을 줄줄이 내면서 트로트 4대천왕으로 불리면서 트로트 전성시대를 이끌기도 했죠. 그리고 환갑이 지나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에 걸쳐서 대한가수협회장을 맡아서 가수들 권익 신장에 앞장서기도 했고 그리고 저와는 개인적으로 YTN 데일리 프로그램, 신율의 시사탕탕이라는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돼서 인연을 맺었는데 아주 정 많고 그리고 따뜻하고 재미있고 소탈한 분이셨습니다.

[앵커]
고인 송대관 씨는 대표곡 쨍하고 해뜰날도 그렇고 주로 가사들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가수로 발돋움하지 않았었습니까?

[기자]
그렇죠. 1975년에 스타가 됐을 때는 대마초 파동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부가 그쪽에 대해서 심의를 강화하고 당시에 스타였던 이장희 씨, 윤형주 씨, 조영필 씨 이런 분들이 구속되거나 출연이 정지가 됐어요. 그러면서 이분들이 몸담았던 포크와 그룹사운드 이쪽이 위촉이 되면서 트로트가 더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1975년도 최고 히트작이 해뜰날인데 그러려면 최고 히트작이 되려면 대중들한테 그만큼 호소력이 있었던 것일 테고요. 그 호소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 아마 그 당시의 시대상과도 상당히 맞물려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되고요. 그래서 제가 당시 사회상을 살펴봤는데 1973년 오일 쇼크, 석유파동이 있어서 그 여진으로 물가가 계속 올랐습니다.

그래서 서민들이 생활고를 겪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출 중심의 정책 그런 것에 힘입어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성장이 이루어졌고 그리고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이 됐습니다. 그래서 농촌에 있는 분들이 서울로 대거 이주를 한 것이죠. 그리고 정치사회적으로 보면 유신반대 운동이 거세졌고 그래서 그것에 상응하는 조치로 긴급조치 9호가 발령돼서 언론 표현의 자유가 제한됐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앵커]
어떻게 보면 도시화로 농촌을 떠나서 서울로 이주하는 분들도 그렇고 경제성장도 그렇고 쨍하고 해뜰날을 기대하는 서민들에게 굉장히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왔을 것 같아요.

[기자]
그렇죠. 박 앵커는 해뜰날 들어보셨습니까?

[앵커]
저는 많이 들어봤죠.

[기자]
굉장히 뭐라고 그럴까요? 위안도 주고 희망이 생기고 또 흥도 오르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가사를 보면 금세 알 수 있어요. 지금 해뜰날, 본인 노래가 들리고 있는데 보시면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어떠세요?

[앵커]
노래를 많이 듣기도 했고 어린시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따라부르기도 부르지 않았습니까?


[기자]
그렇죠. 그런데 1975년 1인당 국민소득이 700~800달러였더라고요. 지난해는 3만 6000달러가 넘었거든요. 그러니까 지난해와 비교해 보면 45분의 1, 50분의 1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됐는데 그래도 우리가 어려움을 이겨내면 잘살 수 있다, 이런 희망을 가졌었던 거죠. 그리고 제가 보기에 고인 송대관 선생 본인이 가난한 젊은 시절도 겪고 또 무명 시절도 겪고 이런 걸 다 이겨내면서 쨍하고 해뜰날을 맞이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생으로 해뜰날을 보여준 셈이라 할 수 있겠죠. 고인의 관련 발언 직접 들어보시겠습니다.

[앵커]
고 송대관 씨, 트로트 4대 천왕으로도 불렸죠?

[기자]
그렇죠. 제가 전문가는 아닙니다만트로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장르라고 합니다. 멜로디가 쉽고 반복이 되잖아요. 그리고 판소리처럼 꺾기 창법이 사용되기도 하고 가사도 지금 들어보셔서 알겠지만 인생사, 희망. 굉장히 서민한테 어필하는 거죠. 대중과 호흡을 하면서 사랑을 받아 왔는데 고인의 히트곡 네 박자, 유행가 이런 것들을 듣다 보면 이게 현철 씨 그다음에 설운도 씨, 태진아 씨. 이렇게 함께 트로트의 4대천왕으로 불리는 이유를 금세 알 수가 있습니다.

고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고 경쟁자라 할 수 있고 또 같이 공연을 했죠. 그래서 단짝이다, 실과 바늘이다, 이렇게 불렸던 태진아 씨가 고인을 추도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하기도 했는데요. 한번 관련 얘기를 들어보시도록 하죠.

[앵커]
고인이 가수로만 58년을 보냈다고 하는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면에는 역경도 있고 힘든 과정들도 있었겠죠?

[기자]
2013년에 아내가 부동산 투자를 했는데 그게 실패를 하면서 빚더미에 올랐고요. 또 사기 사건에 휘말리면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습니다. 본인이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자신의 빚이, 그러니까 가족의 빚이죠. 280억 원까지 간 적이 있었다, 이렇게 얘기한 적도 있고요. 그래서 이를 앞기 위해서 월세살이도 하고 그리고 70대인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행사 5건을 소화해야 하는 그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년 전 담도암 판정을 받고 퇴원도 하고 입원도 하고 이런 게 반복이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를 놓을 수 없었던 거죠. 가요계의 맏형으로서 책임감이 강한 분이셨는데 앞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환갑이 지나서 2008년부터 3년 동안 가수협회장을 지냈고요. 이 기간이 2009년인데 일본의 노래방이 한국가요를 무단으로 사용했었다.

이게 문제다 그래서 일본 현지 법원에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제기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희노애락을 겪은, 그러면서 쨍하고 해뜰날을 만든 고인 아니겠습니까? 이런 고인의 영면을 지켜보면서 많은 분들이, 지금 우리도 시대가 쉽지 않잖아요. 분열도 되어 있고 저성장 늪에 빠지지 않을까 이런 우려도 있고 트럼프 2기의 압박도 있고 이런 걸 다 헤쳐나가서 그래도 우리도 해뜰날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기대를 갖는 분들이 많지 않겠나 싶습니다.

[앵커]
어떻게 보면 고 송대관 씨의 마지막 메시지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지금까지 이종수 해설위원과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이종수 (jslee@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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