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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유다원 앵커, 김명근 앵커
■ 출연 : 김승환 문화산업부 기자, 방종우 신부 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와이드]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전해 드린 것처럼 세계가톨릭의 상징이자 온화한 미소로 가난한 이들의 친구를 자처했던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습니다. 교황청은 폐렴과 기관지염 등으로투병해오던 교황이 세상을 떴다고공식 발표했습니다. 문화부 김승환 기자 그리고 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인방종우 신부와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해 드린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지 시각으로 21일에 선종했습니다. 사실 건강상태에 대한 우려도 있었는데 회복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신부님을 포함해서 많은 국내에 있는 신자들도 애도의 뜻을 밝히고 있는데 어떤가요?
[방종우]
저희 교회에서는 일단 2월 14일에 교황님께서 건강이 악화되셔서 조금 긴 시간 동안 입원하셨는데 저희가 미사 때도 계속해서 교황님의 건강을 위한 기도도 많이 드렸고 그래도 조금 퇴원하셔서 회복하시나 했고 또 이번에 부활절 맞이해서 교황님께서 모습도 보여주시고 하셔서 괜찮아지셨나 싶었는데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앵커]
교황이 폐렴증세로 치료를 받고 퇴원해서 괜찮으신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아프셨던 건가요?
[기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계속 건강이 좀 안 좋으셨는데 지난 2월에 기관지염 증세를 보이셨고요. 그래서 강론 도중에 호흡곤란 증세가 있어서 중단하기도 하셨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미루다가 로마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리고 폐렴진단을 받았고요. 37일 동안 입원했다가 퇴원하셨죠. 그리고 활동을 재개했고 현지시간 21일 오전 7시 35분에 선종하셨고요. 저희가 교황청 발표내용도 준비했는데 직접 한번 들어보시죠.
[케빈 페럴 / 교황청 궁무처장]"오늘 아침 7시 35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교황은 삶의 전체를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데 헌신했습니다.]
[앵커]
보신 것처럼 교황청에서도 밝혔는데 사실 신부님께서 앞서 이야기해 주신 것처럼 잠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공개일정을 수행하기도 했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회복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는데 마지막 고비는 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2013년에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었잖아요. 이게 역사상 첫 남미 출신 교황인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건가요?
[방종우]
원래 교회 긴 역사상 교황님은 계속해서 계셨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66대였는데 그 역사상 이제 아프리카와 유럽을 제외한 교황으로서는 처음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아프리카 출신 교황님도 계셨지만 아주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고 아무래도 가톨릭교회가 유럽 교회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보편교회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데 있어서 소홀히 했던 부분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 준 특별히 의미 있는 교황님인 것 같습니다.
[앵커]
그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교황님으로 선출되기까지 어떤 활동을 하셨을까요?
[방종우]
일단 특별한 점으로는 예수회, 수도회 소속이었다는 점이 있고요. 그 이후에는 잠시 교수로서도 활동하시고 또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로 임명되셨고 그리고 2013년도에 교황으로 선출되셨습니다.
[앵커]
잠시 후에 활동도 짚어볼 텐데. 일단은 교황이 퇴원한 뒤에 활동을 재개했기 때문에 건강이 호전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더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 같아요.
[기자]
당시에도 교황께서 퇴원하실 때 의료진에서 조건을 걸었다고 합니다. 두 달간 휴식을 취해야 되고 재활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을 걸었었고요. 그래서 교황청에서도 앞으로 약물을 더 많이 복용하고 여러 치료를 병행할 거라고 했지만 또 이렇게 선종하셨고요. 또 신자분들께서 아까 신부님도 말씀하셨지만 부활절을 앞두고 신자분들을 많이 만났고요. 그다음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미국 부통령도 면담하는 것처럼 굉장히 활발히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종 소식이 더욱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앵커]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면 교황 이름을 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인의 이름 중에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했고 이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서 많이 활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많이 위안을 받고 이렇게 교황을 보면서 다양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교황으로 재임하면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실까요?
[방종우]
일단 교황의 이름을 선정할 때 성인의 이름을 저희가 따오고 그리고 혹은 전임 교황님의 이름을 이어서 그래서 2세, 3세, 16세, 17세 이런 호칭을 받게 되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따온 교황으로서는 처음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표현하자면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특별히 가난한 이를 섬기고 또 겸손하게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본받고자 했던 분이고 이제 워낙에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황으로 재임 시작하시자마자 람페두사라고 시칠리아에 있는 난민촌을 가장 먼저 방문하기도 하셨고 우리나라에 오셔서도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소외된 이들을 많이 돌봐주셨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희망과 위로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앵커]
소외된 이들, 사회적 약자에 포용적인 태도가 인상 깊었던 것 같은데 사실 또 진보적이면서 개방적인 교황으로 평가를 받고 있잖아요. 이전에 동성커플에 대한 가톨릭 사제 축복을 허용하는 모습도 보였고요. 이 부분도 색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방종우]
교회 가르침을 바꾸시거나 변화하지는 않으셨어요, 교황님이. 하지만 원칙적인 교회 가르침들은 그대로 고수하시되 실천적인 측면에서 특별히 배려하시는 모습을 많이 보이셨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정식으로 미사 전례라든지 혼인성사라든지 이러한 것들을 개방하시기보다는 사제들이 그들의 아픔을 더 잘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들어줘야 된다는 견지에서 여러 가지 진보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는 어긋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앵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서 가자전쟁 등에서도 평화적 해결과 난민 구제를 위해서도 바쁘게 움직이셨다고요?
[방종우]
교황님이 특별히 전쟁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아프리카 분쟁지역에 있는 지도자들을 초대하셔서 직접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전쟁을 멈춰달라 부탁하기도 하셨고 그밖에도 그리고 미얀마 같은 경우에도 여러 가지 피해자들을 위로하고자 직접 방문하기도 하셨고 그리고 2021년에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이라크를 방문하기도 하셨고 여러 가지 전쟁과 관련해서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많은 호소를 해 오셨습니다.
[앵커]
이뿐만 아니라 교황께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도 불러일으켰던 것 같은데 이건 어떤 내용이었던 건가요?
[방종우]
일단은 기후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고 경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 안에서 여러 가지 경제로 인해서 경제 중심적인 이 세상 안에서 일으키게 되는 부작용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러다 보니까 이제 환경에 대해서도 크게 말씀하시게 되셨고 특별히 공동의 집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셨는데 우리의 지구는 지금 살고 있는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특별히 가장 유명한 말씀은 가난한 이들이 고통받고 가난한 이들이 굶어죽는 것는 뉴스가 되지 않지만 주식이 하락하는 건 뉴스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의 단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냐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점에 있어서 인간의 여러 가지 근원적인 고통 특별히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많이 활동하신 교황님이셨습니다.
[앵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으시잖아요. 2014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때 당시 의전 차량이 방탄차량이 아닌 소울 차량 그러니까 작은 국산 차량을 이용해서 더 화제가 됐었는데. 교황님과 우리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가톨릭 신부님으로서 설명을 해 주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방종우] 교황님께서는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굉장히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고 또 한국에 오셔서도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위로의 메시지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와 굉장히 친밀한 관계이기도 했고 또 2027년에 WYD라는 청년대회를 서울로 선정하시면서 만약에 살아계셨다면 저희는 27년에 다시 한 번 교황님을 초대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세상을 떠나서 아마 다음 교황님이 오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앵커]
생전 교황은 간소한 장례절차를 강조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을 했고 앞으로 장례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기자]
오늘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직 확정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마는 다만 교황께서 생전에 하셨던 말을 미뤄보면 알 수 있는데 생전에 품위는 지키되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소박하게 치르고 싶다. 지금 저희가 그래픽을 보여드리고 있는데 자서전에 있는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교황의 장례 예식이 너무 성대해서 담당자와 상의해서 간소화할 거다. 그래서 화려한 장례 제대도, 관을 닫는 특별한 의식도 없애기로 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요. 또 멕시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보통 전임 교황들은 선종할 경우에는 성베드로대성전에 모셔지는데 본인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묻히길 원한다. 그리고 나는 간소화된 장례절차를 처음 선보일 거다.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뜻에 따라서 장례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앵커]
지금 말씀해 주신 대로 소박하게 치르고 싶다는 건데 이런 모습이 평소에도 많이 나타났던 것 같은 게 교황이 관저가 아니고 일반 사제들이 묵는 공동숙소였던 산타마르타집에서 생활을 하면서 이런 삶을 계속해서 이어갔다라고 하더라고요.
[방종우]
여러 가지 복장에 관련해서도 교황님들이 평소에 신으셨던 붉은 구두라든지 그리고 보통 교황님이 새로 선출되시면 십자가나 이런 것들도 바꾸기도 하고 이렇게 하셨었는데 교황님께서는 대주교 시절부터 사용하시던 걸 그대로 사용하시고 숙소도 일반사제들이 묶는 숙소에서 함께 묵기도 하시고. 또 산타마리아마조레 묻히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교황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사랑하는 성화가 그곳에 있어서 항상 외국을 방문하시면 그곳으로 가서 기도도 많이 하셨는데 아마 그러한 의미에서 또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을 원하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앵커]
국내에서도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 추모 미사관련해서 계획이 나온 게 있습니까?
[기자]
제가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 천주교 쪽에 물어봤는데 아직 추모 미사를 언제 할지, 또 분향소가 언제 꾸려질지 아직 결정 안 됐다고 합니다. 다만 베네딕토 16세 때 경우를 보면 명동성당에 분향소를 마련해서 일반시민들도 애도의 뜻을 표할 수 있게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당시 이용훈 주교의 주례로 대성당에서 추모 미사가 봉헌됐었고요. 그래서 또 조금 전에는 정순택 대주교 명의로 애도 메시지도 나왔습니다. 정 대주교는 평생 복음과 사랑을 실천하신 교황께서 이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렇게 말했고요. 또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 이런 메시지를 내놨습니다.
[앵커]
사실 앞서 신부님께서도 잠시 이야기해 주셨지만 우리나라에 지난 2014년에 방문을 했기도 했고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잖아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자] 11년 전이지만 저도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게 원래 우리가 광화문광장에서 월드컵 때 굉장히 사람이 많이 모였는데 그때보다도 더 많은 100만 명이 모여서 교황님을 뵈려고 갔었고요. 또 굉장히 4박 5일 동안 빠듯한 일정이었는데 장애인이라든지 아니면 위안부 할머니들을 뵈면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을 만났고 또 최근에는 제주항공 참사같이 큰 대형 참사마다 희망의 메시지를 냈었고요. 또 제가 기억이 남는 건 2027년 전세계 가톨릭 청소년들의 가장 큰 축제가 서울에서 열립니다. 세계청년대회인데 이 행사를 서울에서 하기로 결정한 것도 교황이시거든요. 그래서 이 행사를 이제 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두 번째로 개최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지금 굉장히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 또 선종하게 돼서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앵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에 교황이 되셨을 때 그때 연세가 이미 76세로 고령이셨더라고요. 그런데 교황이 격무를 할 수 있을까 그런 우려가 평소에도 있었나요?
[기자]
그렇죠. 아무래도 나이가 많으셨기 때문에 그런 우려가 있었는데 그런데 지난해 9월 때만 봐도 열흘 동안 3만 킬로 넘게 이동하셨거든요. 그때 아시아, 오세아니아 4개 나라를 방문하면서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고 저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21년 가톨릭 2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이라크 땅을 밟았던 그런 전례가 있습니다. 당시에 극단주의 테러조직의 폭력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북부 도시들을 찾아서 희생자들을 위로했었는데 굉장히 활발하게 사역활동을 하셨습니다.
[앵커]
평화의 메시지를 보낸 종교 지도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인사 개혁에도 적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일단은 우리나라에서도 대전교구의 유흥식 추기경이 이런 인사개혁의 하나로 발탁되지 않았습니까?
[방종우]
일단 적극적으로 유럽 중심의 교회가 아닌 보편교회. 특별히 아시아 지역이라든지 아프리카 지역의 인원들도 많이 중용하기도 하셨고 그밖에도 몽골이라든지 아주 작은 교구의 추기경 발표를 하기도 하시고. 또 사제단이나 추기경단 외에도 장관이라든지 이런 자리에 수녀님들이라든지 아니면 여성들을 함께 많이 활동할 수 있도록 그러한 정신을 실제로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앵커]
이제 차기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 진행과 관련해서 여쭤볼 텐데. 콘클라베는 어떤 분들이 참석하는 거고 또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방종우]
일단 우리 기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정확한 일정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보통은 교황님이 선종하시면 사흘에서 6일간 장례를 하도록 돼 있습니다. 물론 간소화에 대해서 말씀하셔서 어떤 일정이 잡힐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이후에 9일 동안 애도하는 기간을 갖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통상 한 15일 이후에 콘클라베가 시작되는데 80세 미만의 현직 추기경단이 모여서 함께 선거를 하게 되고 그 선거결과에 따라서 차기 교황이 선출되게 됩니다.
[앵커]
그런데 이게 콘클라베라는 게 뜻이 뭔가요?
[방종우]
콘클라베가 꿈 클라비스라고 해서 직역하자면 열쇠와 함께인데. 이제 교황님을 선출하고 있는 공간, 그 공간이 열쇠로 잠겨져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한 라틴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앵커]
그럼 만 80세 미만의 추기경들이 참석한다고 하면 한국인 추기경이 두 분이 계시잖아요. 염수정 추기경과 유흥식 추기경이 계시는데 두 분이 다 참석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방종우]
아니요, 염 추기경님께서는 은퇴를 하신, 80세 이후의 추기경님이시기 때문에 투표권이 없으시고요. 유흥식 추기경님 같은 경우에는 현직 장관으로 계시기도 하시고 나이도 되시기 때문에 이제 교황 선출권이 있으신 것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앵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오늘 많은 분들이 뉴스를 보시면서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일생을 정리해 주실까요.
[기자]
교황께서는 21살 되던 해에 심한 폐렴에 걸려서 폐의 일부를 잘라내고 겨우 목숨을 건졌고요. 이후에 예수회에 입회해서 성직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앞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2013년에 남미 출신 최초의 교황으로 직위를 했고요. 그래서 가톨릭교회 2000년 역사상 처음이었고 또 1282년 만에 비유럽권 교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내부개혁에 힘을 쏟았고 또 재임 기간 난민이나 빈민, 여성과 아동 같이 약자의 삶에 굉장히 큰 관심을 쏟으셨고요. 또 우크라이나전쟁이나 가자지구같이 비극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고 또 허름한 구두 아니면 순금 십자가 대신에 철제 십자가를 가슴에 건 이런 모습처럼 굉장히 서민적인 모습으로 많은 신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앵커]
이런 모습들이 많은 신부님과 신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은데요.
[방종우]
항상 교황님께서 저희에게 강조하셨던 것은 양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셔서 그리고 앞서 말씀하셨듯이 방탄차량이나 이런 걸 사용하지 않고 신자분들과 항상 가까이 접촉하시기 위해 노력하셨기 때문에 저희도 이제 겸손한 교회 안에서의 역할이라든지 아니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라든지 이런 것들을 더 많이 다짐할 수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두 분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문화부 김승환 기자, 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교수 방종우 신부와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김승환 (ksh@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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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 김승환 문화산업부 기자, 방종우 신부 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와이드]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전해 드린 것처럼 세계가톨릭의 상징이자 온화한 미소로 가난한 이들의 친구를 자처했던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습니다. 교황청은 폐렴과 기관지염 등으로투병해오던 교황이 세상을 떴다고공식 발표했습니다. 문화부 김승환 기자 그리고 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인방종우 신부와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해 드린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지 시각으로 21일에 선종했습니다. 사실 건강상태에 대한 우려도 있었는데 회복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신부님을 포함해서 많은 국내에 있는 신자들도 애도의 뜻을 밝히고 있는데 어떤가요?
[방종우]
저희 교회에서는 일단 2월 14일에 교황님께서 건강이 악화되셔서 조금 긴 시간 동안 입원하셨는데 저희가 미사 때도 계속해서 교황님의 건강을 위한 기도도 많이 드렸고 그래도 조금 퇴원하셔서 회복하시나 했고 또 이번에 부활절 맞이해서 교황님께서 모습도 보여주시고 하셔서 괜찮아지셨나 싶었는데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앵커]
교황이 폐렴증세로 치료를 받고 퇴원해서 괜찮으신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아프셨던 건가요?
[기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계속 건강이 좀 안 좋으셨는데 지난 2월에 기관지염 증세를 보이셨고요. 그래서 강론 도중에 호흡곤란 증세가 있어서 중단하기도 하셨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미루다가 로마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리고 폐렴진단을 받았고요. 37일 동안 입원했다가 퇴원하셨죠. 그리고 활동을 재개했고 현지시간 21일 오전 7시 35분에 선종하셨고요. 저희가 교황청 발표내용도 준비했는데 직접 한번 들어보시죠.
[케빈 페럴 / 교황청 궁무처장]"오늘 아침 7시 35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교황은 삶의 전체를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데 헌신했습니다.]
[앵커]
보신 것처럼 교황청에서도 밝혔는데 사실 신부님께서 앞서 이야기해 주신 것처럼 잠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공개일정을 수행하기도 했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회복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는데 마지막 고비는 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2013년에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었잖아요. 이게 역사상 첫 남미 출신 교황인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건가요?
[방종우]
원래 교회 긴 역사상 교황님은 계속해서 계셨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66대였는데 그 역사상 이제 아프리카와 유럽을 제외한 교황으로서는 처음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아프리카 출신 교황님도 계셨지만 아주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고 아무래도 가톨릭교회가 유럽 교회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보편교회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데 있어서 소홀히 했던 부분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 준 특별히 의미 있는 교황님인 것 같습니다.
[앵커]
그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교황님으로 선출되기까지 어떤 활동을 하셨을까요?
[방종우]
일단 특별한 점으로는 예수회, 수도회 소속이었다는 점이 있고요. 그 이후에는 잠시 교수로서도 활동하시고 또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로 임명되셨고 그리고 2013년도에 교황으로 선출되셨습니다.
[앵커]
잠시 후에 활동도 짚어볼 텐데. 일단은 교황이 퇴원한 뒤에 활동을 재개했기 때문에 건강이 호전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더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 같아요.
[기자]
당시에도 교황께서 퇴원하실 때 의료진에서 조건을 걸었다고 합니다. 두 달간 휴식을 취해야 되고 재활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을 걸었었고요. 그래서 교황청에서도 앞으로 약물을 더 많이 복용하고 여러 치료를 병행할 거라고 했지만 또 이렇게 선종하셨고요. 또 신자분들께서 아까 신부님도 말씀하셨지만 부활절을 앞두고 신자분들을 많이 만났고요. 그다음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미국 부통령도 면담하는 것처럼 굉장히 활발히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종 소식이 더욱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앵커]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면 교황 이름을 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인의 이름 중에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했고 이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서 많이 활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많이 위안을 받고 이렇게 교황을 보면서 다양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교황으로 재임하면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실까요?
[방종우]
일단 교황의 이름을 선정할 때 성인의 이름을 저희가 따오고 그리고 혹은 전임 교황님의 이름을 이어서 그래서 2세, 3세, 16세, 17세 이런 호칭을 받게 되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따온 교황으로서는 처음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표현하자면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특별히 가난한 이를 섬기고 또 겸손하게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본받고자 했던 분이고 이제 워낙에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황으로 재임 시작하시자마자 람페두사라고 시칠리아에 있는 난민촌을 가장 먼저 방문하기도 하셨고 우리나라에 오셔서도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소외된 이들을 많이 돌봐주셨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희망과 위로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앵커]
소외된 이들, 사회적 약자에 포용적인 태도가 인상 깊었던 것 같은데 사실 또 진보적이면서 개방적인 교황으로 평가를 받고 있잖아요. 이전에 동성커플에 대한 가톨릭 사제 축복을 허용하는 모습도 보였고요. 이 부분도 색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방종우]
교회 가르침을 바꾸시거나 변화하지는 않으셨어요, 교황님이. 하지만 원칙적인 교회 가르침들은 그대로 고수하시되 실천적인 측면에서 특별히 배려하시는 모습을 많이 보이셨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정식으로 미사 전례라든지 혼인성사라든지 이러한 것들을 개방하시기보다는 사제들이 그들의 아픔을 더 잘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들어줘야 된다는 견지에서 여러 가지 진보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는 어긋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앵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서 가자전쟁 등에서도 평화적 해결과 난민 구제를 위해서도 바쁘게 움직이셨다고요?
[방종우]
교황님이 특별히 전쟁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아프리카 분쟁지역에 있는 지도자들을 초대하셔서 직접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전쟁을 멈춰달라 부탁하기도 하셨고 그밖에도 그리고 미얀마 같은 경우에도 여러 가지 피해자들을 위로하고자 직접 방문하기도 하셨고 그리고 2021년에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이라크를 방문하기도 하셨고 여러 가지 전쟁과 관련해서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많은 호소를 해 오셨습니다.
[앵커]
이뿐만 아니라 교황께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도 불러일으켰던 것 같은데 이건 어떤 내용이었던 건가요?
[방종우]
일단은 기후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고 경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 안에서 여러 가지 경제로 인해서 경제 중심적인 이 세상 안에서 일으키게 되는 부작용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러다 보니까 이제 환경에 대해서도 크게 말씀하시게 되셨고 특별히 공동의 집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셨는데 우리의 지구는 지금 살고 있는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특별히 가장 유명한 말씀은 가난한 이들이 고통받고 가난한 이들이 굶어죽는 것는 뉴스가 되지 않지만 주식이 하락하는 건 뉴스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의 단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냐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점에 있어서 인간의 여러 가지 근원적인 고통 특별히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많이 활동하신 교황님이셨습니다.
[앵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으시잖아요. 2014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때 당시 의전 차량이 방탄차량이 아닌 소울 차량 그러니까 작은 국산 차량을 이용해서 더 화제가 됐었는데. 교황님과 우리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가톨릭 신부님으로서 설명을 해 주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방종우] 교황님께서는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굉장히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고 또 한국에 오셔서도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위로의 메시지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와 굉장히 친밀한 관계이기도 했고 또 2027년에 WYD라는 청년대회를 서울로 선정하시면서 만약에 살아계셨다면 저희는 27년에 다시 한 번 교황님을 초대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세상을 떠나서 아마 다음 교황님이 오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앵커]
생전 교황은 간소한 장례절차를 강조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을 했고 앞으로 장례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기자]
오늘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직 확정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마는 다만 교황께서 생전에 하셨던 말을 미뤄보면 알 수 있는데 생전에 품위는 지키되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소박하게 치르고 싶다. 지금 저희가 그래픽을 보여드리고 있는데 자서전에 있는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교황의 장례 예식이 너무 성대해서 담당자와 상의해서 간소화할 거다. 그래서 화려한 장례 제대도, 관을 닫는 특별한 의식도 없애기로 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요. 또 멕시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보통 전임 교황들은 선종할 경우에는 성베드로대성전에 모셔지는데 본인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묻히길 원한다. 그리고 나는 간소화된 장례절차를 처음 선보일 거다.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뜻에 따라서 장례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앵커]
지금 말씀해 주신 대로 소박하게 치르고 싶다는 건데 이런 모습이 평소에도 많이 나타났던 것 같은 게 교황이 관저가 아니고 일반 사제들이 묵는 공동숙소였던 산타마르타집에서 생활을 하면서 이런 삶을 계속해서 이어갔다라고 하더라고요.
[방종우]
여러 가지 복장에 관련해서도 교황님들이 평소에 신으셨던 붉은 구두라든지 그리고 보통 교황님이 새로 선출되시면 십자가나 이런 것들도 바꾸기도 하고 이렇게 하셨었는데 교황님께서는 대주교 시절부터 사용하시던 걸 그대로 사용하시고 숙소도 일반사제들이 묶는 숙소에서 함께 묵기도 하시고. 또 산타마리아마조레 묻히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교황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사랑하는 성화가 그곳에 있어서 항상 외국을 방문하시면 그곳으로 가서 기도도 많이 하셨는데 아마 그러한 의미에서 또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을 원하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앵커]
국내에서도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 추모 미사관련해서 계획이 나온 게 있습니까?
[기자]
제가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 천주교 쪽에 물어봤는데 아직 추모 미사를 언제 할지, 또 분향소가 언제 꾸려질지 아직 결정 안 됐다고 합니다. 다만 베네딕토 16세 때 경우를 보면 명동성당에 분향소를 마련해서 일반시민들도 애도의 뜻을 표할 수 있게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당시 이용훈 주교의 주례로 대성당에서 추모 미사가 봉헌됐었고요. 그래서 또 조금 전에는 정순택 대주교 명의로 애도 메시지도 나왔습니다. 정 대주교는 평생 복음과 사랑을 실천하신 교황께서 이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렇게 말했고요. 또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 이런 메시지를 내놨습니다.
[앵커]
사실 앞서 신부님께서도 잠시 이야기해 주셨지만 우리나라에 지난 2014년에 방문을 했기도 했고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잖아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자] 11년 전이지만 저도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게 원래 우리가 광화문광장에서 월드컵 때 굉장히 사람이 많이 모였는데 그때보다도 더 많은 100만 명이 모여서 교황님을 뵈려고 갔었고요. 또 굉장히 4박 5일 동안 빠듯한 일정이었는데 장애인이라든지 아니면 위안부 할머니들을 뵈면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을 만났고 또 최근에는 제주항공 참사같이 큰 대형 참사마다 희망의 메시지를 냈었고요. 또 제가 기억이 남는 건 2027년 전세계 가톨릭 청소년들의 가장 큰 축제가 서울에서 열립니다. 세계청년대회인데 이 행사를 서울에서 하기로 결정한 것도 교황이시거든요. 그래서 이 행사를 이제 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두 번째로 개최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지금 굉장히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 또 선종하게 돼서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앵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에 교황이 되셨을 때 그때 연세가 이미 76세로 고령이셨더라고요. 그런데 교황이 격무를 할 수 있을까 그런 우려가 평소에도 있었나요?
[기자]
그렇죠. 아무래도 나이가 많으셨기 때문에 그런 우려가 있었는데 그런데 지난해 9월 때만 봐도 열흘 동안 3만 킬로 넘게 이동하셨거든요. 그때 아시아, 오세아니아 4개 나라를 방문하면서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고 저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21년 가톨릭 2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이라크 땅을 밟았던 그런 전례가 있습니다. 당시에 극단주의 테러조직의 폭력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북부 도시들을 찾아서 희생자들을 위로했었는데 굉장히 활발하게 사역활동을 하셨습니다.
[앵커]
평화의 메시지를 보낸 종교 지도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인사 개혁에도 적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일단은 우리나라에서도 대전교구의 유흥식 추기경이 이런 인사개혁의 하나로 발탁되지 않았습니까?
[방종우]
일단 적극적으로 유럽 중심의 교회가 아닌 보편교회. 특별히 아시아 지역이라든지 아프리카 지역의 인원들도 많이 중용하기도 하셨고 그밖에도 몽골이라든지 아주 작은 교구의 추기경 발표를 하기도 하시고. 또 사제단이나 추기경단 외에도 장관이라든지 이런 자리에 수녀님들이라든지 아니면 여성들을 함께 많이 활동할 수 있도록 그러한 정신을 실제로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앵커]
이제 차기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 진행과 관련해서 여쭤볼 텐데. 콘클라베는 어떤 분들이 참석하는 거고 또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방종우]
일단 우리 기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정확한 일정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보통은 교황님이 선종하시면 사흘에서 6일간 장례를 하도록 돼 있습니다. 물론 간소화에 대해서 말씀하셔서 어떤 일정이 잡힐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이후에 9일 동안 애도하는 기간을 갖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통상 한 15일 이후에 콘클라베가 시작되는데 80세 미만의 현직 추기경단이 모여서 함께 선거를 하게 되고 그 선거결과에 따라서 차기 교황이 선출되게 됩니다.
[앵커]
그런데 이게 콘클라베라는 게 뜻이 뭔가요?
[방종우]
콘클라베가 꿈 클라비스라고 해서 직역하자면 열쇠와 함께인데. 이제 교황님을 선출하고 있는 공간, 그 공간이 열쇠로 잠겨져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한 라틴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앵커]
그럼 만 80세 미만의 추기경들이 참석한다고 하면 한국인 추기경이 두 분이 계시잖아요. 염수정 추기경과 유흥식 추기경이 계시는데 두 분이 다 참석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방종우]
아니요, 염 추기경님께서는 은퇴를 하신, 80세 이후의 추기경님이시기 때문에 투표권이 없으시고요. 유흥식 추기경님 같은 경우에는 현직 장관으로 계시기도 하시고 나이도 되시기 때문에 이제 교황 선출권이 있으신 것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앵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오늘 많은 분들이 뉴스를 보시면서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일생을 정리해 주실까요.
[기자]
교황께서는 21살 되던 해에 심한 폐렴에 걸려서 폐의 일부를 잘라내고 겨우 목숨을 건졌고요. 이후에 예수회에 입회해서 성직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앞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2013년에 남미 출신 최초의 교황으로 직위를 했고요. 그래서 가톨릭교회 2000년 역사상 처음이었고 또 1282년 만에 비유럽권 교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내부개혁에 힘을 쏟았고 또 재임 기간 난민이나 빈민, 여성과 아동 같이 약자의 삶에 굉장히 큰 관심을 쏟으셨고요. 또 우크라이나전쟁이나 가자지구같이 비극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고 또 허름한 구두 아니면 순금 십자가 대신에 철제 십자가를 가슴에 건 이런 모습처럼 굉장히 서민적인 모습으로 많은 신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앵커]
이런 모습들이 많은 신부님과 신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은데요.
[방종우]
항상 교황님께서 저희에게 강조하셨던 것은 양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셔서 그리고 앞서 말씀하셨듯이 방탄차량이나 이런 걸 사용하지 않고 신자분들과 항상 가까이 접촉하시기 위해 노력하셨기 때문에 저희도 이제 겸손한 교회 안에서의 역할이라든지 아니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라든지 이런 것들을 더 많이 다짐할 수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두 분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문화부 김승환 기자, 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교수 방종우 신부와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김승환 (ksh@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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