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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맘때 늦여름이 생각납니다. 하필 뉴욕의 아서 애쉬 스타디움 표만 매진돼 매표소 부근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저희 부부. 마침 대회 관계자가 나타났습니다. "루이 암스트롱 경기장 표를 가진 것 같은데, 지금 대회 운용상 필요하니, 혹시 센터코트 표를 원하면 바꿔 주겠다”고요. “설마 미국에도 암표상이?” 잠시 주저했지만, 이 양반 목에 건 ID카드를 확인하고 잽싸게 바꿨습니다. 이런 게 구세주겠죠?
수용 인원 2만 3천 명 세계 최대 테니스 경기장 맨 꼭대기 20달러 짜리 좌석. 현기증까지 날 정도로 아찔한 급경사였지만 저희 부부는 흥분했습니다. ’달인‘ ’명장‘이라는 별명의 이 선수가 2회전 세계 99위 복병 줌후르에게 첫 세트를 내준 뒤 불과 2시간 22분 만에 3대 1 역전승을 이끌어냈기 때문이죠. 4세트 경기인데 140분 가량이니, 세트 평균 35분 정도. 우리 나이 거의 마흔, 움직임은 전성기만 못했지만, 전광석화 같은 플레이, 원샷원킬 스트로크는 ’GOAT’의 품격을 느끼기 손색이 없었습니다. ‘테알못’이나 다름없었던 아내(지금은 아님!)도 “마치 탁구를 치는 것 같다”고 감탄했던 선수, 바로 영원한 황제 로저 페더러입니다.
다소 장황하게 3년 전 직관 얘기를 꺼낸 것은 페더러의 은퇴가 벼락같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여자 최강 세레나 윌리엄스가 눈물 속에 마무리한 US오픈. 그 순간 동갑내기 수퍼스타 페더러의 근황이 궁금했던 사람은 저뿐이 아니었을 겁니다. 지난해 윔블던 8강 탈락 이후 와신상담, 무릎부상 회복에만 주력했던 페더러. 복귀 무대가 이달 레이버컵 대회로 확정된 상황에서 돌연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팬들과의 소통 도구 SNS를 통해서 말이죠. 이별의 문구 또한 얼마나 우아하고 겸손하던지요.
최초 메이저 20승, 231주 연속 세계 1위. 기록을 따지면 한이 없겠지만, 압도적인 실력 외에도 19년 연속 팬 투표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우아하기까지 한 테니스 스타일과 환상적인 경기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인종,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코트의 신사. 마치 검객의 발도술을 보듯 유려한 포핸드. 코스 예측 불허에다, 엄청난 사이드 스핀과 톱스핀으로 리시버를 춤 추게 만들었던 간결하고도 강력한 서브. 아련한 향수마저 불러일으키는 원핸드 백핸드는 말 그대로 예술의 경지였습니다. 서구에서 페더러를 'Maestro'(거장)라 칭송하는 것도 한때 거친 체력 싸움으로 점철됐던 테니스를 또 다른 레벨로 끌어올렸기 때문인 듯 합니다. 오죽하면 외신 은퇴 기사는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Retiring Roger Federer was the most beautiful tennis player I ever saw, and more.."
'코시국' 기간 격리 연습 때 틈틈이 근황을 전했던 페더러. 다른 종목 어떤 선수들보다 여성 팬들이 많았던 것은 유달리 가정적인 면모 덕분이 커 보입니다. 쌍둥이들 목욕을 시키다 무릎을 다쳤다는 일화는 또 어떻습니까? 반면 라이벌들, 특히 압도적인 천적 관계를 이루며 좌절했던 전 세계 1위 앤디 로딕이나, '빅4'에 가까스로 뽑히긴 했지만 이른바 '쟁반 그랜드슬램'을 불명예를 안은 앤디 머리 등에게 페더러는 악몽이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페더러 전성기에 맞붙게 된 동시대 선수들의 중압감은 지난해 출시된 미국 넘버2 마디 피시의 다큐 'Breaking point'에 생생히 드러납니다.
골프에 타이거 우즈가, 농구에 마이클 조던이 있었다면 지난 20여년 간 테니스를 대표한 간판은 페더러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한 분야의 틀을 완전히 바꿔놓은 이른바 '게임 체인저'. 무릎 부상 후유증으로 쉬는 동안에도 연수입 1천억 원을 가볍게 넘기는 수퍼스타가 종목을 막론하고 앞으로 또 나올까 싶습니다. 2005년 호주오픈 마랏 사핀과 4강전 패배 후 외신 기사의 제목은 'Federer, only human'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divine'(성스러운, 신계의)이 아니라는 말인데,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듯한 일련의 작품으로 'il divino'(성스러운 이) 칭호를 얻은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You changed the game, #RForever. Roger Federer ❤" 팬들의 아쉬운 멘트처럼 페더러를 떠나보내야 하는 지금. 그래도 보너스는 남았습니다. 23일 런던에서 개막하는 유럽과 월드팀의 단체전 레이버컵입니다.
Show must go on! 작별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황제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저같은 페빠에겐 이번이 'last dance'입니다. Chum jetze,(Let's go) Roger! (사진출처 ATP / 호주·US오픈 홈피 / 페더러 SNS / 키키홀릭)
YTN 서봉국 (bksuh@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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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테니스??'…속전속결 달인의 플레이
수용 인원 2만 3천 명 세계 최대 테니스 경기장 맨 꼭대기 20달러 짜리 좌석. 현기증까지 날 정도로 아찔한 급경사였지만 저희 부부는 흥분했습니다. ’달인‘ ’명장‘이라는 별명의 이 선수가 2회전 세계 99위 복병 줌후르에게 첫 세트를 내준 뒤 불과 2시간 22분 만에 3대 1 역전승을 이끌어냈기 때문이죠. 4세트 경기인데 140분 가량이니, 세트 평균 35분 정도. 우리 나이 거의 마흔, 움직임은 전성기만 못했지만, 전광석화 같은 플레이, 원샷원킬 스트로크는 ’GOAT’의 품격을 느끼기 손색이 없었습니다. ‘테알못’이나 다름없었던 아내(지금은 아님!)도 “마치 탁구를 치는 것 같다”고 감탄했던 선수, 바로 영원한 황제 로저 페더러입니다.
"24년, 테니스는 내게 너무 관대했다"
다소 장황하게 3년 전 직관 얘기를 꺼낸 것은 페더러의 은퇴가 벼락같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여자 최강 세레나 윌리엄스가 눈물 속에 마무리한 US오픈. 그 순간 동갑내기 수퍼스타 페더러의 근황이 궁금했던 사람은 저뿐이 아니었을 겁니다. 지난해 윔블던 8강 탈락 이후 와신상담, 무릎부상 회복에만 주력했던 페더러. 복귀 무대가 이달 레이버컵 대회로 확정된 상황에서 돌연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팬들과의 소통 도구 SNS를 통해서 말이죠. 이별의 문구 또한 얼마나 우아하고 겸손하던지요.
"가장 아름다운 테니스 선수"..이견이 있을까요
최초 메이저 20승, 231주 연속 세계 1위. 기록을 따지면 한이 없겠지만, 압도적인 실력 외에도 19년 연속 팬 투표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우아하기까지 한 테니스 스타일과 환상적인 경기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인종,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코트의 신사. 마치 검객의 발도술을 보듯 유려한 포핸드. 코스 예측 불허에다, 엄청난 사이드 스핀과 톱스핀으로 리시버를 춤 추게 만들었던 간결하고도 강력한 서브. 아련한 향수마저 불러일으키는 원핸드 백핸드는 말 그대로 예술의 경지였습니다. 서구에서 페더러를 'Maestro'(거장)라 칭송하는 것도 한때 거친 체력 싸움으로 점철됐던 테니스를 또 다른 레벨로 끌어올렸기 때문인 듯 합니다. 오죽하면 외신 은퇴 기사는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Retiring Roger Federer was the most beautiful tennis player I ever saw, and more.."
'다스 베이더' vs. '자상한 가장'의 두 얼굴
'코시국' 기간 격리 연습 때 틈틈이 근황을 전했던 페더러. 다른 종목 어떤 선수들보다 여성 팬들이 많았던 것은 유달리 가정적인 면모 덕분이 커 보입니다. 쌍둥이들 목욕을 시키다 무릎을 다쳤다는 일화는 또 어떻습니까? 반면 라이벌들, 특히 압도적인 천적 관계를 이루며 좌절했던 전 세계 1위 앤디 로딕이나, '빅4'에 가까스로 뽑히긴 했지만 이른바 '쟁반 그랜드슬램'을 불명예를 안은 앤디 머리 등에게 페더러는 악몽이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페더러 전성기에 맞붙게 된 동시대 선수들의 중압감은 지난해 출시된 미국 넘버2 마디 피시의 다큐 'Breaking point'에 생생히 드러납니다.
골프에 타이거 우즈가, 농구에 마이클 조던이 있었다면 지난 20여년 간 테니스를 대표한 간판은 페더러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한 분야의 틀을 완전히 바꿔놓은 이른바 '게임 체인저'. 무릎 부상 후유증으로 쉬는 동안에도 연수입 1천억 원을 가볍게 넘기는 수퍼스타가 종목을 막론하고 앞으로 또 나올까 싶습니다. 2005년 호주오픈 마랏 사핀과 4강전 패배 후 외신 기사의 제목은 'Federer, only human'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divine'(성스러운, 신계의)이 아니라는 말인데,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듯한 일련의 작품으로 'il divino'(성스러운 이) 칭호를 얻은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You changed the game, #RForever. Roger Federer ❤" 팬들의 아쉬운 멘트처럼 페더러를 떠나보내야 하는 지금. 그래도 보너스는 남았습니다. 23일 런던에서 개막하는 유럽과 월드팀의 단체전 레이버컵입니다.
Show must go on! 작별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황제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저같은 페빠에겐 이번이 'last dance'입니다. Chum jetze,(Let's go) Roger! (사진출처 ATP / 호주·US오픈 홈피 / 페더러 SNS / 키키홀릭)
YTN 서봉국 (bksuh@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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