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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인생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두 번 사는 인생이다' 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요.
이분은 말 그대로 두 번 째 삶을 살고 계십니다.
목사
지난 1968년, 청와대 습격을 위해 북에서 남파됐던 '무장공비'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한데요.
'제2의 삶'을 살고 계신 김신조 목사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질문1]
목사님이라고 소개 드렸는데, '김신조'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은 목사가 되셨다는 이야기에 놀라는 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 많으시죠?
[질문2]
한동안 월드컵 열기가 대단했는데요, 응원은 어디서 하셨습니까?
특히 이번 월드컵 본선에서는, 44년 만에 남북한 대표팀 동반진출 이뤘는데, 북한의 경기결과, 아쉬운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질문3]
많은 분들이 김신조 목사의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무장공비'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청와대 습격사건, 42년 전의 일이죠?
당시 몇 살의 나이셨나요?
[질문4]
남파됐던 31명 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당시 붙잡힐 경우 자폭을 명령 받은 걸로 아는데, 투항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질문5]
귀순 이후 안보 강연을 많이 한 걸로 아는데요, 기억에 남는 강연이 있을까요?
[질문6]
68년 당시 침투로였던 북악산 뒤편 산책로가 지난 3월, 40여 년 만에 개방이 되기도 했습니다.
직접 찾아가보셨죠?
소회는요?
제2산책로의 호경암에는 총탄자국이 여전히 선명한데요.
[질문7]
당시 1.21 김신조 침투사건은 남북분단상황에서, 한반도에 엄청난 긴장을 불렀던 사건이었습니다.
올해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데요.
김 목사께서도 직접 한국전쟁을 겪었죠?
전쟁의 참혹함과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데요?
[질문8]
귀순을 했지만 한국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소개로 회사원이 되기도 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어땠습니까?
[질문9]
남한에서 결혼을 하고 1남 1녀의 아버지가 되어 정착을 했습니다.
하지만 '무장공비'라는 꼬리표가 쉽게 떨어졌을 것 같진 않은데요?
가족들이 특히 힘들지 않았을까요?
[질문10]
그런데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결혼까지 난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질문11]
귀순 이후 북측 가족들의 소식은 들었나요?
김신조 목사의 투항으로 북측 가족에게도 어려움이 닥쳤을 것 같은데요?
[질문12]
혹, 전향을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질문13]
가족들에게까지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한국에서의 정착도 쉽지 않은 걸로 압니다.
현재 많은 새터민들이 정착 자금을 사기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김 목사께서도 그런 과정을 많이 겪으셨죠?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새터민들에게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질문14]
과거에 비해 현재는 김신조씨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목회자가 되려는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목사가 되면서 사람들의 시각도 확실히 달라졌죠?
[질문15]
작은 교회에서 목사님으로 계시다 최근엔 관련 아카데미 일을 하며 강연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40여 년 전 북한 특수부대원으로 남파됐던 청년시절의 김신조에서 새터민으로서의 김신조, 또 14년전부터는 목사로서의 새 삶을 살고 계신데요.
김신조 목사의 최종 삶의 목표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인생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두 번 사는 인생이다' 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요.
이분은 말 그대로 두 번 째 삶을 살고 계십니다.
목사
지난 1968년, 청와대 습격을 위해 북에서 남파됐던 '무장공비'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한데요.
'제2의 삶'을 살고 계신 김신조 목사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질문1]
목사님이라고 소개 드렸는데, '김신조'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은 목사가 되셨다는 이야기에 놀라는 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 많으시죠?
[질문2]
한동안 월드컵 열기가 대단했는데요, 응원은 어디서 하셨습니까?
특히 이번 월드컵 본선에서는, 44년 만에 남북한 대표팀 동반진출 이뤘는데, 북한의 경기결과, 아쉬운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질문3]
많은 분들이 김신조 목사의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무장공비'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청와대 습격사건, 42년 전의 일이죠?
당시 몇 살의 나이셨나요?
[질문4]
남파됐던 31명 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당시 붙잡힐 경우 자폭을 명령 받은 걸로 아는데, 투항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질문5]
귀순 이후 안보 강연을 많이 한 걸로 아는데요, 기억에 남는 강연이 있을까요?
[질문6]
68년 당시 침투로였던 북악산 뒤편 산책로가 지난 3월, 40여 년 만에 개방이 되기도 했습니다.
직접 찾아가보셨죠?
소회는요?
제2산책로의 호경암에는 총탄자국이 여전히 선명한데요.
[질문7]
당시 1.21 김신조 침투사건은 남북분단상황에서, 한반도에 엄청난 긴장을 불렀던 사건이었습니다.
올해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데요.
김 목사께서도 직접 한국전쟁을 겪었죠?
전쟁의 참혹함과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데요?
[질문8]
귀순을 했지만 한국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소개로 회사원이 되기도 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어땠습니까?
[질문9]
남한에서 결혼을 하고 1남 1녀의 아버지가 되어 정착을 했습니다.
하지만 '무장공비'라는 꼬리표가 쉽게 떨어졌을 것 같진 않은데요?
가족들이 특히 힘들지 않았을까요?
[질문10]
그런데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결혼까지 난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질문11]
귀순 이후 북측 가족들의 소식은 들었나요?
김신조 목사의 투항으로 북측 가족에게도 어려움이 닥쳤을 것 같은데요?
[질문12]
혹, 전향을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질문13]
가족들에게까지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한국에서의 정착도 쉽지 않은 걸로 압니다.
현재 많은 새터민들이 정착 자금을 사기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김 목사께서도 그런 과정을 많이 겪으셨죠?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새터민들에게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질문14]
과거에 비해 현재는 김신조씨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목회자가 되려는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목사가 되면서 사람들의 시각도 확실히 달라졌죠?
[질문15]
작은 교회에서 목사님으로 계시다 최근엔 관련 아카데미 일을 하며 강연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40여 년 전 북한 특수부대원으로 남파됐던 청년시절의 김신조에서 새터민으로서의 김신조, 또 14년전부터는 목사로서의 새 삶을 살고 계신데요.
김신조 목사의 최종 삶의 목표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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