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니 시리즈 87] 응급피임약, 남자도 처방된다? 진찰부터 구매까지 '5분'

[해보니 시리즈 87] 응급피임약, 남자도 처방된다? 진찰부터 구매까지 '5분'

2019.08.10. 오전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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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니 시리즈 87] 응급피임약, 남자도 처방된다? 진찰부터 구매까지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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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 할 수 없지 뭐, 해줘야지" 홀로 병원에 들어간 지 3분 만에 받은 처방전이었다. "최대한 빨리 드시게 하세요." 바로 옆 약국에서 약을 구입하기까지는 2분. 전문의약품인 응급피임약을 사는데 걸린 시간은 단 5분이다.

5분이라는 시간은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나에게 응급피임약이 필요한 여자친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련의 모든 과정이 너무나 빠르고 자연스러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느낄 틈이 없었다.

실패를 예상하고 시작한 취재였다. 여성이 복용하는 약을 남성이 직접 처방받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움을 뒤로 한 채, 설마 하는 마음으로 두 번째 병원을 찾았다.

"설마는 역시 사람을 잡더라"

내과에 이어 찾은 비뇨기과에서도 손에 처방전을 쥐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분 30초였다. 대기실에서 기다린 시간 1분 30초를 제외하면, 진료부터 계산·처방전 발급까지 총 2분이 걸린 셈이다.

의사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고, 어떤 의학적 진료나 지도도 해주지 않았다. 짧은 시간 유일하게 들을 수 있던 말은 의례적인 몇 문장뿐이었다. "받을 수 있어요. 처방해 줄게요. 요 앞에서 받아 가요"

그렇게 받은 또 한 장의 처방전은 주머니 속 응급피임약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해보니 시리즈 87] 응급피임약, 남자도 처방된다? 진찰부터 구매까지 '5분'

물론 모든 병원에서 처방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성전문의원' '산부인과 전문의(여성)'라고 적힌 산부인과의 문도 두들겨 봤다. 대기실에 앉아있던 환자부터 접수대의 직원까지 모두가 여성인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응급피임약'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단호히 거절당했다.

"접수 안 돼요, 여자분만 오셔야 해요. 여자친구가 직접 와야 해요"

"문제는"

"남자 앞으로 처방하는 경우는 없죠"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관계자는 앞서 처방에 성공한 사례들을 듣고 '황당한 경우'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관계자는 실제 복용을 하게 될 환자에 대한 진찰과 응급피임약에 관한 설명과 부작용 등 충분한 복약 지도가 필요한데, 이런 과정 없이 '묻지마 처방'을 해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건복지부 역시 위법의 소지가 있다고 봤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의사가 약을 복용할 환자를 직접 진찰한 뒤 처방하는 대면 진료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며 여성이 복용할 응급피임약을 남성에게 처방해주는 것은 의료법 위반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대리처방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지난 2일 국회 문턱을 통과한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따르면, 환자가 의식이 없거나 거동이 곤란하고 장기간 같은 병을 앓아 동일한 처방이 이뤄졌으며 주치의 판단 시 안정성이 인정된 경우 등 불가피한 경우에는 환자 대신 가족에게 처방전 발급이 허용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처방전을 대리 수령할 수 있는 이는 환자의 직계존비속, 배우자 및 배우자의 직계존속, 형제자매, 노인의료복지시설 종사자 등으로 한정되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거동도 가능하고 의사한테 직접 진료·처방이 가능한 여건임에도 남성이 여성 대신 응급피임약을 처방받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못 박았다. 이어 이 경우 담당 의사가 의료법상 제재나 민형사상 책임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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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이렇게 손쉽게 처방받은 약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가정의학과전문의 A 의사는 "응급피임약은 감기약이나 위장약 등과 그 성격이 다르다"며 "남성이 혼자 찾아와 처방을 희망하는 경우, 약의 정확한 용처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최악의 경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오용·악용될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그는 "응급피임약의 경우 여성이 직접 요청하는 경우에만 진료를 통해 처방해야 한다"며 병원 측의 세심한 주의가 요망된다고 강조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관계자 역시 "의사들이 대리처방에 대해 아직도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묻지마 처방'을 방지하고 개선하려는 의료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요구는 제각각, 논의는 깜깜이"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난 4월, 일부 시민단체는 전문의약품인 응급피임약을 처방이 필요 없는 일반의약품으로 재분류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등에서는 응급피임약이 이미 일반의약품이며, 피임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접근성이 높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전환 불가 입장을 고수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만 15~44세 여성 1만 명 대상으로 진행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2018)' 결과에 따르면 응급피임약(사후피임약) 처방 건수는 2017년 17만8,300건으로 2012년보다 28.8% 늘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가 나지 않아 국내에서는 불법인 임신중단약 '미프진'이나 음성적으로 처방되는 약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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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피임약은 이미 많은 이들이 처방을 받아 복용하고 있거나, 앞선 취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처방받을 수 없는 남성에게 까지도 '묻지마' 식의 불법 처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실과 제도 사이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요구를 수용해 응급 상황 시 접근성을 높이고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기 위해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재지정하거나, 처방과 복약에 있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한 의학 지도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해 보였다.

사회적 합의가 미뤄지는 사이 응급피임약은 애매한 회색지대에 갇혀 누군가에게는 엄격하고 누군가에게는 관대한 약이 되어가고 있었다.

"응급피임약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피임이 되지 않았을 경우 원하지 않은 임신을 피하기 위해 성교 직후 대처할 수 있는 사후 피임법 중 하나로 '응급피임약' 혹은 '사후피임약'으로 불린다. 일반 피임약보다 약 10배 이상 높은 호르몬 함량으로 체내 호르몬 농도를 인위적으로 증가 시켜 배란을 억제하거나 수정란의 자궁 내 착상을 방해한다.

응급피임약을 복용할 경우에도 피임 성공률이 100%는 아니다. 성관계 후 복용 시간이 빠를수록 피임 확률이 높아지며 72시간 이후 복용하면 효과가 없다. 또한 3시간 이내 토했을 경우 즉시 약을 추가로 복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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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동안 호르몬 농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생리 주기 자체가 바뀌거나 월경 외 출혈, 배란 장애, 어지럼, 두통, 구역, 약한 복통, 설사, 자궁통, 유방 긴만감, 피로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한 생리 주기 동안 1회를 초과하여 복용할 경우 체내 호르몬 농도가 높아져 생리 주기에 심각한 장애를 미칠 수 있어 잦은 복용은 지양해야 한다.

응급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복용할 여성 본인이 직접 의사와 대면 진료 후 처방받는 것이 원칙이다.

미성년자의 경우, 응급피임약 처방에 있어 보호자의 동의나 동행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의사결정 능력이 있는 경우 법정대리인의 동의나 동행 없이 처방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관계자 역시 "처방전을 발급하는 주치의가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적 자기 결정권에 따른 권리와 사생활 보호를 위해 투약 사실에 대한 비밀 유지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보호자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YTN PLUS 김성현 기자 (jamkim@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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