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사건의 발단
휴대전화 매장에서 일하는 34살 허 모 씨. 지난 1월 17일 새벽 2시쯤 인천의 한 도로에서 술에 취해 운전하다가 사고를 냈습니다. 앞차를 들이받은 뒤 자신의 차까지 전복될 만큼 큰 사고였지만, 허 씨는 피해자를 구조하거나 상황을 정리하지 않은 채 자리를 이탈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서 발견됐지만, 경찰관의 음주 측정 요구를 거부한 혐의까지 더해져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허 씨가 음주운전을 한 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두 차례 음주운전으로 벌금형을 받은 전력 등 때문에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습니다.
"양형 부당" 항소…치유법원 프로그램 첫 사례자로
허 씨는 1심 형량이 지나치게 무겁다며 항소했습니다. 항소심 재판은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됐습니다. 항소심 첫 재판이 열린 8월 23일. 수의를 입고 법정에 나온 허 씨에게, 재판부는 '직권 보석'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보증금도 없었습니다. 다만 '과제' 비슷한 조건 3가지가 주어졌습니다. 석 달 동안 매일 밤 10시까지 귀가하고, 술을 마시면 안 되고, 매일 활동 보고서와 동영상을 비공개 인터넷 카페에 업로드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3개월 동안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이를 양형에 반영해 선고하기로 했습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가 전국 최초로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로 한 겁니다.
여기서 잠깐, 치유법원 프로그램이란?
생소한 개념이라 재판부의 설명을 빌리겠습니다. 치유법원 프로그램은 '법원이 형사 피고인에게 범죄의 원인이 된 이유를 치유하기 위해 과제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과제 수행 결과를 양형에 반영하는 제도'입니다. 피고인을 무조건 법대로 처벌하기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변화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취지입니다. 예를 들어 마약 중독자에게는 약을 끊도록, 알코올 중독자에게는 술을 끊도록 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일이겠죠. 이를 위해 사법부에서 일종의 가이드가 돼 주는 겁니다.
100일간의 금주 일기
허 씨에겐 아내와 두 자녀가 있습니다. 허 씨는 보석으로 석방된 그 날부터 매일 가족과 함께 저녁 일상을 영상으로 찍어 카페에 업로드했습니다.
3개월이 조건이었지만. 그날부터 선고 전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허 씨는 과제를 수행했습니다. 업로드된 동영상은 103개. 비공개 카페에 가입이 허용된 판사와 재판연구원, 검사와 변호인은 댓글을 달아 준수 사항을 매일 확인했습니다. 단순히 영상을 체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영상 피드백과 소감을 남기며 매일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검찰의 '구형' 있어야 할 결심공판 날
재판부는 석 달 가까이 과제를 성실히 수행한 허 씨를 향해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법정에서 동영상을 틀어 다 함께 감상했고,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 모두가 피고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고를 앞둔 결심공판 날엔, 검찰이 최종 의견과 함께 "얼마를 선고해달라"라고 재판부에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날, 검찰은 "재판부께서 적절한 형을 선고해달라"라는 이례적인 구형을 내렸습니다.
1심 실형에서 2심 집행유예로
그로부터 한 달 뒤, 재판부는 약속을 이행한 피고인에게 일종의 '선물'로 유리한 형량을 선고했습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는 1심의 징역 1년을 파기하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성실하게 이행하겠다고 한 약속은 재판부에 대한 약속이었지만, 사실은 자신의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약속이자 자녀들 앞에서 자랑스러운 아버지, 믿음직한 남편이 되기 위한 약속이었고, 피고인은 결국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치유법원 프로그램 첫 졸업자로서 우리 사회에 밝고 따뜻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달란 당부도 함께 건넸습니다.
'첫 졸업자' 허 씨의 심경은?
선고가 끝난 뒤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1심에서 법정구속되고, 직권 보석으로 풀려난 뒤, 치유법원 프로그램 첫 졸업자로서 집행유예로 감형까지. 무엇보다 허 씨의 심경이 궁금했습니다. 생소한 개념이다 보니 처음엔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당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됐다는 생각에 힘들단 생각 없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겁게 보냈고, 그러면서 다신 술을 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격려와 박수를 받을 땐 부끄럽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는 거죠.
1심 때 법정구속됐을 당시와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 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물었습니다. 1심 때는 막연히 술을 먹지 말아야겠다고만 생각했다면 이 프로그램을 통해선 자신이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 깨달았다고 합니다. 술이 아니어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행복하다는 걸 깨달아서 술은 먹지 않게 될 거란 다짐도 남겼습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
하지만 치유법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가깝게는 당장 재판 참여 당사자인 검찰부터 회의적인 입장을 여러 차례 제시했습니다.
검사 "이 제도는 피고인에게 굉장한 혜택, 단순하게 말하면 특혜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만일 법원에 이러한 시도가 없었다면 구치소에서 수용생활을 해야 할 상황인데 법원의 판단에 따라서 일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그래서 검사의 의견은 법원의 이러한 시도에 대하여 피고인이 충분하게 그에 대한 노력이 뒤따라야 된다고 봅니다." (2회 공판기일)
검사 "한국에서는 생소하고 정착되지 않은 제도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검사의 생각은, 이 치유의 개념은 교화 내지 형벌의 집행 과정에서 취해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에 대한 감독의 문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좀 더 강화해야 될 필요는 없는지 등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평가의 문제도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3회 공판기일)
선고를 마친 뒤 나온 피고인 측 변호인도, 물론 필요한 제도긴 하지만 보완할 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매일매일 촬영한 동영상을 업로드하지만 과연 금주가 지속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건지, 프로그램을 마친 뒤에도 금주가 이행될 수 있을지 등에 대해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는 생각을 전했습니다.
기사가 난 뒤 인터넷 여론도 뜨거웠습니다. "또 술 먹고 운전할 사람인데 왜 풀어주느냐"라는 비판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개념이 생소하단 게 한몫했을 거고, 음주운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더 커진 시대적 흐름도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재판부 "기회를 주는 것"…해외 사례도
해외 사례를 먼저 보겠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만큼 우리나라에선 생소한 개념이지만, 영미권 국가에선 상황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영국, 캐나다와 호주에선 이미 치유법원 자체를 별도로 설치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알코올치유법원 또는 약물치유법원을 설치해 운영 중인데, 법관은 물론 검사와 변호인, 보호관찰관, 정신과 의사 등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뉴욕 주에는 2010년 기준으로 약물치유법원만 180여 개가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실정입니다. 2013년 이후에야 치유법원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아직 제도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판부에선 이에 대해 '어떤 모습으로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이 제시되지 못했고, 법원에서도 내부 합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는 인력과 예산의 문제도 있습니다.
다만 재판부는 성공적 치유법원의 미래를 위해 현재 주어진 여건에서 여러 방식으로 시범 시행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람이 바뀌겠느냐"라는 비판에, 재판부는 '재기의 기회'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설명합니다. 치유법원 프로그램 자체가 누군가를 교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란 겁니다. 중독에서 벗어나 변화할 기회를 제공하고, 앞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고, 법원은 '효용이 없는 처벌의 반복'을 막고자 노력해야 한다고도 설명했습니다.
재판부 "치유법원 프로그램은 피고인에게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즉 법원은 피고인에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삼아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로지 피고인 본인에게 달린 것입니다." (3회 공판기일)
공은 이제 허 씨에게 넘어갔습니다. 치유법원 프로그램의 첫 졸업자로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은 허 씨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전적으로 그의 손에 달렸습니다.
YTN 사회부 강희경 기자[kanghk@ytn.co.kr]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