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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최근 '황진이' 등 기생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 등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런 가운데 평양 기생 출신으로 일제하 조선 유행가의 여왕이었던 왕수복을 조명한 책이 나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권오진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전혀 생소한 인물 왕수복.
그녀를 상징하는 평양기생 출신 최초의 유행가수라는 사실조차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왕수복의 노래는 황금심,김정구 등이 부르면서 살아남기도 했지만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취급돼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공훈배우였고 김일성과 김정일로부터 환갑과 칠순,팔순 생일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인사였습니다.
일제하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그녀가 최근 국내에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17살인 1933년 취입한 레코드가 당대 최고 판매량인 120만장을 기록했고 그녀가 부른 아리랑은 경성방송국 전파를 타고 일본 전역에 퍼졌습니다.
35년에는 지금의 10대 가수 대상인 잡지 '삼천리'의 남녀가수 인기투표에서 고복수, 이난영 등을 제치고 전체 1위에 올랐습니다.
기생 출신이라는 열등감 극복을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벨트라메리 요시코라는 이탈리아 성악가로부터 정통 성악도 배웠습니다.
'퀴리 부인''죄와 벌''좁은 문'같은 명작 등을 접하며 나름대로 지성도 갖춰나갔습니다.
스물 네살이 되던 해에는 일본 유학중 만난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과 2년여간 열렬한 사랑도 나눴습니다.
이후 시인 노천명과 약혼한 상태였던 보성전문 법학교수 김광진과 결혼에 성공하고 분단과 함께 평양에 남아 제2의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풍부한 성량과 맑은 목소리에 '한'이라는 우리 민족정서를 잘 살린 왕수복의 노래는 최고란 찬사를 아낌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86살이었던 지난 2003년, 그녀의 화려했던 삶은 결국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YTN 권오진입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최근 '황진이' 등 기생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 등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런 가운데 평양 기생 출신으로 일제하 조선 유행가의 여왕이었던 왕수복을 조명한 책이 나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권오진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전혀 생소한 인물 왕수복.
그녀를 상징하는 평양기생 출신 최초의 유행가수라는 사실조차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왕수복의 노래는 황금심,김정구 등이 부르면서 살아남기도 했지만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취급돼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공훈배우였고 김일성과 김정일로부터 환갑과 칠순,팔순 생일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인사였습니다.
일제하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그녀가 최근 국내에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17살인 1933년 취입한 레코드가 당대 최고 판매량인 120만장을 기록했고 그녀가 부른 아리랑은 경성방송국 전파를 타고 일본 전역에 퍼졌습니다.
35년에는 지금의 10대 가수 대상인 잡지 '삼천리'의 남녀가수 인기투표에서 고복수, 이난영 등을 제치고 전체 1위에 올랐습니다.
기생 출신이라는 열등감 극복을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벨트라메리 요시코라는 이탈리아 성악가로부터 정통 성악도 배웠습니다.
'퀴리 부인''죄와 벌''좁은 문'같은 명작 등을 접하며 나름대로 지성도 갖춰나갔습니다.
스물 네살이 되던 해에는 일본 유학중 만난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과 2년여간 열렬한 사랑도 나눴습니다.
이후 시인 노천명과 약혼한 상태였던 보성전문 법학교수 김광진과 결혼에 성공하고 분단과 함께 평양에 남아 제2의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풍부한 성량과 맑은 목소리에 '한'이라는 우리 민족정서를 잘 살린 왕수복의 노래는 최고란 찬사를 아낌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86살이었던 지난 2003년, 그녀의 화려했던 삶은 결국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YTN 권오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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